(역주) 당시 완 몰리완이 받은 장학금은 캄보디아 최초의 법학 전공 유학생 선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전공을 건축으로 바꿨다고 한다. |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수학한 완 몰리완은 [근대건축의 3대 거장 중 한사람인] 르 꼬르뷔제(Le Corbusier: 1887-1965)의 제자들에게서 훈련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선생들을 통해 훗날 자신의 설계에서 주요한 기반을 형성하게 될 프랑스적 비례에 관한 사조인 "모듈러"(Le Modulor) 시스템을 공부했다고 한다. 완 몰리완은 자신이 당시에 캄보디아에 대한 것은 별로 공부하지 않은 채, "프랑스 문화에만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고 토로했다.
젊은 시절의 폴 포트(Pol Pot)를 포함하여 당시 파리에서 함께 수학했던 크메르인 동포들은 맑시즘과 스탈린주의에 깊이 몰두하며, 훗날 크메르루즈를 위한 이념적 토대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완 몰리완은 1956년에 프놈펜으로 귀국했다. 당시 그는 캄보디아에서 정규적 훈련을 받은 극소수의 건축가에 속했다.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1953년에 독립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근대적인 도시들이나 도시계획 같은 것은 존재치도 않았다. 그는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건축'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건축이 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회사를 개업해서 소규모 공사들을 맡았다.
하지만 노로돔 시하누크 공이 그를 국가재건과 도시계획 사업의 책임 설계자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가 정부와 접촉하게 되면서, 자신이 파리에서 공부했던 내용과 캄보디아인들의 전통과 삶의 양식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모더니즘(Modernism)과 브루탈리즘(Brutalism)의 홍융된 양식을 공공 건축물들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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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완 몰리완 설계. 국립 올림픽 경기장 콤플렉스. |
이후 약 15년간 완 몰리완은 프놈펜 및 캄보디아의 여타 장소들에 수십 건의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의 최대 걸작은 "올림픽 경기장"이다. 불규칙하게 뻗어나간 선을 가진 이 종합경기장은 1963년에 개최 예정이었던 제3회 "동남아시아 경기대회"(SEA Games)를 위해 건설됐지만, 결국 이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올림픽 경기장은 고대 앙코르 시대의 해자와 운하들에서 영감을 받았고, 비상하는듯한 콘크리트 돌출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 새로운 건축과 문화적 독창성의 한 시기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겨우 30대 초반이었다. 완 몰리완은 "그 나이에 그런 건축을 할 가능성을 얻었다는 걸 상상해보라"고 말하면서 눈이 반짝거렸다.
노로돔 시하누크 공은 건축을 발전을 위한 열망의 표현수단인 동시에, 새로이 독립한 캄보디아 국민들의 근대성을 표출할 수단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국가에산의 상당 부분을 건설사업에 배정했고, 냉전시대에 중립정책을 교묘하게 표방하면서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이끌어냈다. 완 몰리완은 "시하누크 공은 외부세계에 극도로 개방적이었다. 당시 캄보디아는 국가를 건설한다는 엄청난 열정에 빠져 있었고, 시하누크 왕자가 이러한 감정을 공유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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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완 몰리완 설계. 독립기념탑. |
시하누크 공의 걸출한 전시물 중 하나는 "러시안 대로"(Russian Boulevard)였다. 이 도로는 프놈펜 중심부와 "프놈펜 국제공항" 사이를 연결하는 기능을 가졌다. "국립교육대학" 건물과 관방부 청사를 비롯한 완 몰리완의 주요 작품들과 함께, "러시안 대로"는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국빈들에게 위엄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로돔 시하누크는 중립적 자세를 영원히 견지하진 못했다. 베트남 전쟁의 여파가 캄보디아를 엄습하자, 완 몰리완은 1972년 가족들을 데리고 고국을 떠났다. 그리고 왕자의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은 결국 크메르루즈의 야만적 학정에 길을 터주게 되었다. 완 몰리완은 이후 약 20년간 미국의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의 다양한 곳들에서 활동했다.
그는 1993년에 캄보디아로 귀국했다. 하지만 그의 2번째 귀향은 처음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앙코르와트(Angkor Wat) 사원군을 관리하는 한 기구의 수장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그가 공개적으로 정부의 부정부패를 거론하자 훈센(Hun Sen) 총리의 현 정부는 그를 사임시켰다. 그는 "나는 앙코르와트 입장료 수익이 프놈펜에 있는 정부 관료들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랬더니 그들은 '완 몰리완은 나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후 정부로부터 반감을 산 완 몰리완은 프놈펜의 도심이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캄보디아의 열망을 선도했던 노로돔 시하누크의 "러시안 대로"는 도심으로 재화와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트럭들과 모또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캄보디아 경제 붐을 타고 유리벽의 철골 빌딩들과 제방처럼 찍어낸 주거용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또한 중국이 자금을 지원해서 들어선 새로운 "관방부" 청사는 거대한 도개교 형태였던 완 몰리완의 피라미드형 건축물을 대체했다. 아마도 그의 옛 작품은 중국의 어느 성청 소재지 모습을 더이상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빌 그리브스는 "지금의 캄보디아는 현대적인 도시란 상하이나 방콕처럼 직선이 강조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의 현대 건축은 일반 대중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좀 더 딱딱한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다.
빌 그리브스를 비롯한 완 몰리완의 예찬론자들은 캄보디아인들에게 완 몰리완의 경력을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완 몰리완의 작품들이 처한 운명은 결국 현 정부의 관할 하에 있다. 현 정부는 1979년 크메르루즈 정권을 무너뜨린 뒤 정권을 잡은 이들이다. 완 몰리완은 "현 정권은 1979년 이전에 있었던 어떠한 것도 남아있길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업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완벽히 조작된다"고 말했다.
완 몰리완은 현재 정부의 직함 하나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명예직이다. 그는 동남아시아의 도시화에 관해 썼던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캄보디아의 공식언어인 크메르어로 번역하는 중이다.
"캄보디아 국토관리도시계획건설부"(MLMUPC)의 벵 켐로(Beng Khemro) 도시계획국 부국장은 말하기를, 정부가 캄보디아의 건축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환경을 변화시키는 일은 모든 국가들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캄보디아만 예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올해 21세인 유인 소티어러(Yin Sotheara)는 건축학도로서 "완 몰리완 프로젝트"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은 새로운 개발사업에서 역할을 담당하고 싶어한다. "SKD 양조자" 뒷편에 위치한 후면 발코니 근처에서, 유인 소티어러는 자신의 졸업 후 진로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는 "캄보디아 건축업계에는 별로 기회가 많지 않다. 신축되는 많은 빌딩들을 한국이나 중국의 기업들이 짓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완 몰리완에 관한 공부는 그에게 캄보디아 건축에 있어서 역할모델을 최초로 제시해주었다. 그는 "완 몰리완은 외래적 개념을 캄보디아 전통과 결합시켜 새로운 건축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캄보디아인들의 삶의 양식에 알맞는 건축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첫댓글 자주 보았던 건물들이었지만 완 몰리완이라는 사람이 건축한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한 나라를 알아 간다는 면에서 이 카페는 참 다양한 지식을 갖게 해 줍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위의 글 마지막에서 캄보디아 학생의 말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 과거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을 해도
새롭고 신선한 눈으로 미래의 세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저런 학생들에게 새롭고도 신선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현재진행형 일자리가 없으니..
결국 자원봉사자라도 받아주는 과거지향형 참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캄보디아가 진정으로 깨어나는 것 중 하나가
과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좀 자유로와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실은 과거와 미래 2가지가 다 중요한 것인데 말이죠...
와. .. 완 몰리안 스토리 너무 재밌습니다.
대박이네요.
프랑스와 직접 소통했기 때문일까요? 대단하군요....
그렇죠...
실은 캄보디아가 사람 수는 적어도
분명히 태국이나 베트남과 또 다른
크메르제국의 후예들로서,
상당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SPK Plus>와 <리어 후> 관련 게시물도 함 살펴보시면
더욱 더 그런 느낌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중음악도 아직 시장이 영세해서 그렇지,...
실은 어떤 면에서는 태국과는 또 다른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문화적 저력이 있는 민족임에는 분명합니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를 거치면서
프랑스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인 영향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점에서는
분명히 태국과는 또다른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