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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45강 (枝末法會, 善住比丘)]
화엄경 78쪽부터인데 내용이 네 번째 선지식인 선주비구(善住比丘) 선지식에 관한 법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77쪽의 선주비구부터 오늘 설명할 데까지 쭉 읽을 테니까 속으로 따라 읽으세요. 눈으로 따라 읽고 또 마음으로 따라 읽으십시오. 한문경전 공부를 이만치 했으니 이제 읽으면 충분히 뜻이 돌아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복습도 하고 예습도 하고 또 테이프도 가져가서 다시 한 번 더 듣기도 하고, 거기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한문 경전을 읽고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 뭔가 마음에 뿌듯하고 재미도 더 있을 거예요. 공부를 그런 입장으로도 좀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교훈을 건지는가 하는 이런 관심도 좋지요.
좋은 말씀에서 우리 마음을 한번 되돌아보는 그런 기회도 물론 좋습니다만, 곁들여서 한문 경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실력도 갖춰진다고 하면 그보다 더 좋은 소득은 없지요.
네 번째 선지식인 선주비구는 지위로는 제3수행주(修行住)선지식이라고 되어 있어요.
依敎趣求
爾時에 善財童子가 專念善知識敎하며 專念普眼法門하며 專念佛神力하며 專持法句雲하며 專入法海門하며 專思法差別하며 深入法漩澓하며 普入法虛空하며 淨持法碍障하며 觀察法寶處하고 漸次南行하야 至楞伽道邊海岸聚落하야 觀察十方하고 求覓善住하니라
見此比丘가 於虛空中來往經行에 無數諸天이 恭敬圍遶하야 散諸天華하며 作天妓樂하며 幡幢繒綺가 悉各無數하야 邊滿虛空하야 以爲供養하며 諸大龍王이 於虛空中에 興不思議沈水香雲하야 震雷激電하야 以爲供養하며 緊那羅王이 奏衆樂音하야 如法讚美하야 以爲供養하며 摩睺羅伽王이 以不思議極微細衣로 於虛空中에 周廻布設하야 心生歡喜하야 以爲供養하며 阿修羅王이 興不思議摩尼寶雲하야 無量光明의 種種莊嚴으로 邊滿虛空하야 以爲供養하며 迦樓羅王이 作童子形하야 無量采女之所圍遶으로 究竟成就無殺害心하야 於虛空中에 合掌供養하며 不思議數諸羅刹王이 無量羅刹之所圍遶로 其形長大하야 甚可怖畏나 見善住比丘하고 慈心自在하야 曲躬合掌하고 瞻仰供養하며 不思議數諸夜叉王이 各各悉有自衆圍遶하야 四面周帀하야 恭敬守護하며 不思議數諸梵天王이 於虛空中에 曲躬合掌하야 以人間法으로 稱揚讚歎하며 不思議數諸淨居天이 於虛空中에 與宮殿俱하야 恭敬合掌하야 發弘誓願하니라
그 다음부터 해석 들어갈 차례이지요.
선주비구를 만나서 모든 하늘들, 무량제천, 제대용왕, 긴나라, 마후라가, 아수라 또 가루라, 나찰왕, 야차왕 별별 천신들이 선주비구를 에워싸고 공양을 올리는 그런 광경을 설명했습니다.
(2) 諮問菩薩
時에 善財童子가 見是事已하고 心生歡喜하야 合掌敬禮하고 作如是言호대 聖者여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而未知菩薩이 云何修行佛法이며 云何積集佛法이며 云何備具佛法이며 云何熏習佛法이며 云何增長佛法이며 云何總攝佛法이며 云何究竟佛法이며 云何淨治佛法이며 云何深淨佛法이며 云何通達佛法이리잇고 我聞聖者는 善能誘誨라하니 唯願慈哀하사 爲我宣說하소서 菩薩이 云何不捨見佛하야 常於其所에 精勤修習이며 菩薩이 云何不捨菩薩하야 與諸菩薩로 同一善根이며 菩薩이 云何不捨佛法하야 悉以智慧로 而得明證이며 菩薩이 云何不捨大願하야 能普利益一切衆生이며 菩薩이 云何不捨衆生行하야 住一切劫호대 心無疲厭이며 菩薩이 云何不捨佛刹하야 普能嚴淨一切世界며 菩薩이 云何不捨佛力하야 悉能知見如來自在며 菩薩이 云何不捨有爲호대 亦復不住하야 普於一切諸有趣中에 猶如變化하야 示受生死하야 修菩薩行이며 菩薩이 云何不捨聞法하야 悉能領受諸佛正敎며 菩薩이 云何不捨智光하야 普入三世智所行處니잇고
그 다음, 자문보살(諮問菩薩)이라, 보살행에 대해 묻는 것이지요. 물을 자(諮), 물을 문(問)자입니다.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그때에 선재동자가
견시사이(見是事已)하고, 이러한 일들을 보아 마치고,
이러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천신들이 선주비구를 에워싸고 공양하고 있는 그러한 일들을 다 살펴보고 나서
심생환희(心生歡喜)하야, 마음에 환희심을 내어
합장경례(合掌敬禮)하고, 합장해서 공경히 예배를 올리고
작여시언(作如是言)호대, 이와 같은 말을 짓되
이제 선주비구에게 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성자시여, 나는 이미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 그러한 마음을 내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거지요. 그 모르는 것이란 것은
이미지보살(而未知菩薩)이 운하수행불법(云何修行佛法)이며, 보살로서 어떻게 불법을 수행하며
운하적집불법(云何積集佛法)이며, 또 어떻게 불법을 쌓아가며, 적집(積集)이란 말은 쌓는다는 말이지요.
불법은 쌓아가는 거예요. 불법은 우리가 하루 이틀 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쌓아 가는 것입니다.
염불도 해서 쌓아가고, 참선도 해서 쌓아가고, 경전공부도 해서 쌓아가고 사경도 해서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경과함에 따라서 불법(佛法)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는 만큼 쌓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 하루 불법과 인연을 맺으면서 또 공덕을 닦으면서 공부를 하는 그 노력이 불법을 적집(積集)하는 일입니다.
운하비구불법(云何備具佛法)이며, 불법은 또 여러 가지를 갖춰줍니다.
불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 이것만 할란다, 관세음보살만 할란다. 다른 경전 공부도 필요 없고 천도하는 것 등 다른 거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지요. 불법 속에서는 세속생활에서 누리었던 그런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니까 그런 것들을 자꾸 갖춰 나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비(具備)한다 그러지요, 여기에서는 비구(備具)한다고 했어요.
운하훈습불법(云何熏習佛法)이며, 불법을 쌓아나가고 불법을 구비해 나가면서 몸에 익숙하게 하는 거지요. 경전 공부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모르지요. 어색하고 못 알아보는 부분도 많고요, 한문은 더 캄캄하고 그렇지만 자꾸 익혀요. 한 번 두 번 익히다 보면 나중에는 익숙해져요. 그게 훈습입니다. 그처럼 훈습이 중요해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는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풍긴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거든요. 그게 훈습이 원인이라.
부처님은 길을 가시다가 종이를 한 장 발견하고는 제자에게 주워오라고 하지요. 그 종이가 어떠냐고 묻자 향기가 난다고 해요. 그러자 부처님이 종이를 확인하지요.
또 한참 가다가 새끼를 발견하고는 이번에는 새끼를 주워오라고 하는데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있어요.
그러자 제자가 “아, 부처님이시여,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새끼 같습니다. 지금까지 비린내가 풍기는 걸로 봐서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새끼와 종이를 받아 가지고 가시다가 나무그늘에 제자들을 불러 앉히고는 그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보라, 이 종이는 본래 향기가 없었지만 향을 가까이 한 관계로 향내가 난다. 새끼에는 비린내가 본래 없었지만 생선을 가까이 한 관계로 새끼에서 비린내가 풍긴다.
이와 같이 본래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 훈습하느냐에 따라서 향기가 날 수도 있고 비린내가 풍길 수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아서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과 인연을 자꾸 맺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향기로울 수도 있고 비린내를 풍길 수도 있다”는 그런 아주 유명한 대화를 하셨어요. 훈습이란 게 그겁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자꾸 하다보면 되는 거지요. 어릴 때는 훈습이 잘 되지요? 왜지요? 쌓여있는 정보가 없고 다른 세속적인 때가 안 묻었으니까요. 나이가 들어 새삼 하려면 그동안 세속적인 다른 습관들이 많이 축적이 되어 있어서 힘이 들지요. 그런 것을 감내하고 새로운 불법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하면 그만치 힘이 든다고요. 힘이 들지만 그것도 오래 하다보면 금방 또 훈습이 되요. 그래서 훈습불법(熏習佛法)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운하증장불법(云何增長佛法)이며, 훈습을 했으면 그것을 자꾸 키워야지요. 증장(增長)이라는 말은 키워가는 일을 말하지요. 자꾸 발전해 나가는 일을 증장이라 합니다.
그 다음 운하총섭불법(云何總攝佛法)이며, 불법 세계의 모든 좋은 가르침을 하나도 안 놓치고 전부다 거둬들인다는 거지요.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거지요.
운하구경불법(云何究竟佛法)이며, 그런 불법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구경이란 것은 완성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불법을 다 완성할 수 있겠는가.
운하정치불법(云何淨治佛法)이며, 이것은 이제 불법을 갖다가 청정하게 다스리는 거예요. 이것 저것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물론 좋지요. 다 가지는 것도 좋고, 완성하는 것도 좋은데 이것이 말하자면 정갈하게 정리가 착착 되고 쓸모 있는 자리에 딱딱 쓰여지고, 있을 자리에 딱딱 있는, 이게 정치(淨治)입니다.
참선을 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 참선을 할 자리에는 정확하게 참선을 하고, 기도드릴 자리에는 정확하게 기도를 하고 어떤 장소에 갖다 놓더라도 정말 불법으로 몸이 제대로 다듬어진 사람은 어떤 일도 자기 일같이 척척 해내는 거지요.
운하심정불법(云何深淨佛法)이며, 청정하게 다스리는 것이 더욱더 깊어지는 경지이지요. 심정불법(深淨佛法)이라는 말은 더욱 깊어지는 것을 말하지요. 어떻게 하면 불법이 더욱 더 깊고 그리고 청정하게 할 수 있으며
운하통달불법(云何通達佛法)이리잇고, 어떻게 하면 불법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제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열 가지 질문을 만드느라고 뜻으로는 사실 중복되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하나의 낱말이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면 있지요.
이걸 갖다가 이제 질문한 것입니다.
나는 발심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러 이러한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그런 뜻이지요.
아문성자(我聞聖者)는, 내가 듣기에 성자께서는
선능유회(善能誘誨)라 하니, 잘 능히 유회(誘誨), 가르쳐 준다는 뜻이지요. 회(誨)자는 그냥 단순히 가르친다는 뜻이고 유(誘)자는 꼬일 유, 달랠 유,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배우고 싶도록 하는 것, 여러 가지 분위기로, 또 어떤 가치를 이야기 한다든지 해서 배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나도록 가르치는 것, 그것이 참 어렵지요.
덮어 놓고 공덕이 된다, 좋다 해서는 배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오래 가지를 않아요. 뭔가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유태인들이 자녀 교육에는 아주 무서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그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을 하는지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냥 무턱대고 열 개, 스무 개 다 가르치려고 하고, 학교에 가면 무조건 공부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 사람들은 공부가 재미있도록 유도를 해요. 동기유발이라고 해서 공부가 재미있도록 하는 거예요.
학교 처음 들어가는 날은 초코렛이나 과자를 만들어서 아이들한테 나누어 주는데 그 과자가 알파벳으로 만들어져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요즘은 그런 게 나오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천년 전에 벌써 그런 교육방법을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 이 과자 달콤하지? 그리고 이건 글자야. 글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과자 맛처럼 달콤한 것이야.” 하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간 첫날 첫 시간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주니 얼마나 인상적이겠어요. 평생 그 것이 심어지는 거예요. “과자가 몸에 이롭고 영양을 보충하듯이 학교 공부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달콤하고 너희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야.
학교에 오면 이런 공부를 하게 되고, 공부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평소에 잊지 말아라”, 하고 이렇게 아이들을 유혹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방편입니까. 이런 방법을 써야 되는데 우리 어릴 때는 무턱대고 우격다짐으로, 주먹을 써서 공부하라고 하고, 안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였으니 그 효과가 별로 있습니까? 힘만 더 들었지요.
유태인들은 그런 식으로 공부를 가르쳤으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자꾸 하는 거예요. 재미있고 맛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해요.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에게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한다고 이렇게 꼭 당부를 하거든요.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부모 말씀 잘 듣는 애들이 착하고 효녀이지요.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들이 착하고 좋은 아이이고 그렇지요. 유태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선생님에게 질문 많이 해” 이런다고 합니다. 질문 많이 하라고 가르치지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교육에 대한 그런 방법을 사실은 근본적으로 잘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많은 세월을 겪으면서도 그게 제대로 안되어 있지요. 뭡니까? 유태인들은 나라를 찾은 지가 아직 얼마 안 되지요.
그 사람들은 이천 년 동안 피난생활을 했으면서도 그 민족이 그대로 지켜져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나라를 되찾았잖아요. 우리 민족 같으면 민족이 벌써 없어져 버렸을 거예요. 이천년을 유랑생활을 하다가 자기 나라를 찾은 거예요. 그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요.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삼분의 일이 유태인 출신입니다. 놀랄 일이지요. 미국의 어느 유명한 대학의 교수 중 삼분의 일이 또 유태인 출신이라고 해요.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의 거의가 또 유태인 출신이에요. 그런 정도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교육에 있어 아주 깊이 연구를 해서 자녀들 교육을 잘 시켰기 때문에 오늘날 그런 나라가 됐다는 것은 천하가 다 잘 아는 일이지요.
참 이런 말을 들으니,
선능유회(善能誘誨)라, 성자께서는 우격다짐으로 나에게 그냥 해라 하고 가르치는 그런 식이 아니고 유회(誘誨)라, 잘 달래고, 아이들 귀에 달콤하도록 가르치는 그게 유회(誘誨)이지요. 달랠 유(誘)자 가르칠 회(誨)자, 달래서 가르치는 거지요.
선주비구는 그러한 분이다 하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듣기 싫도록 우격다짐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거지요.
저절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도록 가르쳐 달라는 것이지요. 선능유회(善能誘誨)란 게 그런 뜻이지요.
그런데 제자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선주비구 당신은 그런 분이라고 이미 소문이 나 있다 이거지요. 교육을 잘 시키는 분이라고 하니
유원자애(唯願慈哀)하사, 오직 원하옵나니 자비한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그러한 마음을 내어 가지고서
위아선설(爲我宣說)하소서, 나를 위해서 좀 잘 설명해 주십시오.
다른 데 하고는 달리 여기서는 또 반복해서 묻습니다. 앞에 그렇게 열 가지를 열거했고, 여기서 또 다른 방향으로 묻습니다. 질문이 하나씩 하나씩 이어져 나가요.
보살(菩薩)이, 보살도를 닦는 보살로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운하불사견불(云何不捨見佛)하야,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친견하는 일, 그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불사견불(不捨見佛), 부처님을 친견하는 일을 버리지 아니 해서
상어기소(常於其所)에, 항상 부처님의 처소에서
정근수습(精勤修習)이며, 우리가 부처님 앞에서 부지런히 기도드리는 것을 정근(精勤)한다고 그러지요. 정진(精進)이란 말도 있고, 부지런할 근(勤)자를 써서 정근한다, 라고도 하고 그래요.
부처님께 절을 한다든지 염불을 왼다든지, 부처님 앞에서 하는 온갖 수행법을 정근이라고 하지요. 정근을 수습하며,
또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보살(云何不捨菩薩)하야, 어떻게 하면 보살로서 보살을 버리지 아니하고
여제보살(與諸菩薩)로, 다른 보살로 더불어
동일선근(同一善根)이며, 선근을 동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함께 하는 것이지요. 보살은 보살과 더불어 함께 수행하는 것, 이게 중요하지요. 그래서 보살이 어떻게 하면 보살을 버리지 아니 하고 다른 보살로 더불어 좋은 일, 착한 일 그런 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불법(云何不捨佛法)하야, 보살이 불법을 버리지 아니해서, 늘 지닌다는 말이지요. 항상 불법 속에 있어서
실이지혜(悉以智慧)로, 모두가 지혜로서
이득명증(而得明證)이며, 명증(明證), 밝게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명증이라는 것은 밝게 깨닫는 것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 삶에 대한 밝은 깨달음, 이게 목표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성불(成佛)이니 견성(見性)이니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습니다만 삶에 대한 투철한 깨달음을 명증(明證)이라 말할 수 있어요.
사람 사는 일은 무엇인가? 불법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깊게 투철하게 깨닫는 거, 이게 중요합니다.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대원(云何不捨大願)하야, 보살로서 어떻게 하면 불사대원(不捨大願), 큰 원을 버리지 아니하고,
능보리이익일체중생(能普利益一切衆生)이며, 능히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느냐.
보현행원품이란 게 뒤에 나오지만은 불교는 결국은 이 대원(大願), 큰 원력이 중요합니다, 큰 원력이란 무엇이지요?
물론 자기 발전을 위한 원(願)도 원입니다. 부족한 것을 배우고, 예를 들어서 글씨를 쓰고 싶다면 글씨를 배우고, 자기의 인생 문제에 대해서, 가정 문제에 대해서, 또는 자녀 문제에 대해서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나가겠다고 하는 것도 원(願)은 원이에요.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행복과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 여기는 보면 이익일체중생(利益一切衆生)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많은 사람들을 이익하게 하는 그것이 원(願)이 되어야 사실은 보살의 원이라 할 수 있어요.
그 원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그런 소박한 소원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 큰 원을 버리지 아니해서 능히 널리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할 것이며
또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중생행(云何不捨衆生行)하야, 어떻게 하면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아니해서
주일체겁(住一切劫)호대, 일체 겁에 머물되
심무피렴(心無疲厭)이며, 마음에 피로함이나 싫증냄이 없으며,
이것은 참 좋은 말이에요. 보살들은 저 못난 중생들의 어떤 삶을 그대로 같이 더불어 살 줄 아는 그 자세,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 얼른 생각하면 보살은 보살의 행을 해야지 왜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않느냐 싶지만, 보살은 우정 중생과 같이 더불어 동상(同牀)하는 것이지요. 일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중생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거두어들이고 제도한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살이 어떻게 하면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아니해서, 아주 어려운 말이지요.
아이들 하고 같이 놀아주려면 아이들하고 같이 행동해야지요. 아이들의 행동을 버리지 아니해야 되는 거지요.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자면 같이 ‘가위 바위 보’를 해야지요. 아이들의 행이지요. 중생을 건지려면 마찬가지로 중생행을 버리지 아니해야 된다고요. ‘아, 이건 중생들이 하는 거야, 보살이 하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해 버리면 그건 보살이 아니지요.
중생에게 가서는 중생행(衆生行)을 같이 하는 것, 그래서 불사중생행(不捨衆生行)하야 주일체겁(住一切劫)호대, 그것도 한 두 번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자식에게 끝없이 끝없이 마음을 베풀듯이 그래도 싫증을 내거나 피곤해 하지 않듯이 언제까지나 중생과 더불어 살되
심무피렴(心無疲厭)이라, 마음이 피로해 하거나 싫증내지 아니하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불찰(云何不捨佛刹)하야, 어떻게 하면 이 부처님의 세계를 버리지 아니해서
보능엄정일체세계(普能嚴淨一切世界)며, 일체세계를 널리 장엄하고 청정하게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세계를 늘 마음에 그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모든 세계를 부처님의 세계처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하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불력(云何不捨佛力)하야, 또 보살이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힘을 버리지 아니해서
실능지견여래자재(悉能知見如來自在)며, 여래의 자재함을, 여래께서 자유자재한 그 속을 능히 잘 알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유위(云何不捨有爲)호대 역부부주(亦復不住)하야 보어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中)에 유여변화(猶如變化)하야 시수생사(示受生死)하야 수보살행(修菩薩行)이며,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대개 불교를 좀 공부하고 수행한다 하면은 세속의 허망한 것은 우리가 등한히 하기가 일쑤예요. 그런데 진정 제대로 된 보살은 허망한 세상사를 버리지 않는 거예요.
어떤 세속적인 것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세속적인 격식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많은데, 여기 보면 불사유위(不捨有爲)라, 유위라고 하는 것은 함이 있는 것, 허망한 세간사를 말해요. 허망한 세간사를 버리지 않는다 이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앉아 머물러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역부부주(亦復不住)야, 버리지도 아니 하면서 거기에 눌러 앉아 있지도 않아요. 머물지도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세속적인 그런 일에 충실하다고 해서 꼭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할 것은 충실히 하는 것, 이게 이제 제대로 소견이 드러난 사람의 삶이예요. 보살의 삶이지요.
그래서 불사유위(云何不捨有爲)호대, 유위를 버리지 아니하되
역부부주(亦復不住), 또한 다시 머물러 있지도 아니 해서, 이 허망한 세상사에 머물러 있지도 아니해서,
보어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中)에, 유취(有趣)중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갈래의 삶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김씨는 김씨대로, 박씨는 박씨대로, 앞집은 앞집대로 뒷집은 뒷집대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 수백만 가호, 수천만 가호가 있다손 치더라도 집집마다 사는 형편이 다 다르지요. 참 기가 막히지요. 같은 형제, 같은 마을,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지역에 살고, 거의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있으니 집집마다 사는 것이 거의 같을 것 같지요. 들여다보면 전혀 달라요, 판이하게 달라요.
음식맛도 판이하고 생활습관도 판이하고 가치기준도 판이합니다. 다른 것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너무 다르다고요.
다른 것을 우리가 또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사람 사람이 각각 사는 길, 그 사는 다른 길 가운데서
유여변화(猶如變化)하야, 마치 변화하는 것, 말하자면 허망한 것. 그게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살다가 저렇게 살다가 그러지요. 경제가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지요. 또 사람이라는 게 묘해 가지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처한 대로 또 다 살 줄 알아요.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각각 같지 않을 수 있는 거지요. 변화가 그 점이지요.
마치 변화와 같아서
시수생사(示受生死)하야, 생사 받음을 보인다, 생사 받는 것을 보인다, 생사는 허망한 것이고, 유위이고, 일체 삶의 모습이고, 태어나고 죽는 그러한 길인데 그런 것을 보살이 다 보여요. 그리고 자기가 또 그런 삶을 경험을 해요.
수생사(示受生死)라고 하는 말은 생사를 받는다는 거지요. 생사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생사를 경험하는 것을 보여서 수보살행(修菩薩行)이며, 보살행을 닦으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하야, 보살이 또 법문 듣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며, 이게 중요한 거지요.
법문 듣는 것을 수월히 생각하면 견문이 짧아져서 말이나 모든 게 꼭 필요한 자리에 제대로 쓰여 지질 않아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지라도 들어놓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되살아 날 때가 있다는 거지요. 묘해요, 그게 참. 꼭 되살아 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제8아뢰야식, 장식(藏識)속에 갈무리가 다 되어 있어요. 갈무리가 되어 있다가 그게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고요. 이런 데서 들을 때는 모른척하고 그렇게 다 까먹은 듯이 듣지마는 나중에 살다보면 문득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씩 툭툭 튀어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래요.
친구들 사이에서나 어떤 경우에 그런 상황이 생기는 거지요. 그게 제8아뢰야식, 우리의 정신세계이지요. 정신세계의 본체를 불교에서는 아뢰야식, 장식(藏識), 제8식 이렇게 교리적으로 말하는데 거기에 갈무리 되어 있어요. 정신세계의 어떤 본고장이지요. 그래서 문득 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하야, 법 듣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여
실능령수제불정교(悉能領受諸佛正敎)며, 영수(領受)는 받아들이는 거지요. 영수한다, 영수증이라고 하듯이 여기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영수한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영수(領受)입니다. 영(領)자는 안다는 뜻이지요. 이해하고 그것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인다. 이것 하나는 우리에게 해당 되네요.
운하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해서 실능령수제불정교(悉能領受諸佛正敎), 법문 듣는 것을 버리지 아니 해서, 늘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다 능히 제불의 바른 가르침을 영수하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지광(云何不捨智光)하야, 보살이 또 어떻게 하면 지혜광명을 버리지 아니하며,
불법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지혜의 광명이 빛나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사지광하야, 지혜 광명을 버리지 아니해서
보입삼세지소행처(普入三世智所行處)니잇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지혜로서 행할 바의 곳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불교공부는 할 때만 한 번 쓰이고 마는 게 아니고 과거에도 쓰이고 현재에도 쓰이고 미래에도 쓰이고 그래야 되는 거지요. 일회적으로 쓰이고 마는 것 같으면 공부할 필요가 없지요. 어떻게든 한 번 때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불교공부를 해 놓으면 세세생생 쓰이는 거예요. 그래서 보입삼세지소행처(普入三世智所行處),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지혜로서 행할 바의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지혜의 삶, 과거 현재 미래의 지혜의 삶에 말하자면 어떤 영향을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보입(普入), 들어갔다는 말은 들어갔으니 영향을 끼치는 거지요. 영향을 행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한 집안을 차고앉으면 그게 입(入)이지요. 한 집안을 차고앉으면 어차피 그 나름대로 행세를 해요. 며느리로서 들어가면 며느리로서 행세하고 일군으로 들어가면 일군으로서 행세하고 그 나름대로 다 행세를 하는 거지요.
말하자면 지혜광명을 버리지 아니 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우리 삶의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널리 들어가서 어떤 지혜로써 행세를 한다 이거에요.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제 물었어요.
이번에는 물음이 아주 장황했지요?
앞에 열 단락, 뒤에 또 긴 이야기로서 열 단락, 이렇게 이제 선재동자가 선주비구에게 장황한 질문을 했습니다.
첫댓글 云何不捨有爲호대(유위를 버리지 아니하되),亦復不住(또한 다시 머물지 아니하니)...은우님,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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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薩이 云何不捨菩薩하야, 與諸菩薩로 同一善根이니까...보살이 어떻게 하면 보살로서 보살을 버리지 아니하고 다른 보살로 더불어 선근을 동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법공양 고맙습니다.._()()()_
온갖 갈래의 삶을 살지만 향을 싼 종이 처럼 향내나는 중단 없는 정진을 발원합니다..은우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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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薩이 云何不捨衆生)하야...보살이 어떻게 하면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아니해서....은우님, 고맙습니다. _()()()_
감사히 봅니다...무자년에도 불법을 적집積集하고 熏習하는 해가 되시기를...()()()
불법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지혜의 광명이 빛나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모색하는 일----불자인 것이 생활에 득이 되도록 살겠습니다.()()()
心無疲厭... 마음에 싫증을 내지 읺으며.... 부처님 따라하기가 싫증이 나지 않으며... 고맙습니다. 은우님 _()()()_
고맙습니다....._()()()_
○자문보살(諮問菩薩):보살행에 대해 물음.=> ▶이미지보살(而未知菩薩)이①운하수행불법(云何修行佛法) ②운하적집불법(云何積集佛法) ③운하비구불법(云何備具佛法) ④운하훈습불법(云何熏習佛法) ⑤운하증장불법(云何增長佛法) ⑥운하총섭불법(云何總攝佛法) ⑦운하구경불법(云何究竟佛法) ⑧운하정치불법(云何淨治佛法) ⑨운하심정불법(云何深淨佛法) ⑩운하통달불법(云何通達佛法)이리잇고, 유원자애(唯願慈哀)하사 위아선설(爲我宣說)하소서! .......
▶①운하불사견불(云何不捨見佛)정근수습(精勤修習) ②운하불사보살(云何不捨菩薩)동일선근(同一善根) ③운하불사불법(云何不捨佛法)이득명증(而得明證) ④운하불사대원(云何不捨大願)능보리이익일체중생(能普利益一切衆生) ⑤운하불사중생행(云何不捨衆生行)주일체겁(住一切劫)심무피렴(心無疲厭) ⑥운하불사불찰(云何不捨佛刹)보능엄정일체세계(普能嚴淨一切世界)
⑦운하불사불력(云何不捨佛力)실능지견여래자재(悉能知見如來自在) ⑧운하불사유위(云何不捨有爲)보어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中)유여변화(猶如變化)시수생사(示受生死)하야 수보살행(修菩薩行) ⑨운하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실능령수제불정교(悉能領受諸佛正敎) ⑩운하불사지광(云何不捨智光)보입삼세지소행처(普入三世智所行處)니잇고 ....
큰스님 늘 한문의 벽을어주시고 걸림없는 지혜의 바다에 들게 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_ 보살님의 정성 가득한 보시에 눈이 더욱 맑아집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_()()()_
감사합니다_()()()_
善能誘誨 唯願慈哀 爲我宣說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보살은 허망한 세상사이지만 등한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렇다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불법을 받아 들이고 버리지 아니하며.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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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捨有爲 亦復不住 세속적인 그런 일에 충실하다고 해서 꼭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할 것은 충실히 하는 것, 이게 이제 제대로 소견이 드러난 사람의 삶이예요. 보살의 삶이지요.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우리 인생도 그와 같아서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과 인연을 자꾸 맺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향기로울 수도 있고 비린내를 풍길 수도 있다_()()()_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지광(云何不捨智光)하야... 보살이 또 어떻게 하면 지혜광명을 버리지 아니하며...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積集佛法---불법은 하루 하루 쌓아가는 것
보살은 大願을 버리지 아니하고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보살은 有爲의 세계를 버리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서 생사 받는 모습을 보이면서 보살행을 닦는다
修行 積集 備具 薰習 增長 總攝 究竟 淨治 深淨 通達 佛法
不捨大願 能普利益一切衆生
不捨有爲 亦復不住 普於一切諸有趣中 猶如變化 示受生死 修菩薩行
不捨衆生行 住一切怯 心無疲厭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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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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