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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9 강
儻有諍者(당유쟁자)어든 兩說(양설)을 和合(화합)하야
但以慈心相向(단이자심상향)이언정
不得惡語로 傷人(부득악어상인)이어다.
若也欺凌同伴(약야기능동반)하야 論說是非(논설시빈)댄
如此出家(여차출가)는 全無利益(전무이익)이니라.
儻有諍者(당유쟁자)어든 兩說(양설)을 和合(화합)이라.
만일 다투는 자가 있거든, 말로 다투는 자다 이 말이지요.
諍자는 말씀 言변에 다툴 爭자했으니까 말로 다투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兩說을 和合하라는 말은 두 사람이 싸우니까 두 사람의 말을 다 화합시켜 가지고 但以慈心으로 相向(단이자심상향)이라. 서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향하게 하라. 그랬거든요. 그 전에 그런 얘기가 있지요?
누군가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상좌 둘이 싸우거든요. 둘이 싸우다가 스님한데 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스님 제가 이만저만 했는데, 쟈가 저를 어쨌습니다.” “그래? 네 말은 다 옳구만은...” 또 저 사람이 와서
“뭣이 어쩌고, 어쩌고, 어쩌고 했는데 쟈가 이랬습니다.”
“음, 네 말도 옳구만은...” 이러니까 제 3자가 있다가“스님 그럼 누가 옳다는 말입니까? 이놈도 옳다 저놈도 옳다 하면 누가 옳다는 말입니까?” “그래 네 말도 옳다.” 다 옳다는 겁니다. 스님한테 일러서 재보려 하다가 김이 다 빠져가지고, 허허 웃고 치워버렸답니다.
兩說, 화합하고 지지고 할 것이 뭐 있습니까?
離四句絶百非(이사구절백비)라. 4구가 떠나고 100가지 그른 것이 다 떠났다 이 말입니다. 시시비비가 다 떠나서
是是非非를 都莫關(시시비비도막관)하니 시시비비를, 옳다니 그르다니 다 관계할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山山水水任自閑(산산수수임자한)이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다 내 뜻에 맡겨가지고 마음이 한가로웠을 때,
莫問西天安養路(막문서천안양로)하라. 서천에 安養의 길이, 편안하고 좋은 길이 어디냐? 극락 가는 길이 어디냐? 물을 필요가 뭐 있느냐?
白雲斷處에 有靑山(백운단처유청산)이라. 백운이 끊어진 곳에 바로 청산이 나타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하나가 시비심이 끊어지지 않으면, 시비는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고, 그 시비라는 것이 바로 중생심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 도 닦는 사람은 모든 이해를 떠났기 때문에, 명리와 이해를 떠났기 때문에 애당초 “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합장하고 “성불 하십시오.” 하면 시비가 있을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또 시시비비 꺼리가 있다하더라도 한 생각 참고 기다리노라면, 다 거기에 편안한 경계가 돌아온다 이겁니다. 여기에 화합의 법문이라는 것이 있어요. 부처님께서 고삼리라고 하는 나라에 계셨는데, 그 고삼리 비구들이 서로 시비가 생겼어요. 어떤 비구가 자기는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여러 사람들은 “너는 계를 범했으니 법대로 처벌을 받아야한다고 참회를 하라.”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참회 못 하겠다. 그것이 무슨 법을 어긴 것인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어허 잘못 했다면 잘못한 줄 알지 네가 뭘 그리 빡빡 우기는가?”그래가지고는 여러 대중한테 쫓겨났거든요. 시비를 당해가지고 쫓겨났어요. 쫓겨났는데 이비구가 부아가 나가지고 살 수가 있나? 자기 친구들, 자기 패거리들한테 가가지고 자기 억울한 것을 하소연을 했거든요. “내가 이만저만 했는데, 그 사람들이 완력으로 나를 쫓아냈다.” 고,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고, 가보자고 패거리를 지어서 가가지고 패싸움이 되었어요. 내가 옳네, 네가 글네. 내가 옳네, 네가 글네. 막 손가락질을 하고 싸움이 났어요.
그렇게 싸운다는 소리를 듣고 부처님이 ‘이 어리석은 자들이 교단의 평화를 마침내 깨트리는 구나’ 걱정을 하시고 먼저, 쫓아낸 대중들한테 가가지고 하시는 말씀이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다른 비구의 허물을 대하여 가까운 것만을 보고, 미운 생각을 거기다 부과시켜가지고 우선, 밉다. 아주 괘씸하다. 잘못한 그것만가지고 말하지 않고, 밉다는 생각까지 거기다 부과시켜가지고 경솔하게 그 비구를 쫓아내는 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실상 이 비구는 오랫동안 중노릇을 한 이로써 교리에 밝고, 계율에도 자세라며, 도 닦을 마음이 견고한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우리의 할 일이라 하여 어떤 경우에서나 비구를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쫓아낸 비구들한테 훈계를 하고, 그 다음에 쫓겨난 비구한테 가서 하시는 말씀이,
비구들이여, 너희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스스로가 반성하지 못하고, 나는 죄가 없다. 개과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어떤 비구가 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 비구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비구들은 죄라고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 만일 그 비구가 상대편 비구들을 볼 적에 이 스님은 실상 오랫동안 중노릇을 한 이들이라 교리에 밝고 계율에도 자세하고, 도 닦을 마음이 견고한 이들로서 자기 하나의 일로 욕심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겁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만 내가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저 비구들은 나를 쫓아내는 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때문에 교단에 불화가 일어나고 싸움이 생기게 된다고 생각하고 대중의 화합이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다른 이들이 부처님 법에 대한 신앙을 위해서라도 그 죄를 인정하여 대중의 羯磨(갈마)에 순종하여야한다. 그러니까 사정 봐서 인정해 주라 이겁니다. 내가 조금 잘못 한 그것 고집 세우지 말고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면 끝나는 것인데, 뭘 그것을 기어이 고집을 세우느냐 이겁니다.
양쪽에 가서 그렇게 말을 했는데, 아니 뭐 당최 그것이 끝이 안 납니다. “부처님은 법왕이시니까 가만히 계시이소. 싸움은 우리끼리 할 모양이니까, 부처님하고 싸우자는 것은 아니니까 가만히 계시이소.”하고 막 싸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해볼 재주가 없거든요. 아니다. 그런 소리를 하지마라. 싸워서는 안 된다.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물과 젖이 합하는 듯이, 물과 젖은 합해지잖아요.
물과 기름은 안 합해지지만, 물과 젖이 합하는 듯이 불법에 이익을 더하여 안락하게 지내야한다. 이렇게 아무리 타일러도 놈들은 끝내 싸움을 그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에이 이 천하 고약한 놈들, 이 미련한 놈들. 어리석은 놈들. 이유야 어쨌든 相見(상견)에 딱~ 曲直(곡직) 되어 있기 때문에, 상에 곡직 되어 있는 중생들은 어떻게 해 볼 재주가 없구나. 부처님이 아무 말도 아니하고, 시비 하지 말아라 하라 더 해봐야 소용도 없으니까요. 그만 자기가 떴어요.
신도들한테도 말도 아니하고 슬~ 떠나버렸어요. 기원정사를 거쳐서 아뇩달지를 거쳐서 떡~~ 마갈타 국에 가서 계셨다는 말도 있어요.
시식문에 볼 것 같으면 摩竭掩關之時節(마갈엄관지시절). 그런 것이 있잖아요. 마갈타 국에서 문을 막고 계시던 시절 하는데... 석 달 동안 문을 탁 닫고 사람을 안 만났어요. 아 이러니까 신도들이 와 보니까 부처님이 안 계시거든요. “아 부처님이 어디 가셨노?”
“비구들이 시비를 하니까 떠났답니다.”그러니까
“에~ 이, 이놈의 비구들이 공부는 아니 하고 먹고서는 시비나 하고 자꾸 싸우기나 하니까, 부처님이 우리에게 말도 아니하고 떠났다고, 내일 부터는 저 비구들하고 우리가 말도 하지 말고, 비구들 법문 듣지도 말고, 비구들한테 밥도 주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자”고 신도들이 결의를 해버렸어요.
밥을 먹어야 싸우지 걸식을 못하니까 싸울 수가 있나요? 비구들이,
“배고파서 안 되겠다. 부처님한테 가자. 거기 가가지고 좀 얻어먹고 부처님 앞에 가서 시비를 결정을 짓자.” 하고 부처님한테 찾아 왔어요. 그 때에 목련ㆍ사리불ㆍ가섭존자ㆍ부루나존자. 10대 제자. 아주 큰 대 장로 비구니들이 쭉~ 하니 와서 비구들이 전부 다 사제들이고 조카들이고 그렇거든요. “이 놈의 손들, 너희가 공부는 아니 하고 자꾸 시비를 해가지고 부처님이 피난 오시지 아니했나? 고얀 놈들.” 그래가지고 큰비구들이 부처님 앞에 청해서 “어쨌든지 간에 용서하시고 부처님 나오십시오.”그래 부처님이 나오셔서 시시비비, 시비를 하는 것은 18가지 법을 제자리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18가지라고 하는 것은
법인 것ㆍ법 아닌 것.
계율인 것ㆍ계율 아닌 것.
범한 것ㆍ범하지 아니한 것.
경한 것ㆍ중한 것.
여지가 있는 것ㆍ여지가 없는 것.
추악한 것ㆍ깨끗한 것.
행할 것ㆍ행하지 아니할 것.
제어 할 것ㆍ제어 하지 아니할 것.
말할 것ㆍ말하지 아니할 것. ←이것이 18가지 법입니다. 이런 것을 제자리에 두지 아니했기 때문에 시비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구들은 각 성 받이가 각처에서 모였다 이겁니다. 각 성 받이가 각 곳에서 다 모였다 이겁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8도가 각각 개성이 조금 다르잖아요.
경상도는 石田耕牛(석전경우)라. 돌밭 가는 소라는 말입니다. 어쨌든지 시끄럽거든요. 돌밭 가는 소니까 왈그락 찌그락 싸울 적에 보면 한 놈 죽이는 것 같거든요. 그렇게 싸워도 다 싸우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없고요. 전라도는 春風細柳(춘풍세류)라.
황해도는 泥田鬪狗(이전투구)라. 진흙 밭에 싸우는 개라는 말입니다. 진흙 밭에서 뒹굴면서 싸우는 개라는 말입니다.
충청도는 空山明月(공산명월)이고요.
강원도는 巖下老佛(암하노불)이고요.
경기도는 鏡中美人(경중미인)이고요. 각각 있거든요.
평안도는 猛虎出林(맹호출림)이고요. 맹호가 숲 속에서 “왁~” 하고 나오는 것 같다 이 말입니다. 함경도 사람은 싸우려고 하면 한 3년 싸운다고 하대요. “밥 먹고 싸움세.” 하고 들어가 가지고 밥 먹고 한 숨 자고,
“밥 먹었는가? 또 해보세.” 또 싸우고,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또 싸움세” 하고 내일 또 싸우고, 며칠 씩 싸운다고 합니다.
성질이 그렇게 각각 다른 것이 산세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어요.
이러니까 각 성 받이가 각 처소에서 왔는데 똑 같을 수 있느냐 이겁니다. 소견이 다 같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이러니까
不可長見(불가장견)하고 不可斷見(불가단견)하라. 길게 보지 말고 짧게 보지 말어라.
怨無大小이 不得可報(원무대소부득가보)니라. 원수는 큰 거나 적은 거나 말 할 수 없이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어라. 앙갚음 하려는 생각 하지 말어라.
以怨報怨은 從不可得(이원보원종불가득)이니, 원수는 원수로서 갚는 것은 마침내 가히 갚을 수가 없는 것이니, 원수가 갚아 지는 것이 아니니,
以無怨이라야 乃爲解決(이무원내위해결)이니라. 원수가 없음으로써 해결을 보게 되는 것이니라. 번역을 그렇게 했지요.
오래도 보지 말라 얼른도 보지 말라.
원수는 크고 적고 앙갚음 하지 말라. 원한은 증오로서 가셔지지 않나니, 오직 갚음 없음으로 원한은 사라진다. 오래도 보지 말라는 말은 누구나 원한을 오래 계속시키지 말라는 말이요, 얼른도 보지 말라는 말은 친구들의 우정을 성급하게 깨뜨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원수는 앙갚음을 하면 더욱 커지고 상속되어, 그칠 새가 없는 것이니, 오직 잘 참고 쉬고 착한 사랑에 의해서만 풀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씀들은 참 좋은 말씀이지요.
비구들이여, 너희는 이 잘 말해진 여래의 계율 가운데서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또한 부드러운 사랑에 의하여 명랑하게 화합하여야 하느니라. 이렇게 부처님이 참 좋은 말씀을 항상 하시는데도,
“마, 부처님은 가만히 계시이소마. 싸움은 우리끼리 할 모양이니까... 정말로 싸움하자는 것이 아니니까 가만히 계시이소.”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떠나신 겁니다. 이렇게 같지 아니 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화합을 해야 된다.
첫째는 身ㆍ口ㆍ意(신구의). 몸과 말과 생각을 서로 화합시켜야 되는 것이 뭐냐?
身和同住(신화동주)하고, 몸이 화합해서 같이 한 곳에서 모여살고, 그러니까 떨어져서 살면 異心(이심)이 있을 수 있지만 같이 살면 또 괜찮고요.
口和無諍(구화무쟁)이라. 입이 서로 화합해가지고 자비스러운 말을 慈心相向(자심상향)이거든요.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 상향하다보면, 서로 존경하고 존댓말을 쓰고 그러면 다툴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意和無異(의화무이)라. 뜻이 또 화합해가지고 서로 남의 뜻을 존중하면 어김이 없다 이 말입니다.
戒和同遵(계화동준)하고, 부처님의 계법을 서로 화합하게 해서 같이 준수하고,
見和同解(견화동해)하고, 소견을 똑 같이 맞추어 가지고, 같이 이해를 하고,
利和同均(이화동균)이라. 이익이 있으면 같이 화합해서 동등하게, 똑 같이 분배해서 똑 같이 나눠 먹으라 이 말입니다.
이래서 이 6화합 법문을, 옛날에 중국에서 6국이 서로 싸울 때, 오나라 월나라가 싸웠잖아요. 吳越의 同舟(오월동주)라고 전당 강변에서 싸우는데, 중국 항주에 가면 六和塔(육화탑)이라는 탑이 있어요. 6층으로 된 좋은 탑이 있는데 그것이 6화합을 위해가지고, 오나라 월나라가 전쟁하지 말라고 스님들이 탑을 세웠거든요. 6화 법문을 항상 했는데, 지금도 그 탑이 있어요. 전당 강 이라는 그 강가에 그 탑이 좋더구만요. 그 강이 1500년인가 운하를 파서 만들어졌다고 그래요. 그것도 불가사의에 든다고 중국 사람들은 그래요. 그런데 지금 공산주의를 오래 해 놓으니까 6화가 뭔지를 몰라요. 그래서 제가 안내자 보고 6화가 무엇인지 아느냐 하니까 “알지요.”뭐냐고 물으니까,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상방 하방” 이렇게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身ㆍ口ㆍ意ㆍ戒ㆍ見ㆍ利(신구의계견이). 몸으로 화합하고, 입으로 화합하고, 생각으로 화합하고. 부처님의 계법으로 화합하고 소견이 화합하고 이익이 서로 같이 고루 화합하는 이것이 6화합이라고, 그래서 육화탑 이라고 한다. 너는 많이 먹고 나는 적게 먹으니까, 네 먹는 것을 내가 뺏어 먹어야 되겠다고 싸우면 전쟁이 생기는 것이고, 소견이 각각 다르다 이 말입니다. 나는 긴 것을 좋아한다 하면 저 사람은 짧은 것을 좋아한다 하든가? 서로 소견이 다르니까 그래 가지고서는 싸우게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 계법대로 시행을 하지 않으니까 싸우게 된다 이 말입니다. 기준이 없으니까요. 6화합 얘기를 한참 설명해 줬더니 좋다 하면서 헤이 참, 내가 오늘 안내해 주다가 좋은 것 배웠다면서... 그래서 제가 여기서 불교사전 한권 보내줬지요. 공부 좀 해가면서 하라고...
이런 6화합을 위해서는 서로 四攝法(사섭법)을 행하고,
四聖言(사성언) 을 행하고, 五不答(5부답)을 시행해라. 이랬거든요. 사섭법을 행하라는 말은 보시하고 애어하고, 보시를 하고 사랑하는 말을 항상 쓰고, 이행. 남에게 이로운 행을 하며 무슨 일이든지 같이 거들어서 하라 이 말입니다.
布施攝(보시섭)ㆍ愛語攝(애어섭)ㆍ利行攝(이행섭)ㆍ同事攝(동사섭). 일을 같이 하는 것, 그 사람 하는 일을 따라한다 이 말이지요.
이런 사섭법을 행하라. 愛語라고 하는 말 가운데 五德(5덕)이 다 들어가잖아요. 溫ㆍ良ㆍ恭ㆍ謙ㆍ讓(온양공겸양). ←7강. 따뜻한 말.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기로다.” 안했나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그것이 애어거든요.
四聖言이라고 할 적에는 見ㆍ聞ㆍ覺ㆍ知(견문각지)에 보지 아니한 것은 못 봤다고 말하고, 듣지 못한 것은 듣지 못 봤다고 말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것이 四聖言입니다. 아주 거룩한 말씀이다 이 말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지껄이는 통에 시시비비가 생기거든요.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깨달은 척하고 자기가 아는 척 하는 것. 듣지도 못한 것을 갖다가 들은 것 같이 지껄인다든가, 보지도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지껄인다든가, 여기에서 모두 가짜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이 質直語(질직어)요, 柔軟語(유연어)라. 質直語라는 것은 그 바탕이 고르다 이 말입니다. 바르다 이 말입니다. 바른 말이라 이 말이지요. 柔軟語. 부드럽고 부드러운 말.
이런 것을 항상 써 버릇 하도록 하라. 그래도 만일 외도나 미신자들. 믿지 않는 자들이 뭘 질문해 올 때, 까딱하면 그런 사람들하고 시시비비할 필요가 없거든요.
질문해 올 때 五不答 법이 있다고 그랬어요. 다섯 가지 대답하지 않는 법이 있다고 그랬어요. 누가 뭐라고 묻는데도 말입니다.
試故問(시고문)이라. 시험해 보려고 짐짓 묻는 것은 대답하지 말라.
無疑故問(무의고문). 의심도 없으면서, 뭘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알면서도 의심도 없으면서 짐짓 묻는 것은 대답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不爲悔所犯故問(불위회소범고문). 뉘우치지 않기 위해서, 범한 바를 뉘우치지 않기 위해서 짐짓 묻는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하면 자기가 잘못해 놓고, 뻔히 잘못한줄 알면서도 “아이?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묻거든요. 그런 것은 대답도 하지 말어라 이 말입니다.
不受吾故問(불수오고문). 도무지 내 말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없으면서 짐짓 묻는 것. 물으려면 무릎 꿇고서 모르는 것 물어서 자기가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있으면서 하면 좋은데, 남이 말할 적에는 그것 반대하려는 말만 생각하고 옳게 듣지도 아니 하면서 묻거든요. 그런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말고,
詰難故問(힐난고문). 남 애먹이기 위해서, 그야말로 힐난하기 위해서 비방하고 힐난하기 위해서 묻는 것. 이것도 대답하지 말고요. 이렇게 五不答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대중 가운데서 시비가 있을 때는 일곱 가지로서 그 시비를 해결 지으라고 부처님이 율장에 그랬거든요. 제일 첫째는 어떤 시비가 있을 적에는 現前毘尼(현전비니)라는 것이 있어요. 앞에 나타나라 이 말입니다. 본인 없는데서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양쪽 사람을 다, 그러니까 한쪽 말만 듣고 송사하지 말고, 양쪽 얘기를 다 들어보고, 또 참고인들까지, 온 집안에 있는 사람까지 다 모아놓고, 그것이 우리 절 집안의 대중공사라는 것이 그 것입니다. 앞에 나타나게 해가지고, 안 보는데서 하지 말고 다 보는데서 떡~ 하니 現前시켜가지고 서로 얘기를 해보라 이 겁니다.
그 다음에 憶念毘尼(억념비니). 그런 일이 있나 없나 잘 생각해 보라 이겁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도 깜빡 잊어버리는 수도 있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제 생각이 살살 나네.’ 이럴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憶念毘尼. 생각을 시켜가지고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잘못 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요. 또
自言治毘尼(자언치비니). 억지로 하지 말고, 지가 자백하도록 하라 이겁니다. 지금 형법 쪽에서도 꼭 본인이 인정 안 하면 안 되잖아요.
본인이 꼭 인정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증거를 대가지고 “이런데도 네가 아니 했다고 할래?” 그러면 할 수없이 지가 자백하게 되거든요.
그 다음에는 좀 정신이상자가 있거든요. 정신이상자는 지금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법당에 불 지르는 놈들이 있거든요. 불 지르는 놈을 잡았다 이겁니다. 잡았는데 기독교인들이 막 돈을 쓰고 어쩌고 해가지고 “정신이상자다.” 정신이상자라고 해가지고 빼내버리고 말아버리는 그런 일이 지금도 숱해요. 그런데 진짜 정신이상자에 있어서는 정신이상이 있을 때에 잘못된 것. 정신이상이 돌아 왔는데, 그 때 것을 가지고 자꾸 사람을 애먹이는 그런 짓은 하지 말어라. 그런 것도 있고요. 또
아주 당최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지고 해가지고 지가 어쨌다. 안 잘못 했다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증거를 딱 대가지고 꼼짝 못하게 콕 찍어서 “이래도 네가 아니냐?” 그러면 할 수 없거든요. 죄초소비니라는 것이 증거 제시입니다.
多人語毘尼(다인어비니). 다수가결이지요. 여러 사람의 말에 의지해서 결정짓는 법이 있고요. 시시비비가 너무 오래 돼가지고 분별할 수가 없거든요.
草覆地滅定毘尼(초부지멸정비니). 풀로 땅을 확 덮어버리듯이 덮어가지고 다시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말자. 아이들이 송곳을 가지고 땅 찍어가지고 땅 뺏기 하거든요. 네 것이다 내 것이다 시시비비하는데 나중에는 서로 엉켜서 네 땅인지 내 땅인지 모르겠거든요. 풀로 덮어버리고 치워버리고 새로 하자. 草覆地滅定毘尼라. 풀로 땅을 덮듯이 해가지고 다툼을 없애라 이랬거든요. 부처님도 이와 같이 7가지의 비법을... 이것이 현대의 6법 전서하고 비슷비슷한 겁니다. 율장에 이런 것이 다 있어요. 시비 가운데서 시비 없는 자. 원망 속에서도 원망이 없는 사람. 이것이 진짜 도 닦는 사람입니다.
부설거사 같은 이는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주장자를 짚고 하시는 말씀이, 目無所見하니 無分別(목무소견무문별)이요. 눈으로 보되 보는바가 따로 없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오직 마음 한 생각 딱~ 화두를 챙기니까 분별할 것이 없고,
耳聽無聲하니 絶是非(이청무성절시비)라. 귀로 듣되 듣는 바가 없으니 모든 시비가 다 끊어졌다.
分別是非를 都放下(분별시비도방하)하고, 분별과 시비를 다 놔버리고,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니라. 다만 마음부처를 봐서 스스로 떡~~ 귀의할 뿐이니라. 이랬거든요. 이것이 진짜 도 닦는 사람의 자세더라 이 말입니다.
但以慈心相向(단이자심상향)이언정, 자비심으로 향하게 할지언정
不得惡語로 傷人(부득악어상인)이어다. 慈悲心(자비심)이라고 하면 뭐냐 할 것 같으면, 자와 비가 조금 차이가 있거든요.
慈라고 하는 것은, 慈는 汝樂(여락)이라.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慈입니다. 悲는 拔苦(비발고)라. 남의 괴로움을 건져 주는 것이 悲입니다.
慈는 汝樂하고, 悲는 拔苦라. 자는 능히 락을 주고, 비는 능히 괴로움을 뽑아준다. 자비심으로서 서로 향하게 할지언정 不得惡語로 語傷人이어다.
악한 말로써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제가 그전에 제주도에 갔는데 보살들만 둘이 있는 절이었습니다.
도견스님하고 하룻밤 묵었는데, 아침밥을 해놓고 보살들 둘이 싸움이 났어요.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시비가 나 가지고, 밥 해놓고선 막 둘이 싸우고 소리를 지르고, 우리는 객으로 가 가지고 밥만 얻어먹으면 떠날 판인데 둘이 싸우느라고 밥을 줘야지요. 그냥 갈까 말까 하다가 에이 그래 안 되겠다 싶어서 살~ 가서 들어보니까 보살 하나는 억세게 생겼고, 하나는 조금 보드랍게 생겼어요. 경우는 둘이 다 비슷비슷하고요. 억센 보살은 제 말 안 들을 것 같고, 좀 보드라운 보살은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서,
“보살님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건데 보살님은 잘 하는 것 같지만, 시시비비, 서로 시비 하는 그것은 다 잘못이요. 보살님은마 이보살님한테 내가 잘못 했소 하고 말 한 마디만 하시오.” 그러니까
“내사 잘못한 거 하나도 없지만 시님이 잘못했다 하라 하니까 할 수 없다 그럼, 내가 잘못했다 그만 두자 그마.” 그만 두자 하는데 별거 있나요?
그래서 밥을 먹는데, 한참 밥 먹다가 억센 보살이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좀 너무 했거든요. 나이도 한두 살 적어 보였어요. “성님,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했소.” 둘이 화합시키고 밥 잘 얻어먹고 우리가 떠났거든요.
한 마디, 내가 잘못했다 하면 일 끝나는 건데 서로 고집을 세우고 아만을 내세우느라고 시시비비가 끝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뜻 아니게 악한 말도 하게 되고, 악한 말을 하게 되면 감정이 생기게 되고, 감정이 감정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는 자꾸 더 그만 사람 속을 상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옛날에 한 늙은 비구가 아라한과를 증득 했는데 늙으니까 이도 다 빠져서 웅얼웅얼 웅얼웅얼 경을 읽고 있었어요. 젊은 비구가 있다가 “앗따, 노장 글 읽는 소리가 꼭 개 짖는 소리 같네.” 이렇게 했어요. 이러니까 늙은 비구가 “봐라, 네가 나를 개 짖는 소리 같다고 했지? 내가 아라한이다. 아라한을 비방한 죄가 작은 줄 아나? 참회해라.” “아이쿠, 아라한이십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참회를 했어요. 그 참회한 공으로 말미암아 지옥 갈 것은 면했다는 겁니다. 지옥 갈 것은 면했으나 아라한을 욕한 과보로 白狗(백구)가 됐대요. 개가 됐대요. 개가 턱 되어가지고 장사꾼들을 따라서 사막을 건너서 페르시아 쪽으로 실크로드로 장사꾼들을 따라서 가는데, 장사꾼들이 고기를 지져 먹고 내일 먹으려고 남겨 놨는데, 밤에 개가 그만 훔쳐 먹어 버렸어요. 훔쳐 먹어 버리니까,
-개고기 먹는 사람은 우리 한국 사람밖에 없어요. 그 쪽에도 개고기는 안 먹어요. 인도ㆍ태국 그쪽에도 개고기는 안 먹어요. 죽은 개는 갖다 묻든지 바다에다 던지든지 하지 개고기는 안 먹어요. 개 잡아 먹는 것은 한국 사람뿐입니다. 보신탕집 하고... 훔쳐 먹어 버리니까 그 이튿 날 장사꾼들이 부아가 되게 나가지고 (굶게 되었으니까 어떻게요.) 한국사람 같으면 개를 잡아먹을 것인데, 개 네 다리를 자르고 구렁창에다 던져 버렸어요.
던져 버리고 가 버린 겁니다. 개가 네 다리가 잘라졌으니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굶어가지고 끙끙 아직 목숨은 끊어지지 않고요.
그 때에 사리불 존자가 지나가다가 떡~ 하니 빈사상태의 그 개를 보고, 자기가 걸식해서 가던 밥을 먹이고 법문을 해줬어요.
네가 惡言一句(악언일구)로, 악한 말 한 마디 해가지고 이와 같은 개 몸을 받았으니 내생에는 어쨌든지 柔軟語(유연어). 質直語(질직어).
質直語라는 것은 바르고 곧은 말이라 이말입니다. 곧은 말만 하고, 부드럽고 화하고 착한 말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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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녹음에서→
곧은 말만 하고 부드럽고 화하고 착한 말만 하고 고운 말만 쓰도록 잘 쓰도록 해라. 그렇게 턱~ 하니 그 개를 위해서 축원을 해주고 여러 가지 법문을 해주고, 밥을 먹이고 돌아갔어요. 개가 그 밥을 먹고서는 마음이 좀 편안해가지고 죽었어요. 죽어서는 3일후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이름이 균제입니다. 다행히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사리불한테 찾아와서 동자가 사리불 상좌가 됐어요. 상좌가 되어서 턱~ 하니 공부를 해서 과를 증득 했거든요. 평생 동안 자기는 비구가 따로 되지 않고, 사리불 존자를 따르는 사미로서 스님을 시봉했다는 경에 그런 대목이 있어요. 경에 그런 말씀이 있어요.
惡言一句가, 악한 말 한 마디가 그와 같은 과보를 받기도 하는데, 악어를 써가지고 사람을 뼈아프게 해서야 되겠느냐?
惡語로 傷人(악어상인)이어다. 惡語로, 악한 말로써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지어다. 兩說(양설)을 和合(화합)하여, 양쪽 말을 화합시켜
但以慈心으로 相向(단이자심상향)이언정. 다만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 향하게 할지언정, 不得惡語로 傷人(부득악어상인)이어다.
악한 말로써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지어다.
若也欺凌同伴(약야기능동반)하야 論說是非(논설시빈)댄,
如此出家(여차출가)는 全無利益(전무이익)이니라.
만약, 也자는 “또한” 그래요. 若也 = 만약 또한 同伴을 속이고서 시비를 논설할 진대는, 如此出家는 全無利益이니라. 시비하는 것은 나는 잘 하고, 너는 잘 못했다 하는 것이 시비 아닙니까? 동반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동업과 별업이 있는데, 同業衆生(동업중생)을 다 동반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한 집안에 살면 다 동반인 것이고요. 같은절에 사는 것도 다 동반인 것이고, 한곳에 살면 다 동반인 것입니다.
同業衆生. 업이 같은 사람은 다 동반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개개인이 다 인격이 있는데, 업신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속이고 해가지고서는 서로 시시비비를 논설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되겠느냐?
如此出家는 全無利益이라. 이와 같은 출가는 온전히 이익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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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但以慈心相向(단이자심상향)이언정,不得惡語(부득악어)로 傷人(상인)이어다.ㅡ다만 자비심으로 향하게 할지언정 악한 말로써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지어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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儻有諍者어든 兩說을 和合하야 但以慈心相向이언정 不得惡語로 傷人이어다. 만일 다투는 자가 있거든 두 사람의 말을 다 화합시켜 가지고 서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향하게 할지언정 악한 말로써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_()()()_
以無怨이라야 乃爲解決이니라...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但以慈心으로 相向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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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兩說和合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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