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 하셨다" (All these things spake Jesus unto the multitude in parables; and without a parable spake He not unto them) - 마태복음 13장 34절 -
제 1 장 예수의 비유해석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들 가운데 약 1/3이 '비유'(譬喩)로 되어 있다. 예수의 교훈과 가르침의 주제가 되는 "하나님 나라"(神國)가 비유의 형식으로 가르쳐 지고 있다. 복음이 뭇 인생들에게 전파되는 방법으로 '비유'라는 문학장르(genre)를 복음서 기자들은 사용했다. 그래서 비유연구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재구성할 수 있다. 최근 일부 신약학자들이 참가하는 소위 ꡐ예수세미나ꡑ에서 1)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고, 후대에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역사상 예수의 말씀에 대해 많은 학자들과 이단사이비에서 공격을 했지만, 복음서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연히 허튼데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모든 신학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본서에서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를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자 한다.
1) 예수세미나는 신약학자 Robert Funk가 73명의 학자와 함께 시작한 모임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원초적인 예수의 말들을 찾아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이 (1) 그가 말씀한 것 (2) 그가 말씀한 것에 가까운 것 (3)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 (4) 그가 말하지 않은 것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색깔을 칠한다. 이들은 대부분 구절을 (4)번으로 구분하고 있다. 제5복음서라고 하는 도마복음서 연구도 활발히 전개한다. 가장 최근에는 1998년 11월에 캐나다 뱅쿠버에서 개최되었다. "이 세미나는 규모도 작거니와 대부분 학적 심사원 노릇을 하면서 연구 내용이 출판된 적도 거의 없으나 세속 언론의 입김 지원을 받고 있다. 캐나다의 사해사본 연구가인 복음주의 학자 크레이그 에반스씨는 세속 언론에 호소해온 예수세미나를 가리켜 '선정적인 대중 학문에 불과하다'며 '그중 영향력이 없는 일부 학자들을 등정하나 주류 파에게 나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예수 세미나는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제학자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며 진지한 학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 에반스 교수는 사해사본이 증거해 주는 메시아에 관한 해석을 통해 예수 세미나의 진보주의적 견해를 공격했다. (크리스천 투데이 신문, 1998년 12월 20일 수요일, 2면)
1절. 비유의 정의와 목적 비유(parable)란 간단히 말해서 하늘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양식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잘 해석해야 한다. 방언을 통변해야 일반인들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도 바르게 해석되어야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천국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첫째 이유부터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어려운 하나님 나라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셨는데, 비유를 들어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바울 사도도 신비 체험을 간증하면서 삼층 천에서 들은 언어가 "말(=인간의 언어)로 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고 실토한다. 밧모섬에 유배되어있던 사도 요한이 천국에 대한 환상을 보고하는데 표현이 모두 " ... 와 같고"라고 함으로써 비유되고 있다 예, 나팔소리 같은 음성, 인자 같은 이, 큰 산과 같고 물소리와 같고 ...... 등). 요한계시록1:13-17에 여덟 번 '같고/같은/같더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회기가 횐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띠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신 표현이 "천국은 마치 ...... 같으니"라고 하시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소재(가정, 나라, 사회, 농사, 목축, 상업, 군사, 문화, 재능, 성격등)를 택하여 천국을 묘사하고 있다. 시편에서 이런 언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업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19:2-4) 했다. 사실 인간의 말과 언어(口音)란 제한적이어서 추상명사 (사랑. 진리, 정의, 아름다움, 멋 등)나 형용사/분사 (미지근한, 울긋불긋, 을씨년스러운, 사뿐히 등) 혹은 시적 언어 (어둔 밤 마음 잠겨,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등)는 번역이 불가능하며, 완벽한 설명이 되지 앓는다. 언어자체도 종족마다, 시대마다, 지방마다, 계층마다 각기 달리 쓰여지며, 의사소통을 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문화권내에도 세대차이가 나서 언어 이해가 다르며, 같은 부부 사이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요소들이 많다. 또 듣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같은 내용이 다양하게 이해되어 진다. 두 번째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누구에게나 공개하지 않고 오직 마음과 귀에 할례 받은 자만이 듣고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자주 ꡒ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ꡓ(Who hath ears to hear, let him hear ! 마11:15, 13:9, 43, 막4:9, 23, 눅15:35)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고 (신 10:16, 렘 4:4, 9:26, 롬2:29) 믿음과 순종과 사랑의 태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 들을 귀를 가질 수 있다. 엘리 제사장이 실로에서 사역하던 시절에 성소에서 사무엘 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삼상 3:1-14). 예배드리던 이사야가 천군 천사의 찬양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사6:1-13). 예수께서 저녁시간 제자들과 '교제를 위한 대화의 시간'(이를 '키두쉬ꡐ 2)라 함)에 낮에 하신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사 6:9-10, 막 4:12-13)고 밝히셨다. 2) 키두쉬(Kiddush)란 유대인 사회에서 랍비와 제자들이 저녁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하는 모임이다. 주께서도 자주 이런 모임을 가지셨는데, 십자가를 지신 유월절 전날에 가진 모임에서 주의 만찬을 제정해 주신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란 뜻이 마지막 키두쉬였다는 말이다.
2절, 비유의 내용 앞으로 살피겠지만 여수의 비유는 복음을 담고 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막1:1)고 시작하고 있다. 세례요한의 사역을 건너뛰면 마가복음 1장 14절로 연결이 되는데,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시더라"(막1:14-15). 이 구절에서 비유의 네 가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1)때에 관한 주제 (종말비유) 2)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 (천국비유) 3)회개에 관련한 비유 4)복음을 믿는 주제를 다룬 비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비유의 중심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이다. 공관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神國)이다. 마태복음서는 히브리인들의 용어인 "하늘나라"(天國)를 쓰고 있다. 마태복음서는 당시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이기에 '하늘'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부 Heavenly Father,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11:25).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전통 (십계명 3계명)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보다는 '주'('Adonay) 라든가 '하늘'(Shamaim)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말이다. 마태복음서에서는 '하늘나라'가 모두 32회 나오며, '하나님 나라'도 4회 나온다. 마가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14회, 누가복음서에서는 32회, 요한복음 3회, 사도행전에서는 6회가 나온다. 요약하면 공관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서는 하나님/하늘나라가 82회 나오는데 비해, 요한복음서에서는 오직 3회 (3:3, 5, 18:36) 나오지만, 15회 정도가 예수를 왕으로 묘사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암송하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성을 말하는 대목의 주제도 하나님나라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불려지고 경배되어지고 영광 돌려져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곳이 하늘나라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직 이뤄지지 않는 곳이 땅이란 말이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인 송영(doxology)에서도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에서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실존적인 용어인 지금-여기(here and now)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상태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생들은 영생과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고로 인생은 불로초(不老草)를 찾으려고 하며, 우주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인간복제(cloning)에 대해 계속 연구를 하고 있다. 예수 당시 제자들은 미래의 '띠'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24;3, 눅17:20). 그럴 때마다 예수의 답변은 미래에 관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우리의 알바가 아니라고(행1:6) 하셨다. 무소부재하시고 무한한 공간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미래의 약속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성서전체에서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제한된 영토나 영역의 뜻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주권 혹은 왕권 통치" (kingly rule or sovereignty of God)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뜻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이뤄지는 상태이다. 예수의 비유는 약 72개로 잡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왕, 아버지, 농부, 목자, 군대장관, 선생, 주인, 남편 등으로 나오면서 하나님의 '신적인 통치'가 주제를 이룬다. 이 배경은 구약성서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는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르치고 있다.3) 공관복음서에서 세례요한과 공생애를 막 시작하신 예수님의 설교가 꼭 같이 하나님 나라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3:2, 4:23, 막 1:15). 3) 존 브라이트, 김철손역. 하나님의 나라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1. 나라의 삼대 구성요소가 영토, 국민, 주권이듯이 하나님 나라도 새로운 땅 (에덴동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쁄라, 메시야 나라 등),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주권으로 살펴보자. 첫째로, 땅과 하나님 나라를 살펴보자. 성서에 나오는 땅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뤄지고 성취되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구약성서에서 이 용어가 20회 나오는데 신앙의 족장들에게 약속한 땅이며 (창12:7, 13:14, 15:7-8, 17:8, 26:2이하, 28:13이하, 35:12등), 구체적으로는 비옥한 헤브론지역을 말한다 (민14:7-8). 바란 광야 가데스-바네아(Kadesh-barnea)에서 모세가 각 지파의 두령(頭領)으로 구성된 12명의 정탐군을 가나안 땅으로 보낼 때, 이들이 헤브론 지역인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 무화과, 석류를 가지고 왔는데, 포도송이 하나가 어찌나 크고 무거웠든지 두 정탐꾼이 메고 왔을 정도였다 (민13:21-24). 족장들의 고향이 헤브론이다 (창 13:18, 14:13, 24, 18:1, 23:2, 25:7-10, 35:27-28, 37:14, 46:1 등). 최초의 족장들인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의 묘가 바로 헤브론에 있다. 그래서 헤브론은 여러모로 보아 이스라엘의 고향 땅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이 가나안 지역에 정착할 때 헤브론 지역은 갈렙이 속한 유다지파에 분배되어진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과 언약(=계약 covenant)을 맺은 선민(選民)이요 성민(聖民)이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이다. 레위기 20:24-26에 보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구별되었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에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다 (마7:21, 요일2:17, 약2:26).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왕권 혹 주권은 영토와 백성의 의미를 넘어선 포괄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권은 영원하며 무궁하고 전능하다 (시 45:6, 145:1-13). 이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진다(사 9:7).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롬 14:17). 절대주권으로서 권능이 있다 (고;4:20).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주권에 절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전 6:9-11, 갈 5:22-25, 히 11:8).
3절, 비유의 해석사 1. 초대교회 시대
1) 이레니우스의 해석방법 ? Lyons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Irenaeus, c. 140 - c. 200, 어릴 때 폴리갑의 순교를 지켜보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서머나 태생일 것임)의 관심은 정경(Canon)의 범위를 확정하는 일과 표준적인 주석을 씀으로써 신앙의 규제와 교회의 규범을 삼으려고 했다.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에 강력하게 대응하여 이단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Against Heresies). 그는 영지주의가 선호한 알레고리(allegory 풍유(諷諭)적 해석을 거부했다. 대신에 유형론(typology)을 해석방법으로 채택하여 구약의 사건과 가르침은 신약에 일어날 사건의 예표가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출 15:27 (민수기 33:9)에 나오는 엘림의 샘물 열 둘은 신약의 12사도를 예표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0-22에 나오는 제2의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해석도 유형론이다.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중심에는 유형론인 해석을 하고 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0:1-16)의 경우, 첫 번째(이른 아침) 부름을 받은 농부는 태초에 부름을 받은 사람, 두 번째(오전 9시) 부름을 받은 농부는 구약시대에 부름을 받은 사람, 세 번째 (정오) 부름을 받은 사람은 예수 당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 네 번째 (오후3시)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레니우스 당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 마지막 (오후 5시)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마지막 때에 부름 받을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포도원은 의로움을 ,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의 영을 그리고 삯으로 지불된 데나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을 각각 나타낸다고 쓰고 있다. 이 비유의 중심은 하나님의 공평한 사랑을 말해준다.4)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7) 비유에서 밭은 성서이고 보화는 그리스도라고 하여 알레고리적인 출석을 한다.5)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성령과 예수와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관찰하기를 사람은 하나의 고발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하나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 사람을 성령에 맡기셨다. 사람이 강도를 만났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연민을 느껴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상을 받아서 우리에게 위탁된 데나리온을 충실히 감당하여 증가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6) 이레니우스는 비유들을 설명하여 기독교 신앙을 위한 호교론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4) Iranaeus, Against Heresies IV, xxxvi. 7. 5) Ibid., IV. xxvi. 1. 6) Ibid., III. xvii.3.
2) 안디옥 학파 (Antiochene school) 소위 '황금의 입'(golden month)이라 불리우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자라면서, 어린 나이에 수도원생활을 했고, 법학과 수사학(당시 명 웅변가인 Libanius의 문하생)을 배웠다. 장성하여 안디옥 교회의 집사 (381-386), 목회자(386-398)를 거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본래 이름은 Byzantium, 현재는 Istanbul)의 감독으로 저 유명한 소피아교회 (St. Sophia Church, 지구상에 남아 있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요 초대교회며 가장 큰 교회, 381년 2차 교회회의를 개최하여 삼위일체 교리 기초를 놓음)를 담임했다 (398-407). 그의 명 설교를 들으려고 매주일 8000명이상 성도들이 교회당을 가득 채웠다. 소피아교회는 설교단과 회중석의 높이 차이가 거의 없으며, 크리소스톰은 예배시 회중석에 함께 앉아 있다가 설교 때만 단에 올라가서 설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로 본문설교 및 강해설교를 하였으며 성경의 한 책을 골라 서론, 강해, 적용(도덕적 훈계 moral exhortations)을 하였다고 한다.7) 그의 비유해석은 역사적-신학적인-문학적인 방법에 근거한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는 심정으로 본문을 철저히 연구하여 영적인 의미를 찾아 목회적인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의 해석방법은 후에 루터와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8) 7) J. P. Migne,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Graeca, xvii-xviii. 8) Donald K. McKim(ed), Historical Handbook of Major Biblical Interpreters,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88, pp. 29-34) 안디옥학파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350-428)는 성서 언어의 역사적 의미를 해명하는데 공헌을 했다. 문법적이고 언어적인 분석을 심각하게 연구하여 본문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데 노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선호한 영성적 알레고리(spiritualizing allegory)해석에 반대하여 성서에 나오는 설화들을 역사로 받아들였다. 영감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해석원리였다. 예수의 비유해석을 보다 유형론(類型論 typology)에 근거하였다. 유형론이란 구약성서가 신약의 사건들을 예시(豫示 prefigure)하기에 유대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비유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By the proper use of typology, one could appreciate both the historicity of the Old Testament passage and its application to the Christian era). 다시 말하면 구약에 나타난 어떤 인물, 사건 또는 사물이 신약과 일치될 수 있다는 해석방법이다. 그는 크리소스톰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한때 같은 수도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길리기아(Cilicia)지방에 있는 몹수에스티아의 감독으로 여생을 마쳤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만든 에베소회의 (the Council of Ephesus, 431년)는 안디옥학파의 최고 원수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이 주도하였다. 여기서 데오도레는 네스토리우스의 영적인 아버지로 정죄를 받았으나 동방기독교에서는 그를 최고의 성서주석가로 인정하며 존경해오고 있다.9)
3) 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ca. 150-215)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의 기초를 놓았다. 대표적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살펴보면 영생을 얻는 전제 조건으로서 두 계명을 율법사가 지적하는데 클레멘트는 두 계명을 분석하여 두 번째 계명을 언급하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10) 오리겐(Origenes)은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도덕적, 정신적 교본을 삼았다.11)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희랍문학에서 유행하던 방법이다.12) 9) Ibid. pp. 65-69. 10) Clement, Who is the Rich Man That Shall Be Saved ? xxix. 11)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 = 아담, 예루살렘 = 낙원, 여리고= 세상, 강도들 = 적대적인 세력 및 대적들(요 10:8). 상처 = 불순종 또는 죄, 제사장 = 율법, 레위 = 선지자, 선한 사마리아인 = 그리스도, 짐승 = 그리스도의 몸, 주막 = 교회, 두 데나리온 = 성부와 성자를 아는 지식, 주막주인 = 교회를 맡은 천사, 선한 사마리아인의 되돌아 옴 = 그리스도의 재림 (Origen, Commentary on Luke 10:30-35, Homily XXXIV). 12) R. P. C. Hanson. Allegory and Event,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PP. 97-129,
2. 중세시대 중세시대는 교부들의 주석을 모아 집대성하는데 주력을 하여 성서 해석의 기준을 교회의 권위로 확립하였다. 세 가지로 정리하면 1) 성서의 무오론(無誤論)이 확립되었다. 이 이론은 이원성적(二元性的) 그리스도론으로 뒷받침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人性(인성)을 지닌 인격이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원죄에서 자유했다. 이처럼 성서도 비록 인간의 손에 의해서 씌어졌으나 영감에 의한 것이므로 무오하다는 것이다. 2) 성서의 이원적 해석을 시도했다. 하나는 문자 내지 문법적인 자의(字意) 대로의 해석이요 (sensus litteralis), 다른 하나는 문자 뒤에 숨은 이른바 영적인 의미(sensus spiritualis)를 찾는 것인데 오리겐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발전시켰다. 영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험할 수 있다. 3) 성서를 교회 또는 윤리 생활의 교본(敎本) 내지 율법의 책으로 성격화했다. 중세시대가 무르익을 때 본문의 4중 의미해석 즉 문자적(littera), 우화적(allegoria), 도덕적(moralis), 그리고 종말적(혹 영적, anagogia)해석이 보편화 되었다.
3. 교회개혁 시대 개혁가들은 철저한 본문중심의 연구를 발전시켜 성서연구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교권에서 자유함을 받아 성서 본래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중세시대의 4중적 해석을 지양하고 문자적인 해석과 영적 해석을 적절한 방법으로 조화시켜 성서를 주해하였다. 이는 초대교회 시절의 안디옥 학파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개혁가들은 신학의 원천인 성서의 원래의 말씀에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했다. 에라스무스(Erasmus)는 (수용원문)(Receptus Textus)의 전통을 이어 받아, 신약 희랍 원본을 정리하여 인쇄 발간하여 (1516년) 성서원문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이듬해인 1517년에 그는 화형 당했고, 같은 해 10월 31일에 당시 카톨릭의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Wartburg성당 앞에 95개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교회개혁을 시작했다. 루터가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1522년에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후에 영어로 번역된 킹 제임스역(KJV, 1611년)은 이런 개혁 성서를 근본으로 삼았다. 스데파누스(Stephanus)는 성서를 널리 읽히기 위해 성서의 장과 절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1551년). 루터는 '성서는 스스로 해석한다'는 전제아래 성서 연구의 학문적인 해석에 초석을 놓았다. 이 전제는 중세교회의 권위와 전통에 매인 해석이 아니라 성서의 자의적(恣意的) 해석을 하겠다는 일종의 독립선언과도 같았다. 루터의 해석방법은 문자적(문법적) 해석방법이나 비유해석에 있어서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자신이 원숭이 장난이라고 혹평한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수용한 것은 비유의 특성 때문이리라. 그는 윤리적인 도전과 도덕적인 명령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비유들을 사용한다, 안식일 준수에 대한 설교에서, 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언급한다. 이 비유는 우선적인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빈곤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이웃을 보았을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처럼 그냥 지나가지 말아야 하며 거기서 죽도록 버려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순수하게 지키려고 가장하기에 사람은 그의 형제를 살인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차라리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를 도와야만 하며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하며 그를 짐승 위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야 한다. 율법과 은혜 그리고 죄와 은혜에 관한 토론에서 루터는 이 비유가 적합하다고 한다. 루터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다른 점은 복음, 오직 믿음, 선행 등을 강조하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비유의 해석보다는 성서자체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칼빈은 비유해석에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배격했다.13) 13) 쉬틀마허, (신약성서 해석학), 95이하, 그랜트, (성서 해석의 역사), 100이하. 그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해석을 발전시켰다. 성서 안의 복음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총을 엄격히 구별했다. 루터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및 계시록을 신약에서 다루지 않았고, 칼빈은 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다. 성서에는 알레고리적인 의미가 없고 성서 안에 있는 비유들은 곧바로 중심적인 주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마치 활을 쏘면 쏜살은 곧바로 과녁을 향해 날아가듯이 말이다. 문자 그대로 직선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1)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주목적은 이웃에 관한 우리의 의무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웃사랑은 친구나 친척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자유의지에 바탕을 두어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바른 해답을 주지 못한다.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마치 장사꾼들이 마음대로 요리해 버려 먹지 못할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혹평한다. 14) 14) J.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Matthew and Luke (2) 열 처녀의 비유. 이 비유는 앞으로 가야 할 믿음의 여행을 위해서 단순히 참음과 준비를 가지고 충실하게 깨어 있는 생활을 가르치고 있다. 충실한 마음이라 마음속에 켜놓은 불빛으로 항상 보충하고 새롭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준비와 인내가 이 비유의 목적이다.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사치와 쾌락으로 방종 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과 비참하게 굶주리는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품을 은유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브라함을 말하게 된 것은 믿음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는 유랑민이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면 그들을 기다리는 축복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서 부자가 눈을 들었다는 것은 상징적 (figurative) 인 뜻을 가진다. 그곳은 영혼의 세계이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손가락이나 눈과 같은 것을 가졌을 리가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묘사하시려고 그림을 보듯이 설명하셨다. 루터와 칼빈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전통에서 벗어나 성서 자체의 뜻을 규명하기 위한 언어적 연구와 내용 추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개혁가들의 영향으로 성서자체에 모든 권위를 돌림으로 성서의 문자주의(Biblicism)를 낳아 이른바 축자영감설의 기초를 마련했고, 다른 면에서는 성서의 역사비판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 15) 15) 보다 자세한 것은 김철손, 박창환, 안병무, 신약성서개론, 서울: 기독교서회, 1972. pp. 15-22를 참고하라 4. 현대 시대 이전까지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현대적 비유해석을 개척한 사람은 율리허(A. J lcher)이다. 그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원래의 예수의 비유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해석방법은 (1) 공관복음서의 비유는 직유(similitude)이지 알레고리가 아니며 그 하나하나는 오직 하나의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만을 가진다 (2) 예수가 이러한 직유를 사용한 이유는 자신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평이하고 실감나도륵 전하려 했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비유 연구는 한 주요 점에 집중하여야 한다.16) 이러한 원리를 기초로 율리허는 각 비유의 주요 점을 일반적인 도덕적 진리를 이러한 방향으로 비유해석을 시도하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도 종교적, 도덕적 교훈으로 해석한다. 16) A. J lcher, Die Gleichnisreden Jesu, vol. 1, Freiburg: Mohr, 1899. pp. 203-322. 브루스(A. B. Bruce)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배격한다.17) 그에 의하면 '비유에서 취재한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정황은 무슨 영적 비유를 표현하기 위한 재료가 아니고 팔레스틴 아무데서도 찾아질 수 있는 평상적인 상황이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나오는 세 개의 숫자(100마리 양, 은전 10개. 두 아들)는 모두 신비적인 의미가 없는 자연적인 숫자라는 것이다. 100마리는 목자 한 사람이 관리하기에 적합한 자연적인 숫자이며, 은전 열 개는 가난한 여인이 보통 가질 수 있는 액수이며, 두 아들은 두 가지 성격을 대조시키기에 도움이 되는 보통의 평범한 가정의 예라는 것이다, 그는 비유를 실생활의 이야기로 읽으면서 거기서 인간적인 정서를 느끼고 그 정서를 통하여 자연세계와 영적 세계의 연관성을 삼으려 했다. 17) A. B. Bruce. The Parabolic Teaching of Christ, New York: A. C. Armstrong and Son, 1908, pp.29, 279. 다드(C. H. Dodd)는 양식사와 연관하여 비유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대해 연구하면서 비유는 1) 예수의 사역의 실제상황 2) 이것들이 문서로 확정되기 전에 선교, 동동집회, 교육시간 등을 통해 예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선교하고, 가르친 초대교회의 정황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함을 지적했다.18) 18)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London: Nisbet, 1952. p.24. 예레미야(J, Jeremias)는 율리허와 다드의 업적을 기초로 '초대교회로부터 예수에게로'라는 구호아래 '예수 자신의 말' (ipsissima vox Jesu)에 도달하려고 추구한다. 특히 그는 (도마복음서)가 보존하고 있는 공관복음서의 비유의 도움을 받아 비유들의 원래의 역사적 자리를 찾고자 한다. 4절, 비유의 종류 비유를 분석해 보면 몇 가지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19) 19) 이상훈, 해석학적 성서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pp. 86-87; 1. 이야기체(narrative) - 본 받아야 할 행위를 과거 시제로 간단히 묘사하는 모범적인 이야기(example Story) 형식이다. 순수한 이야기로 발단, 전개, 절정, 대단원이 있고, 플롯(plot)의 진행이 있다. 참된 이웃 (선한 사마리아), 잃은 양, 포도원의 일꾼, 부자와 나사로, 열 처녀(들러리)의 비유 2. 직유(similitude) - '....와 같다'처럼 현재 시제 동사를 사용하여 기본적으로 다른 대상을 간단하게 비교하는 것이다. 이 형태는 하나님 나라를 일상생활의 일반적 활동에 비교된다. 이에 속하는 비유로는 '겨자씨 비유'(막4:30-32, 마13:31-32),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 (마 13:33). '밭에 감추인 보화' (마13:44) '그물 비유' (마 13:47-48) 등이다. 3. 은유 (metaphor) - 과거시제로 은유적인 의미를 가지고 완결 짓는 형태이다. 엄밀한 의미의 비유(parables proper)인데 대부분의 비유가 여기에 속한다. '돌아온 탕자'(눅 15:11-32), '회개한 아들'(마 21:28-32) 등이다.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대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19-20)는 대로 이제는 천하만민이 복음을 깨닫도록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 천국비유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오늘날 이 비유들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도 염두에 두며 글을 쓰려고 한다. 성서본문은 <개역성경전서>로 하되 중요한 단어나 문구는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으로 확인하며, 영어번역으로는 흠정역(Authorized Version)인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20)을 사용한다. 20) 킹 제임스 성경은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가장 권위 있는 수용사본(TR = Textus Receptus)에 근거한 성경으로 사도 바울의 안디옥 교회가 전해준 '다수 사본' 전통을 따르고 있다. 틴데일, 루터, 칼빈, 웨슬리, 무디, 스펄전 등 모두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했으며, 지금까지 전 세계에 출간된 성경의 90% 이상이 바로 킹 제임스 성경이다. 참고로 천주교는 성경 자체를 변개하여 현대 역본들을 내놓았다. NIV, NASB. Living Bible등이다. (릭 존스 외 다수. 정동수, 박노찬 편역,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서울: 두루마리. 1998. pp. 12-13.) 여기에 실린 글 가운데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미주기독공보에서 1994년 4월 16일부터 1996년 7월 13일까지 연재된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에서 발표된 글들을 수정해서 정리한 것이며, 발표되지 않은 비유는 새롭게 쓴 글이다. 경건의 훈련을 위해 묵상을 위한 질문들, 관련 찬송가, 기도문을 실어 보았다. 가능한 각주를 다는 것은 생략했고 참고자료도 꼭 필요한 것만 실었다. 이 비유해설은 프린스튼한인장로교회 (새벽기도회, 성경공부), 미주기독교방송(KCBN, 방송성경공부)과 미주장로회 신학대학("성서주석과 설교, "성서해석방법론")에서 강의한 내용임을 밝혀 둔다. 제 2 장 비유의 적용 - 경건 훈련을 위한 묵상집 1.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장 2절, 4장 17절) 세례요한의 설교 주인 회개의 이유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2절과 4장 17절은 각각 세례요한과 예수의 설교를 요약하고 있는데, 순서도 틀리지 않고 꼭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하늘나라 대신에 하나님 나라로 되어 있고, 두 마디가 첨가되어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ye, and believe the gospel)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내용이 없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곁에 있다"란 뜻으로 회개의 필연성을 말하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라"로 되어있다. 회개의 당연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회개하라(metanoia, 히브리어는 shuv)는 의미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수용한다는 말이다. 인생의 관심을 '천국'으로 돌리라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회개이다. 또한 최 우선권을 천국에 두라는 말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동사 '가까왔느니라' (engiken 앵-기켄, 3인칭 단수 현재 완료형)는 이미 시작됨을 말한다 (새번역: '가까이 왔다', 공동번역: '다가왔다', 표준새번역: '가까이 왔다', 개역개정론: '가까이 왔느니라'). 영원자가 시간세계에 오신 시점부터 이미 천국은 이 땅에 실현되었다 (...... is at hand). "천국이 도래했느니라"로 번역함이 좋을 것 같다. 메시야 시대가 이미 시작됨을 선언한 이 내용으로 당시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 새로운 생활운동이 일어났다. 세례를 받은 무리가 세례요한에게 묻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질문하니(눅 3:11-14),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며, 먹을 것이 있는 자도 없는 자에게 나눠주며, 세리는 정한 세 외에 강제로 거두지 말며, 군인은 강포하여 착취하지 말고, 받는 임금으로 착실히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작은 것부터 고쳐나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출발을 촉구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지상에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마 4;7-25, 9:35). 즉 가르치는 사역(teaching ministry), 병 고치는 사역(healing ministry), 말씀선포의 사역(preaching ministry)이다. 이 사역의 목적은 한 영혼이라도 회개시켜 구원받게 함에 있다. 12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천국복음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좇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이들을 전도여행하사 "가면서 전파하여 '천국이 가까웠다'(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 10:7-8). 이 천국복음은 세상 끝날 까지 선포되어야 한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shall be preached in all the world for: witness unto all nations : and then shall the end come. 마24:14). '천국이 가까웠느리라'는 말처럼 강한 메시지는 없다. 하나님의 왕권이 실현됨을 알리는 이 선포는 회개운동을 일으키며,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나태한 심령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천국복음을 온 민족에게 전하며 가르치는 자와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 묵상을 위한 질문: (1) 회개에 합당한 생활이란 ? (2) 천국이 지금 - 여기에 이미 실현됨을 어떻게 알 수 있나 ? (3) 예수의 지상사역의 주제는 ? * 관련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268장 (온 세상 위하여 나 복음 전하리) * 묵상기도: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천국이 가까웠음을 알았사오니 천국시민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사,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생명 다하도록 천국복음을 널리 전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계속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6장25-34절) 마태복음서에는 5개의 교훈 집이 수록되어 있다. 5-7장에 산상수훈, 10장에 전도에 대한 교훈, 13장에 천국비유, 18장에 제자의 도리, 24-25장 종말에 대한 교훈 등이다. 산상수훈(山上垂訓), 혹 산상보훈(Sermon on the Mount)은 '산 위에서 하신 주옥같은 교훈'이란 뜻이다. 3장에 걸쳐 수록된 산상수훈의 주제는 '하늘나라'이다. 10회 이상 나오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에 대해 제일 관심을 가지고 꼭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천국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the poor in spirit. 5: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 (they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5:10), 그의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사람(your righteousness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5:20: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목표로 매일 온전하려고 노력하는 자 (Be y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5:48), 좁은 문을 택한 자(enter ye in at the strait gate 7:13),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Even so every good tree bringeth forth good fruit 7:16-20),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he that doeth the will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7:21),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whosoever heareth these sayings of Mine, and doeth 7:24-25)가 천국에 들어간다. 산상수훈 이외에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어린아이 같이 겸손한 자'(마 18:3), 천국잔치의 예복을 준비하고 입는 자(22:10-14),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3:8), 믿음으로 사는 자(9:22. 15:28), 전도 받고 회개하는 자(12:41), 옥토 밭을 가진 자(마 13:2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16:24), 끝까지 견디는 자(24:13), 신랑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평소에 하는 자(25: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25:21), 어린 소자에게라도 정성껏 사랑을 베푸는 자(25:40) 등 복음서는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천국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방인처럼 세상의 온갖 염려와 근심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지내는가? 먹고 마시는 문제로 염려하는 자에게 주께서 공중의 나는 새와 들에 피는 백합화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람과는 비교되지 않는 동. 식물들도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먹고 입는 문제를 걱정하니 될 말인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마 6:33). 가장 우선 순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로 삼으면 부족함이 없다. 한문에 의(義 = 羊 + 我)라는 말은 '나는 주님의 어린양입니다'는 고백이다.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로 삼는 자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He restoreth my soul: He leadeth me in the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시23: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혹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마 5:6, 10).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 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간구한다. 우선 순위가 바뀌면 모든 것이 무질서해진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 오게 되어 있다. 천국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For godly sorrow worketh repentance to salvation not to be repented of: 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고후7:10) *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의 최우선 관심은 무엇인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신문을 들면 무엇부터 읽는가? TV를 틀면 무엇부터 보는가? 여가선용은?) (2) 천국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가? (3)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는가 ? * 관련 찬송: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503장(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415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 묵상기도: "오, 주님, 이방인처럼 일상생활과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근심한 것 용서해 주소서. 하나님 뜻대로 근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사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안식과 평화 얻게 하시옵소서. 시간과 물질의 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두게 하사 주의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하옵소서. 귀한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태복음 9장 13-17절)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새로운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생활이란 1)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let him deny himself),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take up his cross), 3) 예수를 좇아야 한다 (follow Him).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기준과 판단이 십자가의 기준과 생각으로 변화될 때 예수를 온전히 따를 수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 (눅5:33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Why do we and the Pharisees fast oft, but Thy disciples fast not? 마 9:14) 하니 주님은 간단한 비유로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금식할 필요가 없으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시간은 혼인의 기간이며, 제자들은 혼인집 손님들이며, 신랑을 빼앗길 날은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한 것이리라, 지금이라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구세주(신랑)로 영접하면 금식 대신에 신랑과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주일날은 금식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기쁨을 함께 누리는 날이다(찬송 209장 참고). 예수를 모시지 못하면 금식함으로 마음의 교만을 없애고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하는데, 저들은 잘못된 금식을 형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No man putteth a piece of new cloth unto an old garment. for that which is put in to fill it up taketh from the garment, and the rent is made worse).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Neither do men put new wine into old bottles: elso the bottles break, and the wine runneth out, and the bottles perish: but they put new wine into new bottles. and both are preserved 마 9:16-17).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No man also having drunk old wine straightway desireth new: for he saith, The old is better. 눅5:39). 이 말씀은 예수의 가르침이 바리새인의 종교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밝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선언이다. 기독교는 새롭게 하는 생활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고 사도바울은 쓰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인생관이 달라진다. 가치 있는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자기도 놀랄 정도로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뜻은, 첫째로 주님의 말씀이 새롭고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새 포도주와 같이 그 내용이 옛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낡은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습과 인습과 옛 전통을 깨뜨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 새 것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거듭남)이 복음이다. 주님의 나라는 신천신지(新天新地)이다. 주님의 말씀은 낡은 것을 벗어버리게 하며 새로 창조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항상 새롭고 생동력 있다. 둘째로 혼합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이것과 저것을 섞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같은 종류로 짝을 삼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걸맞다. 새 포도주와 헌 부대, 묶은 포도주와 새 부대는 맞지 않는다. 셋째는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 날은 부대를 터뜨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노력이 날마다 있어야 한다. 습관적인 방종의 생활을 청산하고 날마다 새로이 빚어지는 새 포도주, 새 생명을 담고 입히기 위한 새 부대, 새 옷을 창출해야 한다. 열려진 미래의 시간 속에 새 시대를 향한 개혁운동이 날마다 있어야 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 묵상을 위한 질문 (1) 우리 속의 헌 옷, 헌 부대는 어떤 것이 있는가? 고쳐야 할 것들은? (2) 새 옷과 새 부대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나? 거듭남의 뜻은? (3) 가나의 혼인잔치(요한 2장)와 이 비유의 관계를 찾아보라 * 관련한 찬송: 208장(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493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217장(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 묵상기도: "사랑의 하나님,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채우려는 어리석은 생활을 해왔습니다. 아무리 귀한 말씀을 받아도 곧 터지고 찢어지는 부대이기에 변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사 새로운 마음, 새로운 심령, 새로운 부대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4.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13-23절) 마태복음 7장 후반부에서 천국시민을 세 가지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도 험해서 찾는 자가 적다 (Enter ye in at the strait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way, that leadeth to destruction and many there be which go in thereat Because strait is the gate, and narrow is the way, which leadeth unto life and few there be that find it. 마 7:13-14).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좋은 학교일수록 학생을 뽑는 기준이 높고 경쟁률이 높다. 최선을 다해 고난을 참고 노력을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좁은 문(양의 문, 요한복음 10:7-10)이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예수를 따라가면 영생의 축복을 받는다. 때로 십자가도 져야 하고 고난의 쓴잔도 마셔야 하나, 주님께서 함께 십자가를 져 주시며, 고난의 길에 동행하시니 그 길이 결코 어렵지 않다. 주님의 가르침은 고난과 좁은 문을 피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다만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인내와 믿음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마태 11:29-30). 둘째로, 좋은 열매를 짖는 사람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Ye shall know them by their fruits. Do men gather grapes of thorns, or fig of thistles ? Even so every good tree bringeth forth good fruit: but a corrupt tree bringeth forth evil fruit. A good tree cannot bring forth evil fruit, neither can a corrupt tree bring forth good fruit 마태7: 16-18). 나무의 열매를 보아 그 나무가 좋은지 나쁜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는 참 좋은 나무인 것 같으나 열매는 형편없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는 초라하고 좋은 나무같이 보이지 않으나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 성도도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항상 기억해야한다. 콩 심어 놓고 팥을 기다리는 요행심리를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지만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spirit. 요3:6)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 (갈 6:8).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열매 맺는 일은 인내와 정직, 성실과 겸손, 지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And let us not be weary in well doing: for in due season we shall reap, if we faint not. 갈6:9)의 말씀대로 좋은 열매를 맺도록 선한 씨앗을 꾸준히 뿌리며, 좋은 영양분을 공급받도록 하자.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르짖고 심지어 주의 이름을 빌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 내고 맡은 권능을 하는 모든 행위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마 7:22-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Not every 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he that doeth the will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마7:21). 심는 대로 거두게 된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위선 하는 자는 최후 심판의 문턱에서 걸리게 되어 있다. 선한 척, 거룩한 척, 진실한 척, 잘 믿는 척 해도 마지막 심판 때 실상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해 질 때 양과 염소가 우리에게 들어갈 때 갈라지듯, 주님의 심판시 선인과 악인은 갈라서게 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미리 깨닫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며 (약 3:18),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요일 3:18)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벧전 2:20).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 (시1:6). 오직 여호와의 율법(=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다 (시1: 1-2). *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는 지금까지 어떤 거를 뿌려왔는가? 교만의 씨, 욕심의 씨, 게으름의 씨 (2) 나는 앞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자신이 있는가? (3)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시는데 나는 어떠한가? (보이는 형식에만 미화를 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 관련 찬송: 260장 (이른 아침부터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253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좁으며) * 묵상기도.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 저로 하여금 당장의 편안함과 안일함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좁은 문 끝에 영생이 있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면 지금 발길을 돌려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인도해 주옵소서.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날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씨앗을 성실하고 부지런히 꾸준히 심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5.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마태복음16장 1-4절) 한국인이 복을 좋아하듯이 유대인은 표적(혹은 기적)을 좋아하며, 헬라인은 지혜를 좋아한다 (참고, 고전 1:22), 하루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마 16:1). 실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신앙노선이 여러모로 달랐다. 가령, 바리새인은 세속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전통과 종교적 관습을 중시하며, 경건생활에 힘썼고 금욕생활로 정기적인(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를 하며, 철저한 헌금생활을 하며, 예언서와 시가서를 모두 정경(政經 Canon)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사두개인은 세속정치에 적극 가담함으로 권력을 좋아했고, 장로의 종교전통을 경시하고,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부인했으며, 창세기-신명기인 오경(五經 pentateuch)만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다른 신앙노선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예수님을 시험하는데는 마음을 같이 했던 것이다. 이들은 특별한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표적과 이적을 구하는 이들의 요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일찍이 첫 이적을 행하신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러 가실 때에도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 4:48)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또 다른 특별한 표적을 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기후 예측의 예를 들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but fan ye not discern the signs of the times)고 하였다. 이스라엘에서는 기후 예측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저녁에 지중해 쪽에 있는 하늘이 붉으면 다음 날 구름 없는 맑은 날씨가 예측이 된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낮에도 구름 있는 흐린 날씨가 계속 되는 것이 예사이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면서 그들은 그것이 지중해의 습기를 동반한 비구름인 것과, 이것이 세펠라(Shephelah) 및 유다의 산들을 지나게 될 때, 산간 도시의 서늘한 기온 때문에 수증기로 응결되어 비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남풍이 불어오면 그 바람이 작렬하는 사막의 뜨거운 기온을 몰고 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그것이 남동풍이라면 극도의 고온 건조한 바람과 찌는듯한 더위를 동반한 '죽음의 열풍'이라고 부를 만큼 천기(天氣)에 밝았다. 이같이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 알면서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시대의 기상(時氣)은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셨다. 신약성서에서 표적(헬라어로 Semeion)은 대개 기적적이고 신비하며 종말론적인 것이 많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표적과 이적을 구경거리로 삼아 즐기기도 하며 놀라움(驚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예수께서 그 동안 많은 불치병 환자들을 고치시고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는 것에 양이 차지 않았던지, 이제는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것이다. 즉 해와 달을 멈추게 한다든지, 조상들이 이집트에 나을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한다든지, 광야에서 40년간 보았던 여러 가지 표적 등을 행하면 우리가 당신은 메시야로 믿겠소 라는 태도이다. 사실 이들의 요구대로 주께서 표적을 행하신다고 저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겠는가?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 1시간쯤 흑암에 있은 후 다시 해가 빛을 낼 때, 저들이 변하여 예수를 믿었겠는가? 분명 저들은 하나의 흥미거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에 주님의 답변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표현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장차 망할 이 세상을 지칭한다.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대는 멸망 직전의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유사하며 로마서 13:12에 있는 내용처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워지는 세대'이다. 경건의 모양만 남아 있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쓰시면서 요나의 표적을 제시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심으로 (마 12건0), 주께서 장차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과연 전 인류사의 가장 큰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 쓰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 23-24) * 묵상을 위한 질문: 1) 주님이 지금 내 옆에 계시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요구할까? 2) 오늘날 시대의 표적은 무엇인가? 3) 왜 주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하는가? 4) 요나의 표적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관련 찬송: 403장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366장 (어지러운 세상 중에 기쁜 소리 들리네) 465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 묵상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헛된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 저희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살고 있는 저희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깨닫게 하시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요나처럼 자기의 가치관과 뜻대로 행동하는 어리석음을 온전히 버리고, 속히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어두운 세상에 더욱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시어,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옵소서" 사랑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6.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마태복음 20장 1-16절) 이 비유는 천국비유의 전형적인 형태인 "천국은 마치 ...... 같으니"로 시작된다. 포도수확철이 되어 집주인이 일군들을 모집하러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나갔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 21)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켰다. 아무래도 오늘 해질 적까지 일을 끝내지 못할 것 같으니 주인은 오전 9시경(재 3시)22) 추가 모집하러 시장에 가서 장터에서 일을 기다리며 놀고 있던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켰다. '상당하게 주리라' 다시 말하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약속이었다. 정오(제6시)가 가까웠으나 일이 끝나려면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한 것을 판단한 주인은 다시 시장에 가서 아직도 서성대는 몇 사람을 고용했다. 오후 3시(제 9시) 에 나가서 추가로 일꾼을 고용했다. 주인이 아침에 계산한 일꾼수가 모자랐는가 ? 먼저 와서 일을 하던 품꾼들이 주인의 기대만큼 열심히 일을 하지 못한 탓이리라. 21) 데나리온(Denarion. 복수=Denarii)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통용되던 은화(piece of silver)로서, 군인이나 노동자(일군)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리이스의 한 드라크마(Drachma)에 해당한다. 22) 성서에 나오는 시간을 오늘날 우리가 통용하는 시간개념으로 바꾸려면 6시간을 더하면 된다. 당시에는 해 떠오를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낮의 장단에 관계없이 12시로 나누었으며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통용하는 관습이었다. 주인은 해지기 1시간 전인 오후 5시(제11시)에도 시장에 나가 보았다. 그 시간까지 몇 사람들이 서성거리며 있었다. '당신들은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고 물으니 저들의 대답이 딱하다. '우리를 품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주인이 결심을 내린다. 비록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알았지만 자네들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다. 아마도 저들은 최선을 다해 포도를 거두었을 것이다. 드디어 일은 마감하고 일당을 받는 시간이다. 율법에 의하면 일군의 품삯은 그날에 지불하도륵 되어 있다 (신 24:15).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steward, 헬라어 Epitropos)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하니 오후 5시(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다. 무척 후한 임금이다. 고작 1시간 일했으나 종일 일한 만큼의 품삯을 주니 얼마나 기쁘겠느냐 ? 그 사람들보다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은 은근히 더 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 구 시에 온 사람, 제 육 시에 온 사람, 제 삼 시에 온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한 데나리온씩 임금이 지급된다. 침묵이 흐른다. 맨 나중에 제일 먼저 와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 집주인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한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은 액수의 돈을 그들에게 지급합니까 ?' 당연한 불평이리라.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온 자들은 그대로 침묵하고 있다. 상당한 임금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맨 먼저 와서 종일 일한 자들이 앞서 받는 사람들의 임금을 보고 더 받을 것을 기대했다가 동일하게 지급 받으니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주인이 그 중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자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자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신앙의 세계에서는 불평이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종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인에게 감사를 하며, 나중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는 아량이 필요한 것이다. 이 비유를 시작하기 전 마태복음 19:30에서 말씀하기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되어 있고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20:16) 이 비유의 목적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하며 인간의 우열이나 선후에 개의치 않고 공평하게 취급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권한에 속한 것이기에 인간이 감히 도전할 수 없다 (롬9:14-21). 자녀를 많이 둔 부모가 모든 자녀들을 사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침 일찍 온 사람은 민족적으로 보면 먼저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일 것이고, 신앙적으로 보면 일찍 믿음생활을 한 사람일 것이다. 이들은 먼저 택함을 받아 일한 대가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할 우려가 있었기에 예수께서 이를 경계하신 것이다. 한편 늦게 부르심을 받은 일군은 일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하기에 은혜에 의지하는 마음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기 1시간 전에 고용되어 일한 일군을 생각해 보자. 주인이 과연 꼭 필요해서 이 사람을 채용했는가 혹은 선심을 제공하기 위해 채용했는가라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시간만 일하고 하루의 품삯을 받게 되었으니, 주인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보상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행위의 대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는 몇 시에 부름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의지하는가? 2) 하오 5시에 부름 받은 자처럼 최선을 다하는가? 3) 이웃에 많이 받는 것을 축하하며, 나의 받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가 ? * 관련찬송 : 263장 (예수 말씀하시기를 누가 오늘 일할까?) 355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 묵상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부족한 저에게 사명을 주께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충성치 못하여 주님에게 실망을 끼쳐 드린 것 죄송합니다. 이 말씀처럼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부름을 받은 종처럼 최선을 다하며 이마에 땀을 흘리도록 수고하게 하소서. 받은 은혜에 늘 감사드리며, 이웃이 나보다 나은 은사 받았음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7.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장 9-14절) 예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느 날 예루살렘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왔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사람은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듣는 세리였다. 당시 유대는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있었기에 인두세, 소득세, 상속세를 내어야 한다. 미국처럼 자진 세금보고를 하거나 한국처럼 세금고지서를 받아 납부하지 않고 유대인들 가운데 세리(publican 혹은 tax collector)를 세워 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세금을 거두었다. 대개는 정한 세금이상을 거두어 상관에게 뇌물을 주며, 남은 돈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소득의 20%를 거둘 것을 50%까지 거두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몰아새우고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하였다. 심지어 죄인 취급을 했다. 기도시간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討索), extortioners),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고 기도했다. 기도라기 보다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보고문이다. 남의 것을 등쳐먹지 않고 의롭게 살고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과 8계명("도적질하지 말라")을 충실히 지키며, 경건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정한 십일조를 바치고 있음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기도이다. 예수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약 3,000명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철저한 금욕생활과 경건 생활에 힘을 써 일반 유대인보다 우월하다는 일종의 특권의식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최대 약점은 저들의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데 있다.(마23:3) 겉으로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속으로 자기의 욕심과 명예를 추구하고 살았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마 23:4) 그들은 돈을 좋아한다. (눅 16:14) 하나님만큼 돈을 사랑한다. 바리새인들은 유별나게도 자기자랑과 과시를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쉐마(신 6:4-9)를 기록한 두루마리를 작은 상자에 넣어 이마나 손목에 붙이고 다니는 경문(經文, phy1acteries, 작은 글상자) 가운데 큰 것을 달고 다니며, 긴 옷과 넓은 옷단이 있는 옷을 즐겨 입으며(enlarge the borders of their garments), 잔치 자리나 회당에 가더라고 높은 자리(Uppermost rooms) 앉는 것을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랍비'(=선생)라고 불리우는 것을 좋아한다. (마 23:4-8) 예수께서 그들의 외식(外飾 hypocrisy)을 책망하셨다. (마 23:13-38, 참고 눅 20:46-47) 바리새인의 외식을 염두 하시면서 주께서 가르치시기를 "또 너희가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e10set)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5-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6) 잘 믿는 척하나 실상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종교지도자가 꼭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삼상 16:7, 행 13:22). 한편 세리는 성전 한 구석에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새번역)'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God be merciful to me a sinner.)고 했다. 예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멀리 서서 애절하게 기도하는 세리를 오히려 칭찬하셨다.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8?,14)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히브리어 니쉐바라 '산산 조각난'이란 뜻)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고 다윗은 기도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9-10) * 묵상을 위한 질문: 1) 바리새인의 기도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2) 세리의 기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 3) 내가 평소 드리고 있는 기도내용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 4) 주께서 칭찬하실 기도문을 적어보자 * 관련찬송: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195장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맑히시는 주의 보혈) * 묵상기도: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 동안 주님을 실망시켜 드린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여 저의 영혼과 몸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1 8.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누가복음 10장 29-37절)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하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했다. 주님은 그에게 율법의 핵심 내용을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하나님 사랑(쉐마의 내용, 신 6:4-5)과 이웃 사랑(레 19:18)을 언급하니 주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 율법학자는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싶어했던지 다시 질문하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의 구제생활, 경건생활을 자랑하고 싶어하는데 이웃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던 것이다. 이의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이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Good Samaritan)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참된 이웃인 사마리아 사람'일 것이다. 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교훈 하신다. 어떤 유대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지형상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이고 여리고는 요단 협곡에 위치하고 있어 해저 250미터 되는 지역에 있다. 여리고는 유대광야를 통해서 가는데 와디(wadi=건천, 우기 때는 강. 건기 때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황야를 지나는데 강도 떼를 만나서 옷을 빼앗기고 죽도륵 맞아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강도 떼가 도망한 후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피하여 가버리고 말았다. 제사장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될까봐 (민 19:11-19) 그냥 지나간 것일까? 강도 만난 사람인 것을 알텐데.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이 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예배 준비하는 일이 바빠서 그냥 가버린 것일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나 피를 홀리며 쓰러져 죽은 자들에게 한번 접근해 보지도 않고 가버리고 말았다. 이때 어떤 사마리아인이 지나갔다. 그가 한 행동을 보자. 1)그를 보고 (불행한 일을 발견) 2)불쌍히 여겨 (=동정함, 어려운 일을 당한 자에게 관심을 가짐) 3) 가까이 가서 (구체적 행동을 시작) 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응급조치) 5) 자기 짐승에 태워 (최선을 다해 도움) 6)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간호해줌) 7)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주인에게 지불하면서 이 사람을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면서 (가족이상으로 끝까지 사랑) 8) 만일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차액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끝까지 책임을 지다). 주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후 그 율법학사에게 물으시되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하시니 그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신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발견한다. 가. 상처를 주는 자 (강도는 육신의 상처, 제사장, 레위인은 정신적 상처) 자신(low self-esteem)일수도 있고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일수도 있다. 그 외 상처를 주는 자로 부모, 선생, 목회자, 동료, 교인, 고객, 공동체, 환경, 직장생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나. 상처를 받는 자 (강도를 만난 유대인) -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고 육체의 아픔을 당하는 자이다. 친한 친구로부터 오해를 받는다거나 어떤 누명을 뒤집어쓰거나 중상모략을 당할 때 맡은 상처를 받는다. 악인으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받는다. 또한 사회의 구조 악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며, 공동체 생활에서 상처를 받는다. 이단과 사이비로부터 피해를 입기도 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보고 영적인 상처를 입기도 한다. 다. 상처를 치유하는 자 (무명의 사마리아 사람) 평소에 미움과 멸시를 받던 이방인이 이웃 유대인의 상처를 끝까지 치유해 준다. 회생과 봉사와 섬김의 정신으로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하여 치유한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눅 10:36)는 질문을 받을 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각자가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고 오직 상처를 치유하는데 힘써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교회는 치유의 공동체가 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37) *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는 상처를 주는 자인가 ? 상처를 치유하는 자인가 ? (2)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3) 내가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가 ? * 관련 찬송: 369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3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 37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 * 묵상기도: "주님, 저로 하여금 사랑의 이웃이 되게 하옵소서. 선을 악으로 갚는 자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가서 자비를 베풀며 모든 소망을 채우는 이웃이 되게 하옵소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상처 주는 자가 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옵소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9.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장 24-37절, 36-43절) 어떤 사람(집주인)이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밭에 씨를 뿌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원수가 밤중에 와서 그 밭에 와서 '가라지'(tare=독보리, weed)씨를 뿌려 버렸다. 가라지란 일종의 들풀로 팔레스타인 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