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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가보는 전남동부권 기독교 성지 ② 광양 - 100년 역사 웅동교회 ‘기지개’ 광양시의회 기독교유적지 개발 조례 통과… ‘변식’ 예배당 광양읍교회도 귀중한 유산 2004년 03월 02일 (화) 12:00:00 정재영 볕이 쌓이기 시작하는 섬진강변은 매화꽃이 한창이다. 진안 마이산에서 시작된 강줄기가 흘러흘러 임실 구례 하동을 지나고 바다와 만나기 전 마지막 숨을 고르는 곳, 바로 햇빛 찬란한 고장 광양이다. 섬진강변인 다압면 매화마을은 곧 벌어질 매화축제 준비로 술렁이기 시작하고, 전어회로 유명한 망덕포구와 배알도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섬진강에서 한 달음이나 됨직한 지점에 우뚝 서있는 백운산은 요새 상춘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백운산 자락에 들어서면 어치계곡과 수어댐의 장관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은 봄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인 들판의 여린 풀잎과 새싹들의 신비한 기운을 좇아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른다. 그 끝에서 마주치는 동네가 진상면 웅동마을이다. 예전에는 구례와 순천으로 넘어가는 유명한 길목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신작로들이 나면서 졸지에 오지가 되고 만 쓸쓸한 시골이다. 한 때는 아이들의 함성이 드높았던 초등학교도 이미 폐교된 지 오래다. 고로쇠 약수를 찾거나 멧돼지 고기를 즐기는 손님들이 아니라면 여간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네. 그 조용한 동네가 요즘들어 부쩍 부산해지고 있다. 전남 동부권 최초의 교회, 그것도 선교사의 힘이 아닌 한국인들의 힘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긴 교회가 이곳 웅동마을에서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이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웅동교회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시작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의분에 북받친 한태원이란 인물이 국모를 해친 일본인을 인천까지 좇아가 기어코 응징한 후, 밤낮없이 피난길을 걸어 도착한 동네가 바로 웅동마을. 당시 그 마을에는 마흔살 동갑내기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등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태원을 추적하던 관리 한 사람이 마침 웅동마을을 정탐하러왔다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주막에서 노름으로 아까운 젊음을 탕진하는 이 세 사람을 만난다. 한심한 생각에 관리가 “광주 양림동에 가서 야소교인들이나 만나보라”고 권한 것이 이 세 사람과 마을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이들이 광주를 찾아가 만난 이들이 양림교회 조상학과 오웬 선교사, 그들로부터 전도를 받고 성경을 배운 후 고향으로 돌아온 세 사람이 예배를 드리면서 1904년 5월 4일 웅동교회 역사는 시작된다. 이들의 전도로 온 마을이 예수를 믿게 되고, 연이어 인근 동네에도 교인들이 생겨났다. 웅동의 작은 예배당으로 많은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이듬해 11월 3일 아랫마을인 신황리에 새로운 예배 처소를 만들었고, 그것이 신황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들 교회에서 복음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해 심지어 한 주에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일까지 생겼다. 또한 웅동교회 설립자인 세 사람의 가정에서 박정식 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등 14명의 목회자가 배출될 정도로 수많은 복음의 일꾼들이 이곳에서 길러졌다. 현재 웅동교회를 담임하는 서승기 목사도 그 중 한 명이다. 웅동교회 예배당은 예나 다름없이 아담하고, 허름한 자태 그대로 서있다. 예배당 안에 전시된 사진들이 이 교회의 자랑스런 역사들을 일러줄 뿐이다. 그러나 올해들어 상황이 변하고 있다. 광양시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이용훈 목사)가 1년 넘게 각고의 노력을 벌인 결과, 마침내 1월 31일 광양시의회에서 광양시 기독교 성지조성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통과시키는 경사가 벌어진 것이다. 웅동교회의 복원과 함께 웅동마을과 신황마을을 기독교 유적지로 개발하는 사업은 올해 대지구입에 이어, 내년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가도록 준비되고 있다. 5월 4일 100주년 기념예배를 앞둔 웅동교회에 들뜬 분위기가 가득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념사업계획안에는 또한 마을과 인접한 비평리 불암산성 부근에 순교기념관 및 선교기념관과 청소년수련시설 등을 세워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도 포함돼있다. 이 일대가 기독교 관광명소로 탈바꿈할 날도 이제 머지 않았다. 웅동을 빠져나온 우리의 여정은 광양읍으로 향한다. 남해고속도로 광양읍IC로 나와 읍내로 들어가면 지금은 빈 집이 된 광양읍교회 옛 예배당을 찾을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특이할 것 없는 외관을 지녔지만 전라남도 문화재 지정이 추진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전남동부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변식 예배당이라는 점이다. 전통식 건축양식과 달리 천정과 바닥이 맞통하는 구조로, 변요한 선교사가 우리 나라에 처음 이같은 건축공법을 도입했다하여 ‘변식’ 예배당으로 통한다. 광양읍교회도 1908년 창립된 유서깊은 교회이다. 고라복 오기원 등 한국교회 초창기를 이끈 선교사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사역했으며, 양용근 조상학 목사 등 빛나는 순교자들도 이 교회에서 신앙열정을 불태웠다. 1937년 고라복 선교사를 기념하며 석조함석 지붕에 40평 규모로 지어진 이 예배당은 40년후 1층을 20평 늘이고, 5층짜리 종탑을 세우는 모양으로 개축된다. 그럼에도 변식 설계의 원형은 훼손되지 않아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기념사업위원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발걸음을 돌려 광양항의 분주한 모습, 광양만의 낙조를 감상하며 또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제 마지막 기착지는 여수, 순교자 손양원 목사가 피로써 지킨 순교신앙이 서린 땅이다. 서둘러 향하는 길, 저절로 입가에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찬송이 맴돈다. 여수 땅을 밟기도 전 마음이 벌써 숙연하다.
첫댓글 쟁반 밑의 사진이 기독교 성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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