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雲流水(행운유수)
【字 解】 行(다닐 행) 雲(구름 운) 流(흐를 류) 水(물 수)
【 뜻 】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① '일정한 본질이 없이 각양각색으로 변화함'을 이르는 말.
② 나아가서는 '조금도 집착함이 없이 사물에 호응하여 행동하는 것'을 비유.
③ 또한 '속세에서 떠나 초연한 심경(心境)에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
④ '일의 처리에 막힘이 없거나 마음씨가 시원시원함'을 비유하기도 함.
【出 典】 蘇軾(소식)의 「答謝民師書(답사민사서)」. 宋史(송사) 蘇軾傳(소식전)
【풀 이】
蘇軾(소식)의 答謝民師書(답사민사서)에 있는 "行雲流水, 初無定質(행운유수 초무정질)"에서 비롯된 말이며 행각승(行脚僧)을 운수(雲水)라고 일컫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송대(宋代) 제일(第一)의 시인 소식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산문(散文)의 대가였고 문인화(文人畵)의 창시자이며 서예(書藝)의 명인이고, 또 송대 제일의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비록 정치계에는 불운했으나 송대 문학의 중추인물로 문단에 끼쳤던 영향은 다대했다. 특히 송시(宋詩)의 새로운 풍격(風格)을 이룩하여 문학사상 송시의 명목을 남겼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고 해학을 좋아했으며 인생의 참다운 철학을 가졌다. 천성(天性)의 자유인으로 정치보다는 문학의 천재로 좁은 세상을 넓고 활달하게 노래하다 간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이었다.
소식은 오랫동안 지방관으로 여러 지방을 편유(遍遊)하면서 사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에 따라 여러 계층의 많은 인물들과 교유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학적 시야는 더욱 넓고 풍부했다. 그는 謝民師(사민사)라는 친구의 작품을 칭찬하는 글에서
"그대의 글은 마치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는 듯 처음부터 정해진 바탕이 없다. 그러나 언제고 가야할 곳으로 가고 멈추지 않아서는 안될 곳에 가서는 멈춘다. (大略如行雲流水, 初無定質, 但常行於所當行, 常止於所不可不止. 一答謝民師書一)"
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자신의 작풍(作風)을 가리킨 것이다.
(嘗自謂:「作文如行雲流水,初無定質,但常行於所當行,止於所不可不止。」一宋史 蘇軾傳一)
그는 또 자신의 문학을 평하여 '내 글은 마치 만 톤이나 저장되어 있는 샘물의 원천과 같아서 땅을 가리지 않고 솟아나와 평지에서도 도도하고 세차게 흘러 하루에 천리를 흘러가기에 어렵지 않다. 산이나 바위를 만나면 물건에 따라 형체를 이루나 알 수가 없다.'라 하였다.
(吾文如萬斛泉源, 不擇地皆可出, 在平地滔滔율율, 雖一日千里無難 。及其與山石曲折, 隨物賦形, 而不可知也。 所可知者, 常行於所當行, 常止於不可不止, 如是而已矣。 甚他雖吾亦不能知也。一蘇軾文集卷六十六 自評文一)
[흐를 율=삼수변에曰]
萬斛(만곡) ; 일만 휘나 되는 많은 양. 1휘는 15~20되.
소식(蘇軾)은, 당대(當代) 시인들의 거대한 조류를 혼자 몸으로 막고 이 세상의 고난을 자기 혼자만이 당하는 듯 좌절하고 실망하여 비탄에 젖어 우는 듯하는 감상적(感傷的)인 시풍(詩風)을 지양(止揚)했다. 그는 운명에 순종하기보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활동하는 인간 세계를 묘사하기에 노력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생활과 사회와 밀착하고 사회적 연대 의식을 가진 인간과 세계를 서술하기에 노력하였으니 이것은 거시(巨視)의 철학에서 온 시풍이라 하겠다. 고로 그는 인생의 비애와 운명을 고뇌의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시에 보면 [吾生如寄耳(오생여기이)]라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내 생(生)은 마치 이 세상에 붙어사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을 관조(觀照)하는 태도며 사상(思想)이고 시작(詩作) 태도였다
蘇軾(소식, 1036.12.19∼1101.7.28)
중국 북송 때의 시인. 메이산[眉山: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