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그 가슴 저린 슬픔과 고통의 상흔(傷痕)에, 주님의 은총이 고여...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교수로 근무하는 막내딸이 남편이 근무하는 캔사스 대학으로 가기 위하여 가을 학기에는 캔사스 대학교로 옮겨간다 합니다. 그런데 이미 옮겨가기도 전에 6월 25일을 기하여 <한국 사회복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을 알리는 강연회를 기획하고, 나에게 강연을 부탁하였습니다. 영어가 짧아 어떻게 하나 걱정하였더니 원고만 써 주면 영어는 딸과 사위가 윤문 하겠다 합니다. 그래서 25일을 전후하여 제가 며칠간 성가회를 비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6월 25일에는 연례행사로 우리 성가회에서 후원음악회를 개최합니다. 이번에는 작고하신 남학오 검사님과 그 미망인 이정자 여사가 키워내신 남수아(첼로), 남수지(바이올린), 남수민(피아노) 세 자매가 공연을 하는데, 크게 대성할 음악인들이니 부디 이웃사람 한분씩 모시고 참석하시기 부탁드립니다.
우리 성가회의 한 해 사업 중에서 가장 큰 일의 하나인 연례 후원 음악회에 제가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한 없이 서운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임종연습”이다 생각하면 이 일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언제까지 성가회의 온갖 대소사를 시시콜콜히 도맡아 하겠습니까? 반드시 후배 후진 자손들에게 이 일을 맡기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전에 미리 미리 그날을 준비하는 것이 결국은 인생 대단원의 순간을 준비하는 임종연습입니다. 생명은 완성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임종연습을 통하여 완성된 존재로 만들어져갑니다.
연극에서 1장이 있으면 2장으로 당연히 이어지고 3장 4장을 거쳐 5장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5장에 이르기가 싫어서 한없이 1장과 2장에 머무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싫다고 발버둥치지 말고 반드시 5장을 맞이하여 무대에서 기쁘게 퇴장하여야 연극이 끝납니다. 세네카의 말입니다.
허버트 스펜서는 인간은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죽을 것이 틀림없건만, 오늘 우리는, 아직 나에게만은 죽음이 멀리 있다고, 아니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죽을 수 없고 나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오직 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준비 없이 허망하게 죽음을 맞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다가와 있지 않으므로 죽음 체험이 불가능하고 죽은 다음에는 살아서 되돌아 와 죽음체험을 말해 줄 실존적 자아가 없으므로 죽음을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추측하고 연구하고 신학적 종교적 논리를 세운다 해도 죽음은 언제까지나 침묵을 지키는 무지의 영역이고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싫고 무섭고 슬픈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포와 비애와 혐오감을 경감시키거나 감면해 주는 영역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비교적 빨리 죽음을 수용하는 평화로운 단계에 들어섭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다섯 단계가 있습니다. “내가 암이라고? 너 돌팔이구나! 너 오진이야! 오진 안 할 다른 의사 찾을 거야.” 거부의 단계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님을 믿었는데 왜 하필 나입니까? 이제 안 믿어!” 분노의 단계입니다. “하느님! 3년만 더 살아, 막내딸 시집만 보내게 해 주세요. 그럼 교회에 1억을 바칠게요.”흥정의 단계입니다. “아, 이제 죽는구나. 아무것도 못 가져가고 아무하고도 동행하지 못하고 나 혼자 이제 가는구나.” 절망의 단계입니다. “저만 죽나요? 다 죽는데요. 하느님이 주신 목숨 가두시어 하느님께 돌아오라 하시니 제 목숨을 받으소서.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이제 하느님 곁으로 즐겁게 갑니다.” 하면서 평화롭게 죽음을 수용하는 다섯 번째 단계입니다.
6.25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다 잃고, 9.28 서울 수복의 경인간 시가전 한 복판에서 살아남으며, 10만 개 중 하나라는 불발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기절했던 나, 뼈 속 깊이 죽음 공포의 강박관념에 빠졌다가 부평 집장촌의 무수한 성매매종사여성들을 보고, 그들에게 성병예방 치료약을 주사하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을 부양하고,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서 천주교회 고아원에 들어가 세례 받고 동생들의 생계를 해결하며 고아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고아원에서 나와 가정교사로 아르바이트하여 동생들을 부양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17년간의 각고 끝에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된 나. 그 박사학위의 내용과 주제가 <죽음의 공포와 사별의 애통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였으니 그 이유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공포와 사별의 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는 이 성가회를 운영해 왔다고 생각됩니다. 집장촌 여성들을 돌보라고 유언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언 실현이 이 집을 지어 성매매종사여성들을 위한 재활의 집으로 봉헌하게 된 동기이고, 매일 매일 강의하고 강연하면서 받은 봉급과 강연료를 털어 성가회에 바치는 일이, 결국은 매일 매일의 내 임종연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6.25 후원음악회에 참석 못하게 된 이 일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플라톤이 말한 임종연습의 철학에서 벗어나는 치졸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빈치는 “하루의 생활이 착하였으면 밤의 침상이 평안하고 한 평생의 매일 매일이 착하였으면 마지막 임종의 침상이 복되고 평화롭다”고 말했고 “처자식 위해서만 살던 때가 아니라 병들고 배고픈 아프리카 어린이들 돌보던 순간들을 생각함에, 지금 나의 죽음이 감미롭고 평화롭다”고 슈바이처는 말하였으며 “내가 먹고 마시던 20세기의 빵과 포도주 그리고 내가 가르치던 교수직을 누군가에게 물려준다고 생각할 때에만,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신학자요 철학자인 죌레는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 느끼고, 자신을 자기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라고 느끼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6.25 그 가슴 저린 슬픔과 고통의 상흔(傷痕)이 할퀴고 살을 저며 낸 자국과 살이 패인 골짜기마다에, 하느님이 그 상처를 쓰다듬으며 부어주신 은총과 사랑이 고이고 고여, 오늘 이 음악회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에 깊이 감사하면서, 6.25를 기념하는 성가회의 후원음악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사장의 인사말을 여기에 쓰는 것이며, 이 인사말을, 네 명 딸들을 길러 혼수도 안 해주고 시집보내면서, “네 대신 매춘하고 미혼모 되고 사생아 낳아 기르고 매 맞고 불행해 진 여성들을 위하여, 너에게 해 줄 혼수비용을 성가회에 바친다.”라고 주장한 어미의 고집에 찬동해 준, 장녀 심 진영에게 전하며 성가회 이사님들과 함께 여러 회원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인사말로 읽어줄 것을 부탁하며 비행기에 오릅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성가회 회원님들! 회비를 보내시는 여러분의 행위가 바로 목숨의 완성을 준비하는 임종연습이요 죽음연습입니다. 존경합니다.
우리 성가회 회원님들! 내년 6월 25일의 만남을 기원합니다.
2005년 6월 10일
나자렛 성가정 공동체 원장 이 인복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