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지클래식)
저자: 최윤
발제: 김명훈 (결락)
장소: 김해 다어울림 문화센터. F4/워킹룸2
일시: 2024년. 3월 22일. 금요일 저녁 7시.
'당신이 어쩌다가 도시의 여러 곳에 누워 있는 묘지 옆을 지나갈 때 당신은 꽃자주 빛깔의 우단 치마를 간신히 걸치고 묘지 근처를 배회하는 한 소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당신에게로 다가오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말고, 그녀가 지나간후 뒤를 돌아보지도 마십시오. 찢어지고 때 묻은 치마폭 사이로 상처처럼 드러난 맨살이 행여 당신의 눈에 띄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주십시오. 당신이 이십대의 청년이라면, 당신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야생의 빛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먼지 낀 때에 절어 가닥 난긴 머리채에 시든 꽃송이로 화관 장식을 하고 꼭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은 초점 잃은 시선으로 그녀는 머리채에 꽂힌 꽃보다 더 붉은 웃음을 흘리면서 당신 뒤를 쫓아올 것입니다.'
중편『︎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첫 문장입니다. 작가의 처연한 읊조림으로 들려주는 비극의 전조는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묘지를 서성이며 머리에 화관을 쓰고 텅 빈 동공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소녀는 미치지 않았으니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지나가라고 속삭이듯 타이릅니다.
현대사의 붉은 벽화 5.18을 다룬 최윤의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1996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당시 15세였던 이정현 배우의 신들린 연기력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중학생의 전라 노출로 인한 논란 때문에 정작 아프고 아팠던 역사적 사실은 주목받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는데요. 오히려 우리나라 바깥에서는 호평받아 몇 개의 영화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에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되는 문지클래식 시리즈의 여섯 번 째 작품집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는 총 일곱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이 실려 있습니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싯구의 한 소절 같은 제목을 달고 1980년 5월 18일의 상황을 연상하며 시를 쓰거나 글을 쓴다면 우리는 어떤 소리들을 낼 수 있을까요.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었겠나요. 함성소리, 총소리, 발소리, 비명소리, 때리는 소리, 신음소리,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소리, 그 날의 소리, 소리들.
5. 18이 어서 잊히기를 바라는 날조와 선동 속에 학살자 전두환과 그 일당을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치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멸시와 조롱 소리로 피로 물 든 역사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참상의 무대가 내 집 앞마당에서 이웃 집 앞마당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걸 명심해야겠습니다. 진실에 대한 침묵은 멸시와 조롱에 대한 동조일 뿐.
곧 봄입니다. 바람이 불면, 흩날리던 꽃잎들이 퍽퍽 쓰러지며 울다가 차곡차곡 무덤처럼 포개지더라고, 그중 휩쓸린 어린 꽃잎 한 점이 시끄럽게 웃더니 저어 만치 저어 만치 제 발로 사라져가더라고…︎…︎. 한 번쯤은 기억해 주시길.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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