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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8월 24일 한국에서 보내 온 골프채가 이곳 달랏에 도착했다.
미즈노 JPX E600 스틸 아이언 세트 9개, 드라이버 1개, 유틸리티 1개,
퍼터 1개 그리고 골프 장갑 몇켤레가 골프 가방 속에 넣어져 왔다.
이곳 달랏에 있는 몇몇 '달랏 한인 골프 클럽' 회원들의 꼬임(?)에
빠져 20년 전에 놓았던 골프채를 다시 잡을려고 옥션을 통해 한국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마침 이곳 화홍달랏 호텔에 거주하고 있는
몇몇 회원들이 그날 아침 골프 연습하러 간다고 하길래 그 골프 가방을
달랑 들고 같이 따라 붙었다.
클럽하우스에서 1개월 '연습회원'을 끊고 연습장 필드로 향했다.
7번 아이언을 뽑아 들고 연습 티오프 라인에 섰다. 멀리 랑비앙산 두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 온다. 가라 스윙 몇번 하고 드디어 볼 하나를
잔디위에 살짝 올려 놓았다.
심호흡 한번 하고 볼을 치기 시작했다.
'뒷땅,대가리,뒷땅,대가리...'. '퍽, 또르르, 퍽, 또르르....'
20년 전 보기 플레이어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순간이다.
20년의 세월도 세월이지만 50대의 다 망가진 몸으로 30대에 치던 골프
실력을 그대로 바랬던 내 자신이 더욱 한심스러워 지는 순간이다.
문득 노래 제목 하나가 떠 올랐다.
'과거는 흘러 갔다'
2.
1989년 어느 날,
미국에서 대학 동기놈 하나가 귀국했다. 8년 전 내 결혼식 사회를 보고
그 날 바로 미국으로 돈 벌러 간다고 떠난 대학 때 아주 친하게 지내던
동기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돈은 못 벌고 미국 PGA
프로 자격증 하나만 달랑 들고 귀국 했다.
마침 나도 홍콩 사무실에서 한국 사무실로 잠시 나와 있던 때여서 연락이
닿았다.
그러던 얼마 후,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갔다.
압구정동 허름한 한 건물 지하에 '실내 골프 연습장'을 만들어 놓고 나를
불렀던 것이다.
"골프 연습장 할라꼬?" 내가 물었다.
"응, 당분간... 한국에서 할일도 별로 없고...니도 심심하면 놀러 와라"
그 날 이후로 그곳으로 자주 놀러 갔다.
어느 날 골프채 하나를 나에게 주더니 일주일간 가지고 놀면서 헤드무게가
가벼운지 무거운지 느껴 보라고 한다. 7번 아이언 이었다.
속으로 '쓰벌 넘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더구나 골프채를 가지고 놀라니..'
그 친구와 '하네 못하네' 실갱이를 벌이면서 그 일주일을 그 7번 아이언을
가지고 놀았다(?). 볼도 없이 빈 스윙을 주로 하면서...
그 때가 그 친구가 나에게 골프를 가르치기로 마음 먹었던 때이다.
3.
그 후 나는 그 친구에게 얻어 맞아(?) 가면서 골프를 배웠다.
일주일 후 볼 한바구니를 주면서 백스윙을 한 30~40cm만 하면서 임팩트만
톡톡 하면서 치라고 한다. 어쩌다 긴 스윙을 해 볼라치면 뒤에서 골프공을
팔꿈치로 냅다 던졌다. 그 골프공에 팔을 맞으면 골프채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쓰벌 넘이' 속으로 욕이 절로 나왔다.
또 일주일이 지나면 백스윙을 60~70cm 정도로 더 늘리고...
그런 식으로 해서 7번 아이언 풀스윙을 약 한달 후에나 한 기억이 난다.
풀스윙이 흐트러지면 또다시 짧은 스윙으로 돌아가고.. 재미도 별로 없었고
어려웠다. 7번 아이언 풀스윙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히기 까지 약 2개월이
걸렸다.그 후 8번,9번 그리고 롱 아이언...
저녁에 연습 마무리할 때 쯤이면 둘이서 '퍼팅'으로 짜장면 내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딱 한번 짜장면을 산 적이 있고 전부 내가 샀다. 내가 산 짜장면
수십 그릇은 내가 그 친구에게 낸 골프 레슨비 였다.
약 3개월 후에 드라이버를 잡았는데 약 2~3주간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때 연습실에 갔는데 왠 얼굴 새까만 남자 한명이 친구와
연습실 소파에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나를 보더니 대뜸
"야! 오늘 니 머리 올리러 가자!"
"나 아직 자신 없다"
"오늘 여기 최프로님하고 라운딩하러 갈 건데 니도 같이 가자"
강제로 떠밀리다시피하여 친구의 스텔라차로 용인 근처 한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 날 친구, 최프로란 사람과 같이 3명이서 라운딩하면서 머리를 올렸다.
라운딩이 끝나고 술집에서 통 성명을 했는데 그가 '최상호' 프로 였다.
3명 모두 동년배 였다. 압구정동에서 골프샵을 하고 있던 최상호 프로가
근처에서 실내 골프연습장을 하던 내 친구를 알고 찾아 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 최상호 프로가 친구의 골프 연습장을 자주 들락 거렸다.
그 날 나는 96타, 친구 71타, 최상호 프로가 75타를 쳤다.
그 후로 나는 친구가 라운딩을 같이 가자고 하면 필드에 졸졸 따라 나가곤
했는데 훗날 알고 보니 대개가 한국 프로들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니 프로들 라운딩하는데 비기너가 주책없이
끼었던 것이다.
그 프로들이야 내 친구보고 라운딩을 하였겠지만 내 친구가 나를 데리고
다녔으니 내가 비록 비기너라 하더라도 그들이 친구에게 차마 뭐라 말을
못하였던 것이다.
나 또한 그때는 내 친구가 그들보다 골프를 잘 쳤기에 그들이 한국의 프로
들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우러러(?) 보이지가 않았다.
한 두번을 제외하곤 항상 내 친구가 그들보다 4~5타를 잘쳤다. 심지어
10타 이상 차이날 때도 있었다.
4.
나와 단둘이 라운딩할 때나 한국 프로들과 같이 라운딩할 때나 친구는 표정이
별로 없었다. 무덤덤 했다. 그냥 골프를 잘 쳤다.
어느 날 라운딩이 끝나고 강남 제일생명 뒤 한 술집에서 둘이서 기분이 좋아
대취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물었다.
"니 와 미국 PGA 프로라고 얘기 안했노?"
"그냥 하기 싫어서.. 자랑할 거도 못되고..."
그날 밤 친구는 어렵게 고백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 흑인 부부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 갔었는데
흑인 여자의 생리대까지 치웠다고 했다.
혼자 있는 밤에 이런 저런 잡 생각도 없앨 겸해서 골프연습장을 드나 들었는데
그 골프연습장 주인이 미국 PGA 프로였는데 친구를 잘 봐서 공짜로 친구에게
골프 레슨을 해 줬다는 것이다.
나중에 친구가 그 미국 PGA프로 보다 골프를 잘 치게 되어서 그 프로가 친구
에게 미국 PGA 프로 테스트에 응시하게 하였다. 친구가 골프를 시작한지 약
3년 만에 미국 PGA 프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돈도 없고 스폰서 같은 것도 없어 미국에서 골프로 밥 먹고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가 1985년도 경 이었는데 돈이 없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냥 골프만 잘 쳤을 뿐이란다.
더구나 아시아인이 골프 좀 잘 친다고 아무도 봐 주는 사람도 없었고...
젊어서 미국에 가서 고생 좀 하면 돈 좀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싶어 갔지만
흑인 보다도 더 못한 멸시를 받아 가면서 일 거리라곤 남자 가정부 또는
노가다 뿐이 없고 정규직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냥 꿈이었다.
그 후 결혼에 실패하고 미국에서의 생활이 진저리쳐질 때 미국 PGA 프로
자격증 하나만 가진 채 한국으로 귀국하였던 것이다.
친구가 1981년 12월 3일 내 결혼식 사회를 해주고 그 날 바로 미국으로
떠난 지 만 8년 만인 1989년 이었다.
5.
한창 골프에 재미를 붙여 친구따라 라운딩 다니던 어느날 홍콩 사무실에서
팩스가 왔다. 중국 심천 공장에서 우리 오더를 놔두고 다른오더를 생산라인에
물렸다는 것이다. 납기가 2달 이나 지연 된다는 내용이었다.
15만불 짜리 미국 오더인데 꽤 중요한 오더였다.
이틑날 바로 홍콩으로 갔다. 그 날 이후로 내가 20년 동안 골프채를 놓게
될 줄은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일주일 예정으로 갔던 것이 홍콩과 심천에 4개월 가량을 오가면서 머물게
되었다. 일이 꼬여서 홍콩 사무실을 뜰 수가 없었다.
종종 한국 친구 골프 연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쓰던 골프채를 다른
대학 동기넘이 쓰고 있단다. 약 2개월 뒤에 내가 홍콩에 계속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 그냥 그 다른 대학 동기넘에게 내 골프체를 계속 쓰라고 줘버렸다.
홍콩으로 들어온 지 약 4개월 후에 미국 PGA프로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압구정동 실내 골프 연습장을 그만 둘 작정이라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운영
하는데 영업 타산도 안 맞고 빌딩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고 한단다.무슨 술
도매 창고로 쓴다고...
그리고 자기는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며칠 후 부랴 부랴 한국으로 들어 왔다.
밤에 술집에서 친구와 둘이 앉았다.
실내 골프 연습장도 하나의 장사인데 친구는 장사 수완도 별로 없고 고객들에게
싹싹하게 잘 대하지도 못해서 가게 주인(?)으로서는 별로 였다. 그리고 그 때는
골프 인구도 별로 많지 않아서 실내 골프연습장으로서는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친구는 자기가 골프를 잘 치는 것에 대한 그리고 미국 PGA 프로 골퍼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골프를 가르쳐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기대도 안 했던 것 같았다.
고생이 되고 힘들어도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아무런 충고도 도움도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냥 술잔만 비웠다.
그날 밤 친구는 미국에 다시 들어 가면 골프는 더 이상 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일만 할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각오' 또는 '결심' 같은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 갔고 친구는 그 후 약 한달 후 미국으로 다시
들어 갔다. 그리고는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오늘날까지 소식이 없다. 미국에 있는 몇몇 지인을 통해 수소문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친구가 나에게 소식이 없다는 것은 미국에서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리고 그 친구는 그의 말대로 더 이상 골프를 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사업상 골프채를 다시 잡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도 불구
하고 나 또한 골프채를 다시 잡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늘까지 20년이 흘렀다.
6.
그 친구가 다시 미국으로 들어간 몇년 뒤 서울 강남에 실내 골프장이 수도 없이
들어 섰다. 그리고는 골프 열풍이 불었다. 1998년 박세리가 미국 LPGA US오픈
에서 우승한 뒤에는 한국에 골프 '광풍'이 불었다.
강남 여기저기에 프로랍시고 골프를 가르치는 소위 무슨 무슨 '프로'라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이 정말로 '프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눈에는
나의 친구, 그 만이 오로지 '프로'였을 뿐이다.
요즈음 한국의 어마어마한 골프 사업과 시장을 보면서 나는 20년 전의 내 친구가
고뇌하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7.
20년만에 다시 골프채를 잡으니 그 친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나이에 골프를 잘 칠려고 다시 시작 하겠는가? 좋은 벗들과 푸른 잔디 위를
걸어면서 흐르는 세월을 잠시라도 잊고 싶고 쇠해지는 육신을 조금이라도 붙들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이렇듯 다시 골프채를 잡듯이 내 친구도 세상 어디에 살던지 그 고단한 삶을
잠시 내려 놓고 다시 골프채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면 누가 아는가?
세상 어느 골프장에서 그와 내가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앞으로 10년이 흐르든.. 20년이 더 흐르든.. 언젠가는 말이다.
끝.
PS: 나의 골프채로 골프를 시작한 또 다른 대학 동기넘이 지금 싱글을 친다.
그것도 '짠' 싱글인 75~6 타를 친다. 골프채를 놓지 않고 20년 동안 꾸준히
골프를 친 때문이다. 요즘 한국의 젊은 프로들과 라운딩을 다닌다고 한다.
상전벽해이다. 삶이 순탄해야 골프도 순탄한가 보다.
첫댓글 백수님 글잘일었읍니다. 글 속으로 잔잔히 흐르는 친구의 우정과 골프에 대한 인연을 잘 보았읍니다. 일이랑 것이 어쩌면 우연히 시작된다고 생각되어도 어찌생각하면 필연이 될수 있는 것 같아요. 좋은글 감사하며 종종 글 올려주세요 ^^*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번뱉은말과 엎질러진물과 흘러간세월은 줃어담을수가없습니다 하지만 흘러간 세월의 뒤안길을 돌아보며 추억할수있는 지금이 바로 인생의 황금기 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몸과 마음으로 푸른잔듸를 밣으며 골프를 칠수있기를 항상 바랍니다
열심히 연습하여 하루 빨리 필드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발을 담그셧으니 기대가 마니 됨니다,..
랏에 변화를 만드세요....
감사합니다. 아직 아이언 임팩트 '감'도 못 찾았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