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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동쪽임금_최동군
아빠 : 이 곳이 고려말의 충신 최영 장군의 묘야. 너는 최영 장군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뭐지?
딸 : 그야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유명한 명언이죠.
사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명언은 최영 장군의 말이 아니라 사헌규정(司憲糾正) 벼슬을 지낸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임종시에 어린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고려사> 열전 최영(崔瑩)편의 거의 말미 부분에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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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최영 편의 일부 발췌
初瑩年十六, 父臨終戒之曰, “汝當見金如石.” 최영의 나이 열여섯 때 부친이 죽었는데 임종 때에, “너는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瑩佩服, 不事産業, 居第甚隘陋, 處之怡然. 최영이 그 유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거처하는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服食儉素, 屢至空匱, 見乘肥衣輕者, 不啻如犬豕. 의복과 음식이 검소했으며 쌀궤가 늘 비었지만 살진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는 자들을 보면 개나 돼지만도 여기지 않았다.
백과사전을 참고하여 최영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주(철원)이고, 시호는 무민(武愍)이고,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우왕은 그의 서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이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조선 초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 염흥방을 제거하였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딸 : 와,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면, 얼마든지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을 덴데, 참 훌륭하신 분이군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최영의 <사람됨>이다. 역사를 통털어 정치적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간 사람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최영과 같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런 최영의 사람됨은 역시 부친의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고려사에 언급된 최영에 대한 평가를 좀 더 살펴보자.
비록 장군과 재상을 겸직하고 오래 동안 병권을 장악했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항상 큰일에만 신경을 써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군사들을 지휘했으나 휘하의 사졸 가운데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고려사>는 고려왕조 스스로가 기록한 역사책이 아니라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의 건국주도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자신의 역사관을 가지고서 만든 고려왕조에 대한 역사서다. 따라서 철저히 고려를 부정하는 조선의 관점에서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국부(國父) 이성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최영에 대한 평가가 위와 같다는 것은 최영의 사람됨이 정말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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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 에도 최영의 이야기가 한대목 실려있다. 고려의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의 저택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를 열고 진기한 음식을 대접하며 사치를 부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영도 언젠가 재상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는데 한낮이 지나도록 아무 음식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쌀밥도 아닌 기장쌀을 섞어 지은 밥에다 잡다한 나물만을 차려서 가져왔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다 지쳐서 배가 고팠던 재상들은 그것도 마다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고는 "최영의 집에서 먹은 음식이 여지껏 먹었던 어떤 산해진미보다 가장 맛있다"며 칭찬했고, 최영은 웃으며 "이것도 병사들을 부리는 한 방법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딸 : 최영에 대한 설명 중에서 이인임을 멀리했고 또 제거했다는 말까지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길래 두번씩이나 이름이 등장하나요?
이인임(李仁任, ? ~ 1388년)은 고려 말의 권신으로 한때 정권을 잡고 매관매직 등 전횡을 일삼다가 그 횡포에 격노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실각당한뒤 곧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은 자신의 이름보다 종계변무(宗系辨誣)라는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럼 종계변무란 무엇인가? 이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명나라 측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 즉 종계(족보)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이다.
고려말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와 이초는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음해공작을 펴는데 이때 이성계의 가계(家系)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꾸며댔다. 그 뒤 명나라는 그 이야기를 믿고, 그것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는 1394년에 와서야 명나라측 공식기록물에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국초부터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으로서 이 문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지 않고 이를 빌미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선조때에 가서야 역관 홍순언의 활약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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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 문제가 풀리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역관 홍순언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주(通州) 부근에서 죽은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돈을 달라는 미모의 여자를 측은히 여겨서 그만 공금을 내어주고 말았다. 물론 홍순언은 귀국후 공금을 유용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돈을 받은 여자는 명나라 조정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고, 그녀와 석성은 조선 사신들이 올 때마다 홍순언의 안부를 물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조정에서는 홍순언을 풀어주어 사신을 따라가게 했는데 이때 석성의 노력으로 200년 묵은 종계변무의 한을 풀 수 있었다.
아빠 : 우리 한번 최영 장군의 비석내용을 읽어 볼까?
딸 : 네? 이렇게 한자 투성이인 비석을 어떻게 읽어요?
한자로 된 옛날 사람의 비석을 읽을 때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최소한 묻힌 사람의 이름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석의 제일 마지막 부분은 대체로 XX지묘(之墓)로 끝난다. 누구누구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 앞의 글자가 무덤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름을 홍길동(洪吉童) 처럼 쓰지는 않는다. 성과 이름을 분리하되 성 다음에는 공(公)자를 쓰고, 이름 앞에는 휘(諱)자를 쓴다.
홍길동을 예를 들어보면 홍공 휘길동(洪公諱吉童)처럼 쓴다. 여기서 휘(諱)는 피한다는 뜻이다.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살아있는 분의 이름을 말할 때는 절대 휘(諱)자를 쓰면 안된다. 큰 실례다. 대신 함(銜)자를 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존함을 여쭤봐도 되나요?" 하는 식으로 물어봐야 한다.
이름 앞의 모든 내용은 그 사람이 평생동안 거쳤던 관직이 대부분이다. 이 부분은 띄어쓰기만 잘 하면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최영 장군의 비석내용을 살펴보면 철원부원군까지는 모두 관직이름이고 시호가 무민(武愍)이며 본관이 동주(철원)라는 뜻이다. 그 다음은 부인이 왼쪽에 묻혀 있다는 뜻이다.
高麗 盡忠奮佐命安社功臣 判密直事 大將軍 門下侍中
고려 진충분좌명안사공신 판밀직사 대장군 문하시중
贊成事 六道都巡察使 鐵元府院君 謚武愍 東州崔公 諱瑩之墓
찬성사 육도도순찰사 철원부원군 시무민 동주최공 휘영지묘
三韓 國大夫人 文化柳氏 祔左
삼한 국대부인 문화유씨 부좌
딸 : 아빠, 최영 장군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같은 것은 없나요?
최영 장군에 얽힌 설화는 꽤 많다. 그 중 하나는 충북 보은에 전해 내려오는 말무덤과 말채나무 이야기다. 최영 장군에게는 무예를 배울 때 항상 타고 다니면서 애지중지 하던 말이 있었는데 큰 뜻을 품고 당시 수도였던 개성으로 떠나기 전에 말의 주력을 시험하려고 화살을 쏨과 동시에 채찍질을 하면서 목적지로 말을 전속력으로 몰았다. 하지만 목적지에는 이미 화살이 꽂혀 있었다. 이에 최영 장군은 너 같은 느린 말로는 도저히 큰 뜻을 펼칠 수 없겠다면서 단 칼에 말의 목을 쳤는데 그 때 화살이 날아왔다. 꽂혀 있던 화살은 전날 연습할 때의 화살이었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크게 후회하면서 말을 묻었는데 그것이 말무덤이고 채찍을 땅에 묻었는데 거기에서 잎이 나와 나무가 된 것이 말채나무이다.
또다른 하나는 최영 장군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고 혼인승낙을 받으러 함께 최영 장군에게로 왔다. 그런데 최영 장군은 훌륭한 사윗감을 고르기 위해 자기가 먼저 재주를 보여주면서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했다. 최영의 재주는 다름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을 자르고 나서 떨어진 목을 다시 붙여서 소생하는 것이었다. 이때 딸은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면 자신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떨어진 아버지의 목에 매운 재를 뿌려 아버지의 목이 다시 붙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최영 장군의 신비스런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의 최후를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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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중에서 근심할 민(愍) 자가 들어간 사람은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게 많이 쓰인다.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 장군의 시호는 무민(武愍)이며, 간신 김자점에게 죽은 임경업 장군의 경우도 충민(忠愍)이다. 어이없게 암살당한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고,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죽은 것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혼을 제사 지내던 곳으로 홍제원 근처에 있었다.
한편 전국 곳곳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맞아 싸워서 항상 이겼던 최영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대단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최영과 관련된 일부 지명과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민간신앙이다.
앞서 말한 충북 보은의 말무덤 말채나무 이외에도 부산에는 감만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18세기의 기록물에는 감만동을 `감만이(勘彎夷)` 로 표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감(戡)은 물리치다라는 뜻이고, 만이(彎夷)는 동쪽과 남쪽의 오랑캐(동이,서융,남만,북적) 즉 왜구란 뜻이다. 따라서 감만동은 왜구를 물리친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감만동에는 무민사(武愍祠)라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최영 장군의 시호에서 이름이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에는 감만동의 무민사 외에도 수영성 동문 밖에도 무민사가 있고 자성대 공원에도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어서 왜구를 섬멸한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굳이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이유 중의 하나를 <동국여지비고> 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깨끗하고 (세금)징수를 하지 않아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숭배한다"고 하였다.
제주도에도 최영 장군과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곳이 있는데 바로 외돌개다. 고려때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고인(蒙古人)인 목호(牧胡)들 3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범섬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최영 장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시켜 놓고 최후의 격전을 벌였고, 목호들은 외돌개를 대장군으로 알고 놀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목호의 난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다.
고려말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혔던 왜구들은 최영 장군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고 한다. 한번은 최영 장군이 왜구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어떤 어린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오자, 장수들이 아이를 불러서 적의 동태를 물었는데, 이 아이는 "왜적들은 오직 머리가 하얗게 센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 즉 최영 장군 만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딸 : 그렇게 훌륭했던 최영 장군이 왜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나요?
최영 장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우선 긍정적인 것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충신중의 충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고단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망해가는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못했고, 또한 중국대륙의 왕조가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이성계 일파에게 불운하게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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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이성계 일파에게 죽임을 당할 때,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실제로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서 세간에서는 그의 무덤을 적분(赤墳)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 고집센 최씨를 가리켜 "최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처형을 당하면서도 의연했다고 <고려사>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처형을 받으면서도 말씨나 얼굴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죽는 날에 개경 사람들이 모두 철시했으며, 멀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골의 여인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으며, 도당(都堂)에서는 쌀,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다.
최영 장군이 죽자 개성의 민심은 이성계에 대한 원한으로 몇 날 몇 일을 통곡했다고 한다. 개성의 백성들에게는 최영은 곧 고려였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최영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위한 사당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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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조랭이떡국
예로부터 정월 초하루에는 흰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고 차례상에 올렸었는데 개성지방에서는 조랭이떡을 만들어 떡국을 끓여 먹었다. 조랭이떡은 제조방법이 일반적인 가래떡을 2cm 정도로 자른뒤 가운데를 눌러서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드는데, 속설에 의하면 대나무칼로 이성계의 목을 조르듯이 비벼서 떡을 썰어 만드는 풍습에서 만들어져 개성의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최영 장군을 죽인 이성계에 대한 고려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한 이야기이다.
최영 장군의 죽음으로 인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지만 개성의 민심은 이성계에 등을 돌렸다. 그 때문에 이성계는 개성에서 내몰려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를 해야만 했다. 최영 장군은 사후(死後) 한반도 무속인들 사이에 최고의 숭배대상(장군신)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삶이 청렴하고 군율이 엄정하였다는 점에서 영험하다는 것과 그가 이성계에게 죽음을 당한 영혼이 너무도 억울해 원혼이 되어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된 것이다. 반면 이성계는 비록 조선을 건국하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렸다.
딸 : 불쌍한 최영 장군... 이 곳의 숨은 사연은 참 우울하네요. 기분전환을 겸해서 좀 색다른 사연이 있는 곳은 없을까요?
아빠 : 음... 좀 색다른 사연이라... 아! 반전 드라마 같은 사연이 있는 곳이 한군데 있어. 다음번 코스는 반구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