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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TV기능 정기…"암흑의 광주"
중앙지배달·지방지발행·방송전파 중단 보안사[언론대책반] 도청상주 검열 강화
전일·전매등 [언론수호] 경의대회도 물거품…시민들 자위 [투사회보] 출현
계엄사는 5·17전국비상 계엄확대조치와 함께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한다. 여기에는 언론 출판 보도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필수조항으로 자리잡고 있다.
계엄당국은 그러나 이미 10·26직후의 비상계엄포고령 제1호에 보도검열지침을 포함시킨바 있어 언론의 사전검열은 벌써 6개월째 행해져 온 관행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터진 광주의 유혈참극은 항쟁4일째인 21일까지는 단 한줄도 제대로 보도되지 못하다가 5일째인 22일에야 비로소 보도되기 시작한다. 그나마 이날부터 광주의 실상을 게재한 중앙지는 항쟁이 끝나는 날까지 배달불능, 지방지는 발행중단 (21일부터), 방송은 전파송출 불능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시민들은 입과 귀를 통해서만 사건의 목격담과 혹은 체험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자연 유언비어 (?)가 무성하게 발생하는 상황에 직면하다.
유인물 대량 나돌아
보도기능이 4일째 마비되자 정부및 계엄당국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하는 전단과 [투사회보]등 시민들이 만든 유인물만이 대량으로 나돌아 유일한 보도매체구실을 한다.
유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한 날은 19일로 광주 시민민주투쟁회 명의의 호소문과 조선대민주투쟁회명의의 민주시민아 일어서라등 2종이 선을 보인다.
또 항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기관과 기자들이 수시로 공격의 대상이 돼 카메라를 탈취당하고 부상을 입기도한다. 이와중에서도 외신기자들은 시민들로부터 어떠한 공격도 받지않아 외신만이 제대로 현실을 반영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아이러니칼한 정황이 아닐수 없다.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던 언론기관을 살펴보자. 먼저 신문은 광주지역 양대일간지였던 전남일보와 전남매일기자들은 5월13일 맨먼저 시내 광산동사옥 2층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결의대회를 개최한다.
결의대회는 전남매일언론투쟁위원회위원장 양부량차장과 언론투위간사 박행강기자가 주축이 돼 민주주의와 언론수호를 내용으로 한 4개항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끝을 맺는다.
이어 15일 전남일보와 전일방송(VOC)기자들도 금남로1가 전일빌딩사옥에서 투쟁위원회를 결성, 윤효춘 투쟁위원장과 나의갑 기자 (간사)등이 비상계엄해제, 언론자유등보장등 5개항으로 된 [자유언론실천을 위한 우리의 자세]를 낭독하고 군부와 일전불사태세를 갖춘다. 이밖에 KBS MBC CBS등 방송3사 기자 30여명은 16일 기독교방송국이 입주해 있던 가톨릭센터에서 언론수호결의대회를 갖는다.
지역언론사기자들의 잇따른 결의대회 움직임은 비상국이 임박했음을 예고하는것이었지만 일반시민들은 그 누구도 이같은 사태에 주목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다시 10·26직후부터 설치된 도청2층의 언론검열반의 간섭이 4월들어서부터 유난히 심해져 불길한 예감을 갖고있던 터였다.
걸열이 심화된 시점인 4월은 [보안사 언론대책반]이 가동을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상*준위가 팀장을 말은 보안사언론대책반은 전남의 경우 화정동 소재 505 보안대 박기정상사가 지역팀장을 맡고 전교사와 31사단 정훈장교 3∼4명이 도청에서 상주하며 언론의 목줄을 죄기 시작한다.
보안사대책반은 권정원정보처장 (대령) 지시로 정보2과의 언론담당업무를 이관받아 90년4월 탄생, 계엄사의 기존 언론검열반을 장악하며 검열을 주도해나간다.
보안사의 언론대탄압책동을 간파한 지역언론계는 5월들어 곧바로 반발움직임을 보였으나 신군부의 시퍼런 서슬아래서 이는 곧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때 광주에서 활약하던 중앙지주재기자들은
▲조선일보=위정철 박동명 서광흠
▲동아일보=김영택 신광연 홍건순 김춘옥
▲중앙일보=황영철 서일근 김국후
▲경향신문=김영서 이기홍 정건조
▲서울신문=정일성 임정용
▲신아일보=이성용 이길도 이수남씨 등이다.
방송은 KBS MBC 그리고 전일방송 (전남일보의 자매사·80년이후 종방)과 CBS등이 활약한다.
외신기자 열띤 취재
그러나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철저히 검열을 당하던 언론기관들은 손발을 꽁꽁 묶인상태에서도 본연의 취재업무는 포기하지 않아 기자들이 남긴 취재일기가 훗날 광주항쟁을 재정리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것이 사실이다.
대다수 중앙언론사들이 본사기자들을 광주로 내려보냈으며 지방언론사와 AP통신 ABC CBS NHK등 외신기자들이 가세해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인다.
당시 AP통신기자로 광주에 온 해리 앤더슨은 카터행정부시절 베이루트에서 수년동안 인질로 억류돼 레이건행정부때 석방된 인물이며, 불티모어선지의 동경특파원으로 있다 광주로 급파된 브애들리 마틴기자 이였다.
광주로 급파된 브래들리 마틴기자는 이때의 인연으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때 동아일보기자였던 윤재걸씨는 다큐멘터리-그 비극의 10일간을 주내용으로 한 [작전명령 - 화려한 휴가]를 발간했고, 조선일보 광주주재 위정철기자는 [내가 겪은 5월의 광주]제하 장문의 기사를 월간조선 88년5월호에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20일부터 모든 시민이 합세, 민중항쟁으로 치달으며 방송국이 불타고 21일에는 외부와의 통신두절, 교통차단으로 광주는 육지속의 섬처럼 완전고립 상태에 빠지게 된다.
계엄하에서 사전검열을 거친 신문과 방송이나마 당장 보고 들을 수 없게 되자 시내엔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민대상 선무방송
광주항쟁의 유혈진압후 전교사가 내놓은 광주소요사태 분석 (교훈집)책자는 [경상도군인이 전타도사람을 모두 죽인다고 했으나 광주시내거주 영남출신자 및 군인가족 피해는 전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거꾸로 광주시민들이 항쟁전기간을 통해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행동하지 않았음을 군 스스로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시민들은 일부 악성유언비어에 현혹되고 우롱을 당했으나 실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 이미 언론을 장악한 군은 언론을 통해 분노한 시민들을 달래는 [선무방송]을 하면서 그들 스스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결국 이는 유언비어보다 더한 역작용을 하고 있다.
일례로 전남·북계엄분소가 MBC오후7시뉴스를 통해 20일 발표한 성명은 급기야 방송국의 방화사태를 촉발하기에는 이른다.
사실상 MBC는 19일에도 일부 화염병세례를 받았다. 항쟁발발이후 군의 첫공식 담화문이었던 당시 보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광주시민여러분! 지난 18일과 19일의 소요진압과정에서 연행된 학생과 일반인은 군에서 잘 보호하고 있으며 그중 가벼운 범법자와 잘못을 반성하는 일부 학생을 석방조치 했으며 (중략) 소요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일부 부상학생은 정성껏 치료를 받고 있다. 중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담화내용중 [부상학생의 치료와 중상자는 없다]는 부분에서 분노가 폭발, 이날밤7시께부터 MBC로 몰려가 화염병방화로 분풀이를 한다. 이어 다음날 새벽 광주역앞에 있던 당시 KBS도 불길에 휩싸이고 21일 밤9시45분에는 가톨릭센터에 있던 CBS에도 일단의 시민들이 침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는등 언론사들이 잇따른 수난을 당한다. (시청상황일지)
KBS·MBC 방화
이에앞서 19일 계림동 계엄군 장갑차의 첫 발포상황을 취재하던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 김영택씨는 오후6시께 광고앞에서 시위대에 둘러싸인 장갑차가 오도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한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취재하다 취재차마저 발길에 채이고 똑바로 보도하라는 군중의 호통을 받는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내용. [성난 시위대가 장갑차를 파괴하려하자 장갑차 선탑자가 고립됐으니 본대에 이 사실을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사고경위를 파악하고 군중들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시위대가 취재차를 붙들고 동아일보도 각성하라며 카메라를 넘길것을 요구하고 발길질을 했다. 이때 장갑차에서 자동소총으로 발포를 해 군중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 틈을 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당시 고등학생 1명이 총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이날 광주로 날아온 불티모어선지의 브래들리 마틴씨는 [광주에서의 경험은 병적인 슬픔과 혐오감이 전부였다. 당시 군부의 폭력규모는 너무 커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내 인생에서 이처럼 많은 시체를 본것은 처음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지하든 당시 광주 전남사람들은 5월 한동안 신문이 사라지고 TV와 라디오가 꺼진 암흑속에서 오직 눈과 귀로 정보를 전달하고 서로를 확인한다.
첫댓글 잘읽어씁니다.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