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메콩넷"(www.mekong.net)의 운영자인 미국 언론인 브루스 샤프(Bruce Sharp)가 저술한 것으로,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사망한 사람들의 수에 관해 연구한 이전의 주요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내용이다. 이 논문은 2005년에 "메콩넷"에 게시된 후 2008년에 다시 업데이트된 것이다. (☞ 원문보기)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상편을 먼저 읽으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라.
[바로가기] "[논문] 크메르루즈가 죽인 캄보디아 사람의 규모 (상)" |
지옥의 계산
크메르루즈가 죽인 캄보디아 사람의 규모 (중)
Counting Hell
저자: 브루스 샤프(Bruce Sharp)
추정치들의 평가
앞에서 살펴본 총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치들은 각각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여 도출한 것으로, 그 결과 역시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1. 인구센서스 데이타를 이용해 재구성한 것: 74만 명 (Vickery) 2. 난민들에 대한 무작위 인터뷰 조사: 167만 명 (Kiernan) 3. 가가호호 조사 및 법의학적 추정치 : 300만명 (PRK 정권 및 DC-Cam 매핑 프로젝트)
4. 인구통계학적 경향 및 코호트(cohort) 집단 분석: 200만 명 (Heuveline) |
먼저 마이클 빅케리(Michael Vickery)의 추정치부터 살펴보자. 그럴듯한가?
빅케리의 추정치는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에서 수행하는 매핑 프로젝트(mapping project)의 데이타와 분명하게 불일치하고 있다. 매핑 프로젝트의 연구를 정리한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의 보고서는 1999년 현재까지의 자료들을 포괄하고 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사업으로, 가장 최근에 발표된 개요를 보면, 이전의 통계치들도 다시금 개정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DC-Cam이 확인한 집단매장지의 사망자 수는 111만 2,829명에서 138만 6,734명으로 다시 개정된 상태이다.(주52) 따라서 --- DC-Cam은 이 집단매장지의 희생자들이 주로 처형을 당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는데 --- 집단매장지의 희생자 수만 해도, 벌써 빅케리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에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사망자 총수로 추정한 수치(74만명)보다 많은 상태이다.
DC-Cam이 집계한 집단매장지 희생자 수는, 빅케리가 "캄보디아 내전" 및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희생자 수를 "합쳐서" 계산한 것보다도 많다. 아마도 전투 중 사망한 사람들은 이 집단매장지에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질병이나 영양실조 등등으로 사망하여 직접적으로 전쟁으로 인하지 않고 사망한 사람들도 집단매장지에 묻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가장 최소치로 추정한 경우(빅케리의 추정치)를 제외한다면, 가장 최대치의 추정치는 어떤 것인가? 만일 DC-Cam이 주장한대로 처형자 수가 130만명에 달한다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가 추정한 330만명의 사망자 수는 정확한 것일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
에치슨은 PRK의 조사가 방법론적으로 여러 오류들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가호호 방문조사에서 얻어진 사망자 수는 대량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들 수와 관련을 맺었다. 하지만 대량매장지에 묻힌 어떤 희생자가 가족들이 보고해준 사망자 수에 포함됐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연구진이 동일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복수의 가구에서 보고됐다는 실제 사례를 통해 증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사망은 자신의 친가와 처가 양쪽 모두에서 보고됐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죽었다고 믿어서 보고했던 사람이 해외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 가령 어떤 가족의 경우 가가호호 방문조사에서 보고해 줄 구성원 단 1명도 남지 않은 채 모두 다 사망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중에 짧게 논의하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망자 수가 300만명을 넘는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또다른 증거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현재 가장 널리 수용되는 추정치는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벤 키어난(Ben Kiernan)의 추정치로 최대치를 167만명으로 보고 있다. 물론 상당히 다양한 추정치들이 존재하야 종종 의문시되기도 하지만, 키어난의 추정치는 주로 사망률 추정을 통해 얻은 것으로, 1975-1979년 사이의 인구추정치 사이에서 대략적으로 뽑아낸 것이다. 키어난의 추정치는 휴블린(Heuveline)이 분석한 범위에도 대략 맞아 들어간다. 하지만 키어난의 추정치는 휴블린이 제시한 "가장 그럴법한" 추정치보다는 상당히 적은 추정치이다. 그리고 법의학적 증거들의 바탕 위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도 너무 적은 수를 보이고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을 지적한다면 키어난이 추산한 "신 인민"(old people)과 "구 인민"(new people)의 수가 부정확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키어난은 신 인민의 수로서 253만명의 도시출신 인구를 포함하여 총 305만명을 제시했다. 그가 이렇게 추정한 것은 피난민들을 포함한 당시의 프놈펜 인구를 180만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암 쇼크로스(William Shawcross)는 당시 프놈펜 인구가 200만명 이상이었다고 말하고, "그 중 거의 절반 가량은 안전한 곳을 찾아왔던 피난민들"이라고 덧붙였다.(주53) 또한 조지 힐데브랜드(George Hildebrand)와 개럿 포터(Gareth Porter)는 프놈펜 인구가 대략 300만명 가까왔을 것이란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주54) 키어난의 추정치는 심지어 여타 도시들의 인구를 추가한다고 해도, CIA가 <캄푸치아: 인구학적 대참사>에서 1975년도의 캄보디아 도시지역 인구로 추정한 400만명보다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주55)
키어난은 도시지역 주민들의 사망률을 25%로 잡았고, 농촌인구 사망률을 15%로 잡았다. 하지만 만일 도시인구에 대한 좀더 많은 추정치, 즉 "신 인민" 수를 300만명이 아니라 400만명으로 잡는다면, 총 사망자 수는 177만명이 된다. 하지만 신 인민의 수를 키어난이 제시한 수보다 높게 잡는다 할지라도, 어느쪽이 더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고, 우리가 가진 근거들 하에서는 양쪽 추정치 모두 여전히 가능한 상태이다. 하지만 키어난의 추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또다른 요소가 있다. 즉 키어난의 조사방법은 미묘한 흠집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복합적으로 계산하는 사망률이란 언제나 원래의 사망자 수보다 "낮게 책정된다"는 것이다.
키어난이 시도했던 방법, 즉 최초에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하여 그들 가족 중의 사망률을 근접하게 추정한 후 전체 인구에 대해 그 사망률을 적용시켜 보는 방법은 비교적 합리적 방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휴블린(Heuveline)도 지적한 바 있듯이, "사망률 위기가 발생한 직후에 보조자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연구자 혼자 조사할 수 있던 방법으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보다 심도있고 자금이 많이 투여된 여타 방법에 비한다면 가치가 떨어지는 추정치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주56) 비록 사망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긴 했지만 키어난의 조사방법은 나름의 합리적 요소를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특정 그룹 속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가 비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가족들 내의 사망자 수에 대해 생각해보자. 먼저 일가족 전체가 몰살을 당한 경우엔 이 조사대상에 포함될 수가 없다. 즉 그러한 사실을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또다른 주된 문제점이 남아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정권 붕괴 후의 조사에서 더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살아남은 가족들의 의견이 더욱 많이 반영됐을 것이란 점이다. 따라서 이 점은 이들 조사결과가 사망자 수를 상당히 낮게 잡도록 만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이 점을 알기 위해, 가상의 사례 하나를 검토해보자. 우선 3천명이 거주하던 마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지 추정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먼저 50명의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그 가족 내 사망자 수를 질문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 마을의 사망률이 전반적으로 일정하게 분포되지 않았을 경우엔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이 마을의 각 가구별 평균 구성원 수를 10명으로 잡고, 이 마을에 300가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중 150가구에서 가구당 3명이 사망했다고 치고, 나머지 150가구에서는 가구당 1명씩 사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총 사망자 수는 600명이 된다. 따라서 최초 조사방법인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샘플링에서, 절반의 가구는 3명씩 사망했고 나머지 절반의 가구들에서 1명씩 사망했다는 결과가 나왔을 경우에는, 평균적으로 가구당 2명씩 사망한 것이 되어 실제의 사망자 수와 일치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우리가 모든 생존자들을 조사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단 50명의 생존자만을 조사한 후, 이들 샘플(표본)집단이 전체 집단을 정확하게 반영해줄 것이라 가정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이 우리가 상정한 마을의 상황에도 적합할 것인가? 이 마을의 생존자는 2,400명이고, 그 중 1,350명은 가구당 1인씩 사망한 가족 출신이며, 가구당 3명이 사망한 가족 출신 생존자는 1,050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인터뷰조사를 할 경우 양쪽 그룹을 공정하게 절반씩 조사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마도 가구당 1명씩 사망한 가구 출신의 생존자들을 더 많이 조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1,350장 짜리 제비와 1,050장 짜리 제비를 섞어두었을 때 어느쪽 제비가 뽑힐 가능성이 더 높은가 하는 것이다. 동일한 원칙은 무작위 표본조사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 인터뷰조사에서는 더 적은 수의 사망자를 가진 가족 출신 생존자들이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망자 수가 증가될 가능성에 대해 많은 반향을 던지는 것이며, 특히 특정한 가족에서 사망자 수가 집중적으로 발생했을 경우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상정했던 마을에서 사망한 600명이 300가구 중 75가구에만 집중해서 사망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럴 경우엔, 생존자 2,400명 중 2,250명이 가족 중 아무도 사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150명은 자신의 가족 중 8명이 사망했다고 답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사망자가 없는 가구 대 사망자가 있는 가구의 비율이 무려 15 대 1에 달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인터뷰 조사라는 것이 정확한 추정치를 제공해줄 리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참사 직후에 행한 무작위 조사라는 것은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생존자들이 전체 위기국면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인구구성을 반영하지 못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목표로 하는 인구집단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접근하는 것일 수 있다.
혹자는 키어난이 다양한 사회집단들을 개별적으로 조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점을 해명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사회적 그룹이 동일한 역학적 궤적을 가졌다고 브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가구 출신 사람들이 조사에 포함될 가능성이 분명하게 높기 때문이다. 키어난의 무작위 표본조사의 보삽법은 부분적으로 볼 때, 키어난 자신이 선호했던 인구센서스 자료를 "직접적으로" 통계낸 것보다 분명하게 적은 수이다. 키어난의 조사는 167만명 정도를 사망자 수로 보고 있지만, 직접 추정치는 179만 7,000명 정도의 추정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주57)
키어난의 조사가 제시한 사망률이 이미 상당히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사자가 그 정신없는 악몽같은 시기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수용하는 일이 통계학적으로 볼 때는 "복받은 이들"(the lucky ones)만 대상으로 한 것과 유사할 수도 있다. 즉 가족 중 4분의 1을 잃은 사람이 다른 더 많은 사람들보다 행운을 가졌던 경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은 키어난의 추정치가 에치슨(Etcheson)이나 휴블린(Heuveline)의 추정치보다 적은 것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그 이유를 제시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휴블린의 추정치에 대해서도 우리는 질문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즉 만일 휴블린의 추정치를 키어난의 추정치를 검토하는 잣대로 사용한다면, 휴블린의 추정치가 정확하다는 타당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필자는 휴블린의 가정을 논박할만한 상당한 이유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그 결론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키어난의 추정치는 그보다 더욱 많은 문제가 있다. 키어난의 추정치는 법의학적 증거를 통한 추정치나 가능성의 법칙을 통한 추정치보다 적은 것이다. 게다가 PRK의 가가호호 방문조사 결과 역시 키어난의 추정치가 과소평가됐음을 시사해주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보다 상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주52)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DC-Cam), "Master Genocide Site Data", 2003-5-26. "Master Genocide Site Data." 이 보고서의 집단매장지 수는 약간 축소된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일부 매장지들이 중복 계산되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희생자 유해 총수는 전체적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주53) Shawcross, William: The Quality of Mercy, Simon and Schuster, 1984, p.50.
(주54) Hildebrand, George, and Porter, Gareth: Cambodia: Starvation and Revolution, 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1976, p.42.
(주55) Central Intelligence Agency, "Demographic Catastrophe", 1980-1-17.
(주56) Heuveline, Patrick: "The Demographic Analysis of Mortality Crises: The Case of Cambodia, 1970-1979," in Forced Migration and Mortality, National Academies Press, 2001, p.108.
(주57) Kiernan, "The Demography Of Genocide In Southeast Asia - The Death Tolls in Cambodia, 1975-79, and East Timor, 1975-80", p.586. 이 논문에서 키어난은 인구추정치에 근거한 사망자 수를 185만 4,528명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수치가 조금 감쇄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Bannister와 Johnson의 연구는 캄보디아 내 인구 636만명 외에도 베트남과 태국에 21만 8,000명의 난민들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난민들 중 다수(15만명)는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은 후 피신한 베트남계 주민들이었다.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5만 8,000명의 난민들은 636만명의 생존자에 추가되야만 한다. 이 경우, 키어난의 최대 추정치(185만 5,000명)는 179만 7,000명으로 약간 감소시켜야만 한다. |
복합적인 추정치
여러가지 방식으로 도출된 추정치들로부터 조정안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없을 것인가? 그리고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는 추정치들이 고려하지 않은 요소들은 없는 것일까? 이미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우리가 재평가해야만 할 필요는 있는 것인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존하는 추정치들의 장단점들을 잘 파악한 상태에서 약간의 추가적인 데이타들을 추가한다면, 그럴듯한 범위 내에서 보다 합리적인 추정치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최초의 인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는 인구증가율은 타당한 것일까? 빅케리의 경우 1970년의 인구증가율을 겨우 2.7%를 약간 밑도는 것으로 보았는데, 키어난의 경우엔 3%로 잡아서 당시의 태국 인구증가율과 유사한 수준으로 보았다. 하지만 당시 라오스의 인구증가율은 2.4%였다.(주58) 그렇다면 2가지 추정치 모두 당시의 역내 인구증가율과 유사한 범위 내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보다 낮게 상정한 빅케리의 추정치는 여타 데이타들과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키어난의 추정치는 최초 인구를 789만 4,000명으로 상정한 것이었다. 휴블린은 당시 인구가 795만 2,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휴블린은 데이타의 부정확성을 고려해서 적절한 범위를 고려했다는 점을 지적했다.(주59)
그렇다면 어떤 수치가 정확한 것인가? 필자는 휴블린의 수치가 더 근접한 것이라 주장하고자 한다. 키어난이 "캄보디아 인구학에 관한 선도적 학자"(주60)라고 표현했던 자크 미고찌(Jacques Migozzi)는 1972년에 예측하기를 캄보디아 인구가 1975년에 850만명이 될 것이라 발언한 바 있는데, 아마도 미고찌는 전쟁이란 요소를 고려에 집어넣고 생각한 발언일 것이다. 그리고 1975년 3월까지 프놈펜에 체류하면서 연구를 했던 경제학자 겸 통계학자인 샘슨(W.J. Sampson) 역시 1974년 중반 인구를 189만명 정도로 믿고 있었다.(주61) 하지만 인구학자 배니스터(Bannister)와 존슨(Johnson)의 경우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1980년에 집계한 6~15세 사이의 아동인구 수를 보고, 널리 믿어지고 있는 것만큼 출산율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는 점을 제안한 바 있다.(주62)
|
(사진: TONY SWINDELL)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캄보디아 민간인들의 모습. |
인구증가율 문제와 별도로, 1975년 인구의 추정 역시 1970~1975년 사이의 내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를 가정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휴블린과 키어난은 내전 기간 중의 사망자 수를 30만명이라고 잡은 추정치에 근거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망자 수는 흔히 말해지는 50만명~60만명의 사망자 수에 비하면 지나치게 적다는 점인데, 이 점은 분명하게 지적되야만 한다.(주63) 이러한 사망자 수는 과연 그럴듯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것보다 내전에서의 사망자 수가 더 적을 것이란 점을 시사해주는 증언적 증거들이 존재한다. 폴 포트(Pol Pot) 정권이 끝난 후에 발간된 캄보디아인들의 여러 회고록들을 살펴보면, 1970~1975년 사이의 사망에 관한 내용을 곧장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놀랍게 만든다.
짠리티 힘(Chanrithy Him)은 자신의 저술 <깨어진 유리가 떠다니고 있을 때>(When Broken Glass Floats)에서, 따께우(Takeo) 도에 위치한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집이 부서진 광경을 묘사했다. 하지만 살해된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가족 중 2명이 사망했다고 했지만, "그 아이들은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병원에 가 약을 타 먹을 수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짠리티 힘은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방계 친인척을 모두 합쳐 28명을 잃었다.(주64) 하잉 응오(Haing Ngor) 역시 부친이 살던 집이 파괴됐음을 기록했지만, 가족 중 사망한 사람들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주65) 사라 스트리드(Sarah Streed)의 저술 <유령의 집을 떠나기>(Leaving the House of Ghosts)를 보면, 삼(Sam)과 소카리 요우(Sokhary You)가 껌뽕 스쁘으(Kompong Speu) 도에 있는 고향 마을이 폭격당한 이야기를 회고한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 즉시 피난을 떠났지만, 요우의 가족들은 이후 재차 공습이 이뤄져 집이 파괴될 때까지 6개월을 더 머물렀다. 하지만 가족들 중 발생한 사상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주66) 소멧 마이(Someth May)와 티다 맘(Thida Mam)은 프놈펜에 대한 로켓 공격과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족들 중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기록하지 않았다.(주67) 화가인 완 낫(Vann Nath)도 크메르루즈의 공격으로 자신의 친구 한 사람이 죽었다고 기록했지만,(주68) 자신의 가족들이 사망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로웅 웅(Loung Ung), 소팔 렝 스딱(Sophal Leng Stagg), 폴 타이(Paul Thai), 몰리다 스치무시악(Molyda Szymusiak)의 회고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전쟁 중 자신들의 가족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주69)
물론 이러한 저자들이 당시의 캄보디아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표본집단이 아니란 점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출판사들은 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요구하며, 실제로 "신인민들"의 고된 경험들을 기술하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책을 저술한 사람들일수록 보다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출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란 점이다. 또한 전쟁기간 중 가장 고통받았던 부분들을 기술하는 일은 장려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의 공습이 많은 농민들을 크메르루즈 편에 가담토록 한 원인이 됐다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결국 가장 고통에 직면했던 이들이 크메르루즈 측에 가담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 캄푸치아" 정권시절 크메르루즈가 저지른 학정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이들이 자신들의 그러한 [미군 공습의] 고통을 기록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가해자들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다른 증거들 역시 내전 기간 중의 사망자 수가 재평가돼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인류학자 마이 에비하라(May Ebihara)는 1959~1960년 사이에 껀달(Kandal) 도의 한 마을에서 현장연구를 한 바 있고, 이후 1990년도에 다시 그 마을에 돌아왔다. 그녀는 1960년에 파악했던 159명의 주민들 가운데, 1975년에 이르면 16명이 노쇠했거나 병으로 사망했고 4명이 전쟁 중에 사망했음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머지 139명의 주민들 중 절반 정도인 69명이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사망했다.(주70) 벤 키어난은 에비하라의 연구를 검토하면서, "이 마을에는 1960년 이후 18가구가 새로 생겨났다. 하지만 1975~1979년 사이에 배우자 36명 가운데 26명과 자녀들 중 29명이 사망했다"고 적었다.(주71) 에비하라의 데이타는 내전 중 사망률과 폴 포트 정권기의 사망률이 일치하지 않음을 보녀준다. 즉 크메르루즈 정권기(1975~1979)의 사망률이 내전기간 중의 사망률보다 대략 1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망률이 함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검토하기 위해 다시금 빅케리가 추정한 내전 중 사망자 수 50만명과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수 74만명이란 수치로 돌아가보자. 만일 이 추정치가 정확한 것이라면 대략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수 3명 당 내전 중 사망자수는 2명 정도가 돼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키어난의 추정치를 수용한다면 내전 중 가족 1인이 사망한 가구마다, 크메르루즈 정권기에는 5~6명의 사망자가 발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망률은 여전히 너무 높은 것이다. 스티브 헤더(Steve Heder)는 인터뷰를 통해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농민 사망자수가 내전 중 사망자 수에 비해 대략 7배 정도 많았다고 결론내렸다.(주72) 그리고 우리는 헤더가 인용한 "농민들"이 내전기간 중에 도시지역 주민들보다 "더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크메르루즈 정권기에는 충격을 덜 받았을 것이란 점도 기억해야만 한다. 에비하라가 조사한 마을 주민들의 사망률 50%는 분명히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일반적인 사망률보다는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 일반적인 사망률인 25% 정도를 적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내전 중 사망자수와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수는 1대 8.5 정도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헤더가 조사한 마을 주민들의 사망률이 예외적으로 높아서 전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사레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 본 난민들의 경우에도 대단히 높은 사망률을 추정할 수 있었다. 폴 포트 정권기의 사망자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의 캄보디아인들은 금새 사망자들의 명부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민퐁 호(Minfong Ho)는 이러한 현상을 "사망자에 대한 무뚝뚝한 계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주73) 하지만 내전기간 중의 사망자를 물어보면 거의 예외없이 짤막한 답변 뿐이다. 가령 군인이었던 사촌 1명, 실종된 아저씨 1명 등과 같은 식이다.
그러나 필자가 인터뷰한 사례들이 전체 인구를 대변할 정도로 다양한 표본집단도 아니고, 심지어는 난민들만이라고 그 전체를 대변할 정도는 못된다는 점 역시 강조돼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난민들의 경우엔 그 정권 하에서 상당히 핍박을 받아 도망쳐온 사람들이란 점도 상기해야만 한다. 즉 그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 결국 고향이나 고국을 등지게 된 사람들이다. 특히 필자가 인터뷰한 사람들 대부분은 밧덤벙(Battambang)과 프놈펜(Phnom Penh) 두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두 지역의 경우엔 다른 지역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내전 중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던 곳이다.
또다른 중요한 고려사항으로는 이들 응답자들이 사망자들을 즉시로 전쟁과 관련시키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원인과 결과를 관련짓는 일은 항상 용이하지만은 않다.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이 말한 바대로, "당신의 소가 폭격을 맞아 죽었고, 그래서 쟁기질을 할 수 없어 추수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자식들이 굶주렸고,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주74)
내전기간 중의 사망자 수에 관한 문제는 1970~1975년 사이에 가족을 잃은 생존자를 찾지 못해서 발생했을 수도 있다. 공습으로 인한 사상자들은 대단히 집단적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즉 어느 한 집에 폭탄이 덜어졌을 경우엔, 일가족 전체가 몰살을 당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주변의 다른 가구들은 일가족 전체가 이주를 했을 것이다. 론 놀(Lon Nol) 정권기에 베트남계 주민들 수가 감소한 것도 특정한 가구들에서 집단적 사망이 일어난 데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주75)
(사진: 미국정부)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중인 B-52 폭격기들.
또다른 중요한 고려사항으로는 내전기간 중 사망자들이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지대에 몰려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크메르루즈 정권기에도 또한 이들의 사망률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크메르루즈 정권의 유혈숙청은 주로 "동부구역"(Eastern zone) 농민들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가구들은 내전기간과 크메르루즈 정권기 모두에서 높은 사망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고려할 점은 캄보디아인들의 문화적 성향에 관한 것이다. 즉 미국인 조사자와의 인터뷰에서 캄보디아 사람들이 미국에 의한 사망자에 관해 발언하는 일을 주저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도 있는" 또다른 증거에 관해 이론화를 하면서, 전쟁기와 크메르루즈 정권기 사이의 사망률 비교가 명백하게 불일치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심지어는 전쟁기의 집단사망에 비해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집단사망에 관한 내용이 "보다 더" 강조됐을 수도 있다. 또한 소수민족들의 살해에 관한 내용들은 더욱 심각하게 축소됐을 수도 있다. 론 놀 정권은 주로 베트남계 주민들의 탄압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크메르루즈 정권은 화교, 짬족(참족), 베트남계 주민에 대해 일반적 사망률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탄압했다. 더구나 크메르루즈의 편집증은 일가족 전체를 "적"으로서 처형하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많은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숙청은 단순히 직계 일가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방계 친인척들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내전기간 중 사망자 수와 관련하여 종종 제기되는 또다른 의문점들도 존재한다. 집단매장지들 중에서 단 2곳만이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들의 무덤이었다고 한 에치슨의 주장은 신뢰할만한 것일까?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에 캄보디아인이 아니라 북-베트남 사람들은 얼마나 포함되었는가? 작금의 언론들이 미군 공습에 의한 희생자들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의 주장을 고려해보라.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언론이 그 문제에 대해 공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실제 사망자 수가 널리 믿어지는 것보다 적어서는 아니었는가? 베트남의 경우를 비교해보자. 당시의 베트남에서는 공산 게릴라들이 아무 때나 어떠한 장소에도 출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남-베트남과 미군은 즉각적인 보복 응징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의 전선은 보다 예측가능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전투가 발생하기 전에 주민들을 소개시키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내전 중 사망자수를 30만명으로 잡는 것은 50~60만명으로 추정하는 것보다 과연 합리적인 것인가? 아마도 베트남의 경우가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을 것인데, 30만명이란 숫자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베트남에서는 138만명의 군인들이 사망했고, 200만명 정도의 민간인이 사망했다.(주76) 이는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 수가 대략 1대 1.45명 정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비율을 캄보디아의 사례에 적용한다면, 12만 2,488명의 군인이 사망했고 17만 7,512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이 된다. 민간인들의 경우 사망자 수를 정확히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어떤 사망자가 전쟁 때문에 사망했다고 확정짓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군인들의 사망자 수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서도 베트남의 사례가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데, 군인 사망자 수가 대략 12만 2,500명 정도임을 고려해보자. 베트남의 경우 미군의 사망자와 부상자 비율은 약 1대 3 정도였다. 하지만 베트남 공산군의 경우 의료시설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부상자들이 더욱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고, 사망자와 부상자 비율은 대략 1대 2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주77) 캄보디아의 경우에는 통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1970년도 말에 캄보디아 정부는 3,888명이 사망하고 7,895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주78) 아마도 이 비율은 전장의 상황이 악화되고 의료시설이 격감하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황은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베트남 공산군과 마찬가지로 크메르루즈 반군 역시 더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사망자 대 부상자 비율을 1대 1 정도로 잡는다면, 전투요원 중 부상자 수가 10만~12만 5,000명 정도라면 전체 사상자 수는 24만명 정도가 나온다. 이러한 수치는 우리가 정부군과 반군 모두의 군인수를 고려할 때 지나치게 많은 숫자이다. 론 놀의 전부군은 민병대를 포함해서 29만명 정도의 병력이 최대치였을 것이다.(주79) 만일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부상자들이 새로운 보충병들로 대체되어 갔다고 생각한다면, 전쟁기간 중 군인들의 총 수는 73만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군인 3명 중 1명이 죽거나 부상했다고 가정한 것으로, 다른 전쟁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많아서 믿기 어려운 수치이다.
이러한 수치가 예외적으로 높다고 해서 반드시 부정확하리란 법은 없다. 또한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 수 역시 다른 정권에 비해 예외적으로 높은 편이기도 하다. 인류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하나의 분쟁이 다른 분쟁들보다 특별하게 더욱 파괴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캄보디아 내전이 다른 분쟁들보다 특별하게 더 파괴적이었다는 강력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베니스터와 존슨은 전쟁 중의 사망자 수를 27만 5,000명으로 추정했다.(주80) 샘슨(Sampson) 역시 전쟁기의 사망자 수가 과도평가됐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간인 사망자들이 "수만명에 이를 수는 있지만 그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라 제안하고, 군인들의 사망자 수가 양측에서 각각 10만~15만명 규모일 것이라고 했다.(주81) 만일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양측의 합산은 30만명 정도가 되어 너무 높은 수치가 나온다.
우리는 또한 사망자의 수를 부상자 수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만일 우리가 50만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수용한다면, 또다른 50만명이 부상했다고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수치는 1975년 인구 16명 중 1명 정도가 내전기간 중에 부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보면, 이러한 수치는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필자는 내전기간 중의 사망자 수가 15만~30만명 정도가 적당하리라 생각하며, 특히 25만명 정도가 가장 그럴법한 수치라고 생각한다.(주82)
(주58) 태국의 인구증가율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ttp://www.ncbi.nlm.nih.gov/entrez/query.fcgi?cmd=Retrieve&db=PubMed&list_uids=12311580&dopt=Abstract. 라오스의 인구증가율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ttp://www.ncbi.nlm.nih.gov/entrez/query.fcgi?cmd=Retrieve&db=PubMed&list_uids= 12313302&dopt=Abstract.
(주59) Patrick Heuveline과의 개인적 대화, 2005-4-6.
(주60) Kiernan, Ben: The Pol Pot Regime, p.457.
(주61) Sampson, W.J.: The Economist 지에 보낸 편지, 1977-3-26.
(주62) Bannister, Judith, and Johnson, E. Paige: "After the Nightmare: The Population of Cambodia," in Kiernan, Genocide and Democracy in Cambodia, 1993, p.85. 나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얼마나 신뢰를 부여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배니스터와 존슨의 추정치가 1975년 인구로는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전쟁이 출생율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란 결론 역시 이러한 점에 근거를 둔 것일 수 있다. 만일 총인구 수를 적게 잡았다면 청소년 인구 감소 역시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아주 어린 나이의 어린이들이 다른 연령대의 인구들과 마찬가지로 하향 추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주63) 예를 들어 Vickery의 연구와 CIA 보고서는 이러한 추정치를 수용했다. Francois Ponchaud의 저서(Cambodia Year Zero, p.71)는 시하누크(Sihanouk) 공이 사망자 수를 60만명으로 보았다는 점을 기록했다. 반면 엘리자벳 벡커(Elizabeth Becker)는 1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했지만, 역시 동일한 근거에 기반했을 것이다. 다만 벡커의 경우엔 전쟁 당사자 양측에서 주장하는 50만~60만명이라는 숫자를 양측 각각에서 발생한 사망자수로 보고 합산을 했을 것이다.
(주64) Him, Chanrithy: When Broken Glass Floats, pp.27-44, p.330.
(주65) Ngor, Haing, and Warner, Roger: A Cambodian Odyssey. 제3장과 제4장을 보라. 그리고 p.129.
(주66) Streed, Sarah: Leaving the House of Ghosts, pp.72-73. 이것은 비록 B-52 폭격기의 공습 때문이라고 적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폭격기가 "낮게 날았다"고 했는데, 원래 B-52는 고공 폭격기이다.
(주67) May, Someth: Cambodian Witness, pp.91-99; Criddle, JoAn: To Destroy You is No Loss, pp.3-12.
(주68) Nath, Vann: A Cambodian Prison Portrait, pp.3-4.
(주69) Loung Ung의 First They Killed My Father, Sophal Leng Stagg의 Hear Me Now, Sharon Sloan Fiffer의 Imagining America (Paul Thai에 관하여), 그리고 Molyda Szymusiak의 The Stones Cry Out 같은 책들을 참조하라.
(주70) Ebihara, May: "A Cambodian Village under the Khmer Rouge, 1975-1979," in Genocide and Democracy, p.57.
(주71) Kiernan, The Pol Pot Regime, p.459.
(주72) Stephen Heder와의 개인적 대화. 2005-3-8.
(주73) 필자는 젊은 독자들에게 Ho의 소설인 The Clay Marble를 강력히 추천하곤 한다. 이 책에 대한 논평 한 편을 "http://www.mekong.net/cambodia/clay.htm"에서 열람할 수 있다.
(주74) Craig Etcheson과의 개인적 대화. 2003-5-8.
(주75)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필자는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수 추정치가 낮게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집단사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집단사망이 내전 중의 사망자수 추정치 역시 낮췄을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추정치가 저평가된 것은 집단사망 때문이 아니라, 집단사망을 고려하지 않은 "조사방법들"(survey methodologies)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내전 중 사망자수를 50만명으로 본 추정치는 생존자들의 조사에 띠른 것이란 증거는 없다. 실제로 이 추정치에 대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주76) Associated Press: "Vietnam Says 1.1 Million Died Fighting For North," 1995-4-4, http://scholar.lib.vt.edu/VA-news/VA-Pilot/issues/1995/vp950404/04040331.htm.
(주77) "Summary of Vietnam Casualty Statistics, Courtesy of VVA Chapter 172,"(http://www.vietnamwall. org/pdf/casualty.pdf). 이 자료는 4만 7,378명의 미국인이 적대적 행위로 사망했고, 30만 4,704명이 행위 중 부상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자 중 적대적 행위로 인한 피해자는 절반(15만 3,329명)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베트남공화국 육군"(ARVN)의 경우엔 22만 3,748명의 사망자(KIA)와 116만 9,763명의 부상자(WIA)가 발생했다. "북베트남 인민군 및 베트콩"(NVA/VC)의 경우 110만명의 사망자(KIA)와 60만명의 부상자(WIA)가 발생했다. 이 점은 공산군을 위한 의료시설이 부족했음을 반영한 것이다. 만일 미군 부상자 중 적대적 행위에 의하지 않은 부상자 수를 제외한다면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총 수는 137만 1,126명 사망에 192만 3,092명의 부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주78) Clodfelter, Michael Vietnam in Military Statistics p.273.
(주79) Kiernan은 <Peasants and Politics in Kampuchea 1942-1981>에서 1973년 무렵의 크메르루즈 반군의 병력이 20만명 정도였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는 1973년 의회청문회를 인용한 것이었다(p.219). Clodfelter의 <Vietnam in Military Statistics>은 론 놀의 군대가 1970년에 4만 병력에서 10만 병력으로 늘어났다고 했다(p.273). 1972년 말에는 병력규모가 장부상으로는 22만 3,000명이었지만, 최대 10만명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 병사들일 수 있었으며 나머지 중에서도 실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8만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p.274). 1974년 말 기록에는 육군 20만명, 해군 1만 1,000명, 공군 9,500명, 민병대 15만명이라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중 8만명은 유령병력이라 믿어졌다(p.277). Clodfelter의 통계는 또한 크메르루즈 병력 수가 키어난이 제시한 규모보다 적었음도 보여준다. Clodfelter는 크메르루즈 반군이 1972년에 3만 5,000명 정도라고 기록했고(p.274), 1975년에는 175개 대대에 전투요원 6만명이라고 적었다(p.277).
(주80) Bannister and Johnson, p.66.
(주81) Sampson, The Economist 지에 보낸 편지, 1977-3-26.
(주82) 사망자수를 계산하는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또다른 요소로는, 전쟁중의 사망률이란 거의 불가피하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쟁을 통해 전복된 잔학한 정권을 생각해보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실제로 전쟁이 사망률을 "감소"시킨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