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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양순체
진본이라고 불림.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진본의 판본은 아래와 같다.
(1) 국보 제202호(卷三十七) 1권 1축. 권말에는 1098년(숙종 3) 이필선(李必先)의 시재(施財)에 의하여 간행되었다는 간기(刊記)가 있다. 본시 불복(佛腹)에서 나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책머리의 권수제(卷首題)와 권차(卷次)의 일부분이 결실(缺失)되고, 제1장과 제4장에 파손이 있다.
자체(字體)는 국내 전래의 삼본 『화엄경』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구양순체(歐陽詢體)를 사경체(寫經體)의 서법으로 1항(行)에 17자씩 24항이 각입되어 있다. 판각술은 비교적 정교하다. 다만, 착묵(着墨)이 고르지 못한 편이나, 묵색이 진하여 글자획이 또렷하고 또한 개판(開板)되자 바로 인출된 듯 글자가 우아하고 단정하다. 지질은 저지(楮紙)로 고색이 창연하며, 불상의 조그마한 틈 또는 구멍으로 스며든 습기로 책장의 윗부분이 권말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얼룩져 있다. 간행기록이 뚜렷한 현전하는 『화엄경』 목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재)아단문고(개인소장)에 있다.
(2) 보물 제685호(卷四)ㆍ제686호(卷二十八) 권제4는 권서(卷緖), 표죽(褾竹) 및 권수제부터 제12장의 20항까지 이르는 부분, 권제28은 권수부터 제5장의 8항까지와 제29장 이하 권축(卷軸)까지의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자체가 구양순체 계통의 사경체이며, 판식은 각 장에 본문을 1항에 17자씩 24항 새기고, 본문 앞의 여백에 역경별(譯經別) 권(卷)ㆍ장차(張次)를 표시한 것과 판각의 솜씨 등이 국보 제202호로 지정된 1098년 간행의 진본 『화엄경』 권37과 매우 비슷하다. 또, 이 책들이 같은 불복에서 동시에 나온 것이므로 간기가 남아 있지 않으나 역시 숙종연간에 판각하여,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판본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고려 전기의 목판인쇄 및 『화엄경』 판본연구에서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병순이 소장하고 있다.
(3) 보물 제1192호(卷三十八) 1권 1첩. 이 판본은 고려 숙종연간에 간행된 목판본의 번각으로 보이는 해인사 사간판본으로, 간행 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된다.
표지는 간행 당시의 표지로 감색의 종이에 은니의 보상화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가운데 금니의 장방형 안에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八’이라고 표제명이 금니로 필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진본임을 나타내는 ‘晋’ 자가 역시 금니로 묘사되어 있다. 한솔종이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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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군
947년(정종 2)에 설치되었던 지방군사조직.
고려에서 조직된 최초의 전국적인 군사조직으로서, 중앙의 통제 아래 지방호족들에 의해 지휘되는 농민예비군의 연합체이다. 광군이 조직된 것은 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그 규모는 30만이었다고 한다. 광군은 중앙정부의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이지만 당시에는 중앙정부의 지방통제가 불완전한 상황이었으므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징병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당시 지방의 통치를 사실상 반독립적인 입장에서 담당해나가고 있던 지방호족의 징병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광군은 호족연합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부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도 지방호족이었다. <개심사석탑 조성형지기>에 의하면 이 석탑 조성공사에 광군이 동원되고 있는데, 향리가 역사(役事)에 동원된 광군을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국의 광군조직을 통제했던 통수부는 개경에 설치된 광군사(光軍司)였다. 이러한 광군의 설치는 농민의 역역(力役)을 직접 파악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로 조직되었으나, 실제로는 호족세력과의 타협 속에서 중앙정부와 지방호족에 의한 농민 역역의 공동지배 아래 조직된 지방군이었다. 광군은 고려의 집권화 정책이 진전되어 지방제도가 정비되어감에 따라서 주현군으로 개편되어, 1011년(현종 3)에서 1018년에 이르는 기간 사이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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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좌별초
사병이라고는 하지만 중앙의 치안·형옥(刑獄) 및 전투 등 공적인 임무를 자주 수행하였다. 최이(崔怡) 집권기에 도둑 소탕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야별초(夜別抄)의 수가 점차 많아지자 후에 좌·우별초로 분리되었다.
여기에 대몽항쟁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해 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흔히 삼별초(三別抄)라 불렀는데, 이처럼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분리되고 신의군이 형성된 것은 대략 최씨정권 말기(고종 말엽)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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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별초
여기에 대몽항쟁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도망해 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흔히 삼별초(三別抄)라 불렀는데, 이처럼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분리되고 신의군이 형성된 것은 대략 최씨정권 말기(고종 말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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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고여피살사건
강동성(江東城)의 전역(戰役)이 끝난 뒤 몽고는 고려에 대해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해마다 동진국(東眞國)을 경유해서 사절을 파견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특히,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되어 무례한 행동으로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몽고에 굴복했던 동진의 만노(萬奴)는 이때 서역지방으로 원정을 나선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소식이 막연함을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1224년 정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는 동시에 각기 각장(榷場 : 무역하는 장소)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몽고를 배반한 만노를 가까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리하기도 어려운 난처한 입장에 처하여, 일단 몽고와 동진 두 나라와 통교를 계속하면서 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마침 1224년 11월에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 정월 함신진(咸新鎭 : 평안북도 의주)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지극히 중대한 외교적 위기에 부닥쳤다. 범행은 횡포한 몽고사신에 분노한 고려사람의 소행일 수도 있고, 고려와 몽고의 외교적 분쟁을 희망하는 금나라나 동진의 모략적 음모일 수도 있었다.
이들은 고려와 몽고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그들이 고려 영토를 침범할 때에도 몽고 사람의 복장을 하여 몽고의 소행인 것처럼 가장하였다. 또, 몽고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에는 통로를 가로막으며 고려사람의 복장을 하고 종종 습격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에서는 저고여피살사건을 금나라 도둑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이 사실을 몽고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후일 이 사건을 고려에 대한 침입의 구실로 삼았다.
이 사건은 몽고 침입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으나, 고려에 대한 몽고의 출병은 몽고가 아시아 제압의 일환으로 미리 계획해 둔 군사행동을 단행한 데 실천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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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친원세력
간섭기의 왕은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등이었습니다. 원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에서 첫머리에 '충'자를 넣었다고 했지요.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난 왕이 공민왕(1351∼1374)이었습니다. 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새로이 명나라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를 원 · 명 교체기라 부릅니다. 고려로서는 드디어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권문세족이 강력한 원과 손잡고 있을 때에는 고려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이 약해졌으니 권문세족의 위세도 꺾이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영토 수복
공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 자주 정책을 추구했고,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는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원이 설치했던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습니다. 이문소는 원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감시하던 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여 원에게 빼앗겼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습니다. 인당을 보내 요동 지방을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원이 격하시켰던 관제를 회복하고 몽고식 이름이나 머리 모양도 없앴습니다.
공민왕은 기철(여동생을 원 황실에 바쳤던 인물)을 비롯한 친원 세력을 숙청했습니다. 또한 권문 세력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했습니다. 정방은 무신 정권기 이후 관리 인사를 담당했던 기관입니다. 정방의 활동으로 왕권이 약해졌고, 신진 사대부가 정계에 진출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정방을 없애자 권문세족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졌습니다.
공민왕은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돈이라는 승려를 등용했습니다. 신돈은 권문세족을 비롯한 정치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을 개혁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즉 공민왕은 신돈을 통해 개혁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전국에 걸쳐 있던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토지와 노비 문제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 토지와 노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설치한 임시 개혁기구)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평민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신진 사대부도 역시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돕는 지지 기반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이라 부르며 환영했습니다. 공민왕은 반원 개혁 정치를 완성하기 위해 밖으로는 원과 싸웠고, 안으로는 권문세족과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뜻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원의 압력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 없었지요. 권문세족의 견제로 국내의 개혁도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권문세족은 신돈이 뇌물을 받았다며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땅과 노비를 잃게 되었으니 당연하겠죠. 마침내 신돈은 권문세족의 반격으로 제거됩니다. 원의 압력과 권문세족의 저항으로 개혁은 어려움을 맞게 되고, 결국 공민왕도 암살되었습니다. 아직 신진 사대부는 권문세족을 누를 만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개혁 정치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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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인철소
원래 충주의 다인철소(多仁鐵所)였는데, 1255년(고종 42) 이곳 사람이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 공이 컸으므로 승격시켜서 현으로 삼았다가 뒤에 충주에 예속시켰다.
지형상으로 볼 때 이곳은 달천강(達川江) 유역에 자리잡은 계곡분지로서 조선시대에는 용안역(用安驛)이 있었고 충주와 죽산을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익안의 지명유래는 ‘큰 계곡의 안쪽’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이 지역의 지형이 동서로 긴 계곡을 이룬 것을 나타낸다. 이곳에 철광석 산지가 있었다. 지금의 이류면과 주덕읍 지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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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병화
호족이란 원래 중국의 남쪽에서 산출되는 털이 곧고 질 좋은 짐승을 뜻하는 호(豪)와 친족집단을 뜻하는 족(族)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호족은 지방에 있는 뛰어나고 우수한 친족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호족은 중국사에서 일찍이 등장했으나 일본사·한국사에서도 쓰여지고 있다.
중국사에서의 호족은 주로 한대(漢代)·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에 쓰여졌다. 그리고 중앙의 귀족과 대비되는 개념을 갖고 있다. 때문에 호족은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써 그 지역의 실력자였다.
호족은 대토지소유자로서 토지경영을 위해 다수의 노비·소작인을 소유하였다. 그러나 노비에 의한 노동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대부분 소작인에 의한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호족들은 사인(舍人)·빈객(賓客)이라 불리는 비혈연자들도 데리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망명자인 유협(遊俠)의 무리였다. 이리하여 호족은 향리(鄕里)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호족은 문화의 독점적 향수자였다. 단순히 경제력에 의한 생활내용의 풍부함과 고도화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의 정수를 독점하였다. 특히 그들 사이에 애호되었던 유학은 호족생활의 내부를 규제하는 의미를 넘어 정치의 원리가 되었다. 즉 가족적 인간을 개인으로 분해해 직접 지배하는 진(秦)대의 법가적(法家的) 황제정치는 유가(儒家) 이론에 의해 변용되어 호족윤리를 중시하는 천자정치가 되었다.
그러나 호족이라 하여 씨족집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란과 생산력 발전을 거치면서 씨족공동체는 해체되고, 가부장적 가족제가 생겨났다. 즉 호족의 족적 결합은 동일혈연집단이 아니라 개개의 토지소유자인 단혼가족이 일정한 지역에서 동족적으로 결합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비혈연인인 빈객가족이 합쳐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호족은 특정 개인의 대토지 소유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한 수십·수백 가(家)의 동족집단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호족들은 결국 한(漢)제국을 붕괴시키고, 위진남북조 시대와 그 뒤를 이은 수(隋)·당(唐)대에 이르러 지방에서는 물론이고 중앙에 진출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문벌귀족은 호족 중의 유력한 자가 고위의 관직에 나아감으로써 형성되었고, 수·당대의 과거제는 중·하층 호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창출된 제도였다. 즉 한(漢)대의 호족은 왕조 말기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위진남북조시대는 물론 수·당대까지도 이른바 문벌귀족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계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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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금산사유폐사건
금산사는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되었던 절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지어지고 신라의 통일 이후 혜공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절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교종 계통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역할을 했는데, 법상종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종파라 이곳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없는 대신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절의 중심이다.
다시 견훤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면서 스스로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라 자청하며 민중들의 민심을 얻고자 하지만 끝내는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요람인 이곳 금산사에 유폐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입구에서 매표소를 지나 홍예문 위로 반쯤 남아 있는 돌문을 지나게 되는데 견훤석성이다. 금산사는 건물의 수는 많지 않은 대신에 큰 건물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의 대가람이다.
절의 본당이라 할 수 있는 미륵전은 나무로 지어진 3층 건물로 각 층은, 대자보전, 용화지회,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모두 미륵불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이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가보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내부는 한 층으로 통해 있으며, 높이가 12m에 이르는 미륵입상이 서 있다. 원래는 진표율사가 절을 세울 때 철불로 미륵장륙상을 세웠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절이 불타면서 철불은 없어졌다고 한다.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 마당에는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받침대인 석련대가 있는데 위쪽에 만들어진 네모난 구멍이 옛날 미륵장륙상을 받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 옆으로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형태의 탑을 볼 수 있다. 바로 육각다층석탑인데 보통의 탑이 화강암으로 네모나게 쌓은 것과 달리 이곳의 탑은 점판암이라는 석재를 다듬어 화려하게 꾸민 형태이다. 미륵전 뒤로 올라가면 방등계단이라는 곳을 찾을 수 있는데,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등과 비슷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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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남하사창동철불석가여래좌상
높이 2.88m. 보물 제33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출토 당시 경기도 광주시 동부면 춘궁리)의 절터에서 출토된 불상이다. 출토 당시에 양 귀의 끝과 콧등, 두 손이 파손된 상태여서 보수되었고, 양손은 근래에 다시 개수되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肉髻)가 크고 중앙에는 계주(髻珠)가 있으나 원래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가 있고 눈썹도 선명하게 새겨졌다.
특히, 긴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고, 얼굴에 비하여 인중이 짧고 입이 작아 부처로서의 자비함이 줄고 관념적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은 실상사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이나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65호) 등과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 이미 나타난 특징으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던 것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고 대의(大衣)는 우견편단식(右肩偏袒式)으로 입었다. 옷주름은 융기선으로 나타나 있으며, 아래에 모여져 있는 부채꼴의 군의(裙衣) 자락도 비교적 자연스러운 편이다.
이 불상은 전체를 여러 조각의 틀을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상의 표면이 거칠고 엉성하다. 하지만 원래는 조각 위에 호분 등을 입혀 면을 고르게 하고 다시 채색을 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전하는 철불 가운데 석굴암본존불의 형식을 재현한 듯한 항마촉지인의 불상들은 적조사(寂照寺)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경복궁 회랑에 많은 예가 전한다. 대부분 양손과 귀의 일부가 절단되었거나 불두만 남은 경우도 있다.
양식적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의 철불 양식을 이어받고 고려적으로 다시 변모한 10세기의 특징을 지녔는데, 서로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단지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불상이 드물다.
이 철불은 태평 2년(977년)의 명문이 있는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과 멀지 않은 하사창동의 광활한 평야와 넓은 수로를 배경으로 융성하였을 대가람에 봉안되었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미술사적 의의가 더욱 크며, 고려시대 10세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겠다.
이 불상이 발견된 하사창동의 절터에는 팔각대좌의 일부인 석물 3기와 함께 거대한 석조대좌의 하대석이 출토되었다. 이 철불과 관련하여 크게 주목된다고 하겠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9679&mobile&categoryId=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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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훈군 편집하느라 고생하였습니다. 몇 개 겹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소감은 최소 5줄이상입니다. 그래도 오늘 주말을 앞두고 일찌감치 과제를 한 점 칭찬합니다. 숙제를 주초에 하였더라면, 금방 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도 듭니다. 보기 좋게 같은 포인트로 글자를 맞추어 주세요. 소감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읽어보고 생각하는 바를 쓰는 것입니다. 보충하기 바랍니다.
어떤것이 겹쳤는지 제시좀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