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 6. 4. 22:32
■벽오공 약사(碧梧公의 略史)
공의 휘는 시발(時發)이요, 호(號)는 벽오(碧梧), 후영어은(後潁漁隱), 자(字)는 양구(養久),시호(諡號)는 충익(忠翼), 1569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에서(오늘날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성균진사 오촌공(梧村公)대건(大建)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발발로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경주에서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를 접대하였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594년에는 명나라의 유격장을 따라 일본군 부대를 방문하여 정탐하였으며,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李夢鶴)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데 기여하였고, 1605년 홀추가 난을 일어켜 북방이 소란해지자 선조께서 함경감사로 임명하여 이를 진압하였고 1608년에는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케 했다.
이 밖에도 군사시설의 설치와 군량의 조달등에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종전 후, 성주목사, 경주부윤, 경상도 관찰사, 예조, 형조,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으나 북인들의 권력 독점으로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 옥사와 관련하여 삭탈관직된바 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을 반대하여 청주로 낙향하였다.
1619년 강홍립이 패전하여 항복하니, 인심이 크게 동요되자 광해군이 특명으로 공을 5도 찬획사(贊畵使)로 임명, 평안도의 민폐를 해결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를 역임하고,1624년 이괄이 난을 일어키자 부체찰사가 되어 안현(오늘날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길마재) 전투에서 적을격파 평정 함으로, 삼남 도검찰이 되어 남한산성의 정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군사와 행정 실무에 밝았고 정치색은 크게 드러내지 않았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정되었다.저서로는《주변록(籌邊錄)》과 《벽오유고》가 있다.
◇이곳 묘지는 명(明)나라의 두사충(杜師忠)이 자리 잡은터 - 벽오공이 운명 하였을 당시에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그의 고향 황고(아버지)
산소 아래로 장례를 치렀으나 몇년후 아들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산소를 정한 까닭은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 났을때,왜군이 아국(我國)의 방방 곡곡에 전승하며 한양으로 밀려오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파천 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청병 하였을 때다.
이때 이여송(李如松)이 6만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원병 왔는데, 당시 명나라에서는 전쟁(戰爭)을 할때 반드시 지사(地師)를 데리고 와서 지리(산천의 형국을 오행에 부치어 길흉을 살피는것)를 살피게 한 연후에 진지를 구축 하였다. 이때 따라온 지사가 두사충(杜師忠)이다. 이여송 장군이 여기서 진(陳)을치면 어떠냐고 두지사(杜地師)에게 물었다.
두지사는 무방하겠다 하여 그곳에 진을쳤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하여 명군이 폐하고 말았다. 이여송 장군은 두지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폐전하게 되었다고 참수형(斬首形)을 집행 하려고 할때다. 이 소식을 들은 벽오공은 곧 이장군에게 달려가서 여러모로 설득시킨 나므지 두지사의 사형 집행을 중지 하기로 합의 하였다.
두지사는 죽을줄 알고 있다가 살게된 연유를 알고, 벽오공의 은혜(恩惠)를 보답하기 위하여 결초보은(結草報恩)하기로 결심 하였다. 어느날 두사충은 벽오공을 찿아가서 " 공은 나를 살려주신 은인 입니다. 소생이 배운것은 지리밖에 없으니 좋은 기지(基址)나 결정해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벽오공은 감사 하다고 인사 하면서 조정에 일이 있기에 동행하지 못하고 동생인 풍천공을 동행 하도록 하였다. 풍천공은 두지사를 따라서 서울서 진천 초평까지 210리길 산천을 살피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초평의 이곳에 이르렀을때, 두타산에서 내려온 줄기며, 펼쳐진 지형의 여러 동네를 살피드니 그곳에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입을열었다.
"내가 서울서 내려오는 동안에 본 안목(眼目)으로는 여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 합니다. 이 지역이 와우형(臥牛形)입니다. 여기에 터를 잡으시면 불농불상300년기지(不農不商三百年基地)가, 될것이니 이곳으로 결정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를 벽오공의 후손들이 영주(永住)할 기지로 삼았으며 따라서 이름난 정승, 판서들이 줄줄이 배출 되었다.
와우형(臥牛形)이란?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니 소는 풀이 있으야 한다. 그러기에 풀의, 벌판인 즉, 초평(草平)이 오늘날 까지 초평면으로 불리워 지고 있고 공의 묘지는 소의 배 부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으며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와우형의, 소 머리인 우두(牛頭)에 쌍오정(雙梧亭: 오늘날엔 터만 남아있음)을 지었고, 그 아래 봉황대(鳳凰臺)가 있고, 봉황대 옆에 조선에서 가장큰 사설 도서관으로 유명한 만권당(萬券堂 : 6.25때 화재로 소실되어 현제 800 여권만 조선조 대제학을 지낸 회와공(晦窩公)의 10대 종손 이정희(李晶熙) 씨가 보존하고 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좌측이 증 의정부 좌찬성 오촌공(1550-1574)묘 이고 우측은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묘다.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6-11
공이 1574년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 벌영산 하에 장례를 치렀는데 1610년 3월에 벽오공 께서 직접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로 직접 이장하고, 그해 4월에 진천초평에 살집을 마련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초평이씨로 불리울 만큼 후손들이 번성 하였으며, 지금의 이곳 산소는 벽오가 돌아가신 몇해후 오촌공의 손자들에 의해 2번째 이장한 산소다.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성균진사 경주이공지묘.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 합폄.이라고 기록 되있다.
이 묘표는 1658년(효종 9)에 손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벽오 이시발 선생(좌측)과 배위,증 정경부인 여흥민씨 묘.
벽오공의 묘소도 1626년 별세하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 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분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했다.
따라서 이곳 산소의 석물은 1658년(효종9)에 조성된것인데 몇년전 동자석등을 야간에 도난 당해, 지금 보이는 문
인석은 5년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수백년된 묘지 석물을 훔쳐가는 현실이 참 딱하고 안타까운 심경 입니다.
▲정헌대부 형조판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이공 시발 지묘. 증 정경부인 여흥민씨 부좌.라고 기록되 있다.
공은 이후 다시 영의정으로 추정되셨다.
▲이조참판 생곡공 인환(1633-1699)의 묘로, 백부인 참판공 경연에게 출계했다.
벽오공의 손자(孫子)로 생부(生父)는 이조판서인 춘전(春田) 경휘(慶徽)이다.
▲조선국 가의대부 행 이조참판 생곡 이공 인환지묘. 증 정부인 전주이씨. 증 정부인 청주한씨 합폄. 이라고 기록되있다.
▲묘지 뒷편에서 찍은 모습이다.
▲벽오공의 계배(系配)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이다(벽오공의 좌편 묘좌(卯坐)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정경부인 고령신씨지묘(貞敬夫人高靈申氏之墓),라고 기록되 있다.
▲소나무 뒷쪽에 보이는 건물이 쌍오재(雙梧齋-재실)이다.
▲촤측의 첫번째 건물이 오촌공, 벽오공의 재실(쌍오재)이고 보이는 마을이 지전 마을이다.
1980년 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이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좌측은 오촌 이대건(李大建) 신도비이고 우측은 아들 이시발(李時發) 선생 신도비(神道碑)이다.
충청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142호(진천군)
신도비(神道碑)란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훌륭한 벼슬아치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무덤 남동쪽, 큰길가에 세운 석비(石碑)로, 선조, 광해군,인조에 걸쳐, 세 임금을 섬기면서 백성의 생활안정과 지방민을 평온하게 하였던 그의 공로를 찬양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쌍오비각(雙梧碑閣)내에는 벽오공의 황고(皇考), 오촌공(梧村公)의 신도비도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글을 지은이는 간이제 최립(簡易霽 崔笠)이고 글씨는 손자(孫子) 경휘(慶徽)가 쓰고 전서(비문의 앞면글씨)는 판돈령 부사 이정영이 썼다.
오촌공의 신도비는 1658년(효종 9년)에 세운 비로,
우암 송시열이 글을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판돈령 부사 이정영이 전자를 썼다.
사진출처 : 이 사진은 사단법인 정통풍수 지리학회에서 2006년 4월 16일 제 120차 현지답사에서 촬영한 사진을 일부 퍼와서 편집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