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재(源仁齋)
‘원인재역’은 인천지하철1호선과 수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이다.
이 역은 역사 바로 옆에 인천 이씨(李氏)의 중시조(中始祖)인 이허겸(李許謙)의 재실(齋室) ‘원인재’가 있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
‘중시조’란 기울어진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일컫는다. 이허겸은 딸을 왕실 쪽으로 시집보냄으로써 나중에 외손녀 셋이 모두 왕비가 되게 했고, 이로써 집안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고 해서 중시조가 되었다.
‘재실’이란 무덤이나 사당(祠堂) 옆에 딸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또는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는 집을 말한다. 원인재 옆에는 실제로 이허겸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제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원인재는 원래 여기서 멀지 않은 연수동 인천적십자병원 입구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연수택지개발사업 때문에 헐리게 되자 「인천 이씨 대종회」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은 것이다.
‘원인재’의 ‘원인’이란 “인주(仁州) 이씨, 곧 인천 이씨의 근원(根源)”이라는 뜻으로, 이허겸 대 이후에 인천 이씨가 여러 분파로 나누어졌음을 뜻한다고 한다.
원래의 원인재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인천시 시사편찬위원장을 지낸 고(故) 박광성(朴廣成) 교수는 ‘원인재 상량문(源仁齋上樑文)’ 등의 자료를 통해 순조 7년(1807년)이나 고종 4년(18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 한 바 있다.
인주 이씨 종친회에 따르면, 이허겸의 선조는 가야국 김수로왕 대(代)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머니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였다고 한다.
이 집안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대대로 허씨(許氏) 성을 썼다. 그러던 중 신라 경덕왕 때 아찬(阿飡) 벼슬에 있던 허기(許奇)라는 이 집안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됐다. 그는 거기서 마침 ‘안록산의 난’이 터져 피난길에 있던 당 황제 현종을 호위하게 됐고, 그 공을 인정받아 황제의 성인 이씨(李氏) 성을 받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 집안은 그 뒤 통일신라 말기인 8~9세기쯤 소성현(邵城縣:지금의 인천)으로 이사를 와서 터를 잡았다.
이허겸의 집안은 이 같은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李)’와 ‘허(許)’를 함께 성(性)으로 쓰고, 이름을 ‘겸(謙)’처럼 한 글자로 짓곤 했다고 한다.
이 집안이 조상으로 섬기고 있는 김수로왕의 부인 허씨는 인도 출신으로 전해온다.
이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그녀가 자신에 대해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賁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밝힌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아유타국’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인도의 갠지즈강 지류에 있던 고대 왕국 ‘아요디아’라는 주장이 정설(定設)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태국 메남강가의 ‘아유티아’나 중국 사천성의 ‘보주(普州)’라는 다른 견해가 있고, 일본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또는 그녀가 원래 인도의 공주이기는 한데, 중국 보주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가야국으로 시집을 온 것이라는 절충식 설명도 있다.
어쨌든, 이 집안은 인천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 고려시대에 와서는 전성 기를 맞이한다. 특히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모두 문종 임금의 부인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 뒤 인종 때까지 7대(代)에 걸쳐 왕비와 재상()宰相, 등을 내며 권력을 장악했다. ‘7대 어향(7代 御鄕)’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덕분에 고려 숙종 임금은 그전까지 소성현이라 불렸던 지금의 인천을 “어머니인 인예순덕 태후가 태어난 경사(慶事)의 근원인 곳”이라는 뜻에서 ‘경원군(慶源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위를 올려주기도 했다.
그 뒤 경원군은 인종 임금 때 ‘인주(仁州)’로 다시 이름이 바뀌는데, 인종 자신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순덕왕후의 고향이기 때문에 ‘큰 고을’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 이다.
그런데 이 집안이 이처럼 크게 일어선 것은 묘지를 잘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지금의 원인재 근처에 있는 이 집안의 묫자리는 퐁수지리적으로 볼 때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세’, 곧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땅이어셔 크게 번성할 기운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다지 번성하지 못했던 집안이 이곳에 묘소를 쓰면서부터 크게 번창했다는 것이다.
문학산의 남동쪽 산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동네는 연화부수형이라는 말을 따서 예로부터 ‘부수지(浮水地) 마을’이라 불려왔다. 지금 이곳에 있는 ‘연화사거리’나 ‘연화초등학교’도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특히 이자연은 이곳에 호화스러운 연못을 만들어 놓고 자주 와서 쉬기도 하고, 성묘도 했다고 한다.
그의 세 딸은 모두 문종 임금의 부인이 됐다. 특히 그의 장녀 인예순덕태후 이씨는 순종, 선종, 숙종 등 세 임금과 우리나라 불교 천태종의 창시자인 대각국사 의천 등을 낳았다.
그러나 연화부수형도 마냥 영화(榮華)가 오래 갈 수만은 없는 형세인지, 그토록 번창하던 인천 이씨 집안도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李資謙) 대에 이르러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어린 인종이 임금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자겸은 한동안 임금보다 더 큰 권세를 누렸다. 「고려사」에 나와 있는 다음 기록은 그의 권세와 방탕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자기 족속(族屬)을 요직에 앉히고 벼슬을 팔았으며, 자기 무리들을 많이 심어 스스로 국공(國公)이 되고 예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며,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내외가 하례하는 글도 전(箋)이라 칭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어 집과 정자(亭子)를 지어 길에 잇닿았다. 권세가 더욱 번성하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고,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 남의 땅을 빼앗고, 종들을 시켜 말과 수레를 가로채 자기의 물건을 나르니 주민들이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팔아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이것도 부족했던지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넷째 딸을 나란히 인종과 결혼시켰다. 이모와 조카를 결혼시킨 것이다. 고려 왕실에 근친결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는 무척 무리한 결혼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내는 스스로 왕이 될 마음을 갖고 반란을 꾀했다.
당시 그는 고려초부터 전해오던 참언(讒言) 중에 “십팔자(十八子=李)가 왕이 된다”는 말을 믿고 거사(擧事)를 꾀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결국 실패해 자신은 귀양을 가고, 그의 소생인 왕비들도 폐위(廢位)돼 궁궐에서 쫓겨난다. 인주 이씨 집안의 영화는 대략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어찌됐든, 인주 이씨 집안은 이렇게 고려 초·중기에 크게 번성 했다.
그것이 정말로 연화부수형 땅에 묘를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거꾸로 이 집안이 크게 번성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집안의 묘소가 있는 곳을 좋은 터라고 얘기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