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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오늘도 거리에 나섰다. 짙푸른 제복에 같은 빛깔의 모자, 같은 빛깔의 코트를 입고. 겨드랑이에는 제 몸집 만큼이나 큰 악기가 들려 있다. 오늘 연주장은 명동. 서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거리라 내심 걱정이지만 일단 연주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신바람이 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저들 밖에 한밤중에, 루돌프 사슴코….
양볼을 씰룩씰룩하며 은빛나팔을 불어대는 아이들. 나이 어린 소년들의 연주가 대견해 하나둘 몰려드는 구경꾼들. 산타를 닮은 어느 할아버지는 힘차게 나팔을 부느라 추운 줄도 모르는 꼬맹이 연주자의 바짓주머니에 1만원짜리 종이돈을 집어넣고 사라진다. 썰렁하기만 했던 자선냄비도 금세 배불러진다. 아이들의 연주에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인지, 냄비에 돈을 넣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검정색 빌로드 망토에 부츠를 신은 아가씨, 바바리코트를 입고 지나가던 청년. 어린 딸의 손에 이끌려 쑥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아버지도 있고, 석유통 싣고 달리던 일꾼아저씨,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중국집 배달부도 오토바이에서 내려 냄비가 흔들거릴 만큼 힘차게 ‘사랑’을 쏟아붓고 간다.
한국 구세군이 자랑하는 거리의 악대. 12월이면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도시 곳곳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 멋진 나팔소리를 들려주는 소년들. 하지만 이 어린 브라스밴드(brassband)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일찌감치 음악에 미쳐 어지간히 부모 속 태우며 사는 개구쟁이들이겠지. 그렇게 생각해도 좋을 만큼 브라스밴드의 힘차고 경쾌한 연주는 모자 속에 가려진 아이들의 슬픔을 가려주는 것이다.
연주가 끝난 뒤 악대가 돌아가는 곳은 아파트 공사로 매일매일 길이 바뀌는 서울 상암동이다. 엄마 아빠가 없는 대신 성이 다른 누나와 형, 동생들이 70여명이나 있는 서울 구세군 후생학원이 아이들의 둥지다. 난지도가 바라다보이는 언덕빼기에 90년 역사를 자랑하며 서 있는 후생학원은 오래 전부터 음악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갓난아기 적부터 북소리와 나팔소리를 듣고 자란다. 밥 먹을 때, 뛰어놀 때, 잠자리에 들 때에도 언제나 음악이 들려와서 아이들은 연주자가 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정식으로 악기를 배운다. 태어나 처음 잡아보는 악기이지만 어릴 적부터 다져놓은 기본기가 있으니 악기에 능숙해지기란 시간문제다. ‘말단’들의 소망은 중간악대를 거쳐 본악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개중에는 수형이(13·가명) 수민이(12·") 형제처럼 배운 지 3년도 안되어 곧장 본악대로 뽑혀가는 초등학교 아이들도 있다.
혼, 트럼본, 튜바, 코넷, 바리톤 같은 악기들 중에서 무엇을 연주하느냐 하는 것도 아이들에겐 중요한 문제다. 악기는 악대의 지휘자가 치아와 구강상태, 입술의 두께를 보고 결정하는데, 후생학원의 어른들은 새 아이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그 입을 살피는 것이 오랜 습관이 되었다. 악기 중에서도 코넷이 가장 인기가 높다. 생김이 앙증맞기도 하지만 주요 멜로디를 이끄는 악대의 ‘작은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입에 닿는 마우스피스가 작아서 코넷은 반드시 얇은 입술과 반듯한 치아를 가진 연주자를 원한다. 반대로 튜바는 앞니가 없어도 불 수 있는 악기로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언젠가 튜바대원 민겸이(16·가명)는 친구들과 주먹다짐을 했다가 앞니가 몽땅 부러졌는데 한달이 다 가도록 대원들은 사실을 몰랐다. 잇몸으로 불어도 소리가 났기 때문인데, 지금도 앞니 두개가 텅빈 채 남아 있어서 두고두고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
김해두 사관(42)은 개구쟁이들로 가득한 악대를 이끄는 밴드마스터이다. 그 역시 후생학원에서 음악과 함께 자라 대학에 가고 음악목사가 된 혼 연주자다. 사관은 쉽고 재미난 교수솜씨로 구세군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이를테면 음악용어를 설명할 때도 아이들의 눈앞에 그림을 그려준다.
“알레그로는 열다섯살 아이가 비를 맞고 질퍽한 길을 뛰어가는 것처럼 연주해라” “모데라토는 맑게 갠 오후 영국인 신사가 점잖은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듯 연주해라”. 자신이 그랬듯, 가슴 깊숙이 들어앉은 상처로 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음악을 통해 삶을 사랑하고 꿈을 꾸도록 도와주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한다.
“내가 부는 악기의 소리가 전체 앙상블에서 빠질 수 없다는 것, 필요한 때에 내 악기소리가 나와야 연주가 이어져 간다는 사실에서 아이들은 자기 존재의 중요함을 깨닫지요. 무엇보다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 저도 세상에 베풀 것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실제로 무대에 서면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가 된다. 캐럴에서 클래식 소품,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도 수백곡이다. 각종 행사에 참가하지만 아이들은 하루이틀씩 묵는 연주여행을 좋아한다. 지난 봄 진주 청소년축제에 갔을 때는 하룻밤을 진주에서 묵고 벚꽃놀이가 한창인 진해로 넘어갔다. 해군사관학교 앞에서 예고도 없이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남준이(16·가명)는 “우린 역시 거리 체질이야”라며 웃었다. 상호(17·가명)에게는 2년 전 여름 잊지 못할 무대가 있었다. 미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공연하던 중 뉴욕에서 친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상호가 갓난아기였을 때 아내와 헤어진 뒤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던 아버지는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아들의 손을 잡고 그저 울기만 했다. 그날 상호는 아버지를 위해 코넷을 독주했다.
12월. 아이들은 다시 거리로 돌아왔다.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하는 초순부터 성탄 이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주를 한다. 24일 밤이 지나고 성탄 새벽이 밝아오면 악대는 지휘자의 손을 떠난다. 저희들끼리 악대를 두 팀으로 나눠 새벽송을 돈다. 인근에 사는 교인들과 후원자들의 집을 비롯해 경찰서와 교도소 담장 밑에서도 연주를 한다. 아무리 바빠도 빼먹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 이웃마을에 있는 삼동소년촌이다. 소년촌 고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악대의 연주는 더욱 간절하고 정성이 밴다. 고요한 새벽, 난지도 앞 헐벗은 들판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 ‘이 소리가 멀리멀리 퍼져서 내 그리움, 내 어머니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만 있다면…’. 성탄이 저물고, 거리의 캐럴송도 이제 멈추겠지만 마음이 가난한 소년들의 연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취재수첩] “추위보다 참기 힘는 건 배고픔이었죠”-
서울 구세군 후생학원 악대는 1922년 7월에 처음 만들어졌다. 후생학원의 소년들 15명으로 구성됐는데, 초등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대원이 폭넓게 짜여진 밴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고 한다. 김해두 사관에 따르면 78년이 악대의 전성기였다. 구세군 100주년을 기념, 미국과 유럽 7개국을 순회하며 연주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가 아닌 후생학원의 소년악대가 초청된 것이다. 이때의 일화가 재미있다.
“몇달간 혹독한 훈련을 했어요. 시차에 적응해야 한다고 새벽에 일어나서 연습하고, 아주 밤늦은 시간에 모여서 또 연습했지요. 30여곡의 악보를 달달 외울 만큼 열심히 했는데 문제는 악기였습니다. 비싼 악기를 구할 수 없으니 중고를 기증받아 쓰고 있었지요. 하지만 악기 하나를 말단·중간악대·본악대원이 동시에 사용하다보니 구멍이 날 정도로 닳고 얇아졌어요. 스위스 공항에 내렸을 때는 비행기가 흔들리는 바람에 많은 악기들이 부서져버렸답니다. 당황한 주최측이 악기를 바꿔주느라 엄청 고생했지요. 스웨덴,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를 거치면서 남은 악기들도 하나씩 교체됐습니다. 우리 연주에 감명받은 외국인들이 새 악기들을 기증해준 것이지요. 그때 바뀐 악기가 현재 쓰는 악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생담은 이뿐이 아니다. 겨울은 지금보다 더 추워서 거리에 나가면 악기를 연주하는 손이 동상에 걸려 피가 나고 고름이 났다. 악기가 꽁꽁 얼어 피스톤이 눌러지지 않으면 가까운 다방에 들어가 녹인 뒤 다시 거리로 나와 연주를 했다. 추위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배고픔이었다. 배에 잔뜩 힘을 주어 불어야 하는 악기들이라 더욱 쉽게 허기를 느끼곤 했는데, 그러면 빈 속에 물을 한 대접씩 퍼마시고 다시 연습을 했다.
그래도 구세군악대 출신이라면 알아주던 시절이었다. KBS교향악단의 전신인 국립교향악단에는 유포늄이라는 악기를 불 줄 아는 연주자가 없어 후생학원의 고교생 대원을 초청하곤 했다. 악기를 뛰어나게 연주하면 대학에도 거뜬히 갈 수 있어서 대원들은 밤 늦도록 연습실에 남아 피나는 훈련을 했다. 그 전통이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다고 말하는 김사관은 “노방전도를 위해 거리에서 태어난 구세군음악은 단순한 종교음악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는 음악”이라고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