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위험한 미국 — 자본권력의 '숙주'라는 구조적 관성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2026-05-02
이 글은 학술적 엄밀함을 다투는 글이 아니다. 한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직면한 안보와 주권의 생존 전략을 생각하면서, 미국의 화려한 외관 뒤에 숨겨진 '자본의 숙주'라는 구조적 위기를 직시하고자 한다.
확장과 약탈의 역사 그리고 조작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직시해야 할 것은 그들이 걸어온 '역사적 경로'다.
노엄 촘스키가 갈파했듯, 미국의 성장은 결코 평화로운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산 과정이 아니었다.
건국 초기부터 자행된 원주민에 대한 조직적 폭력과 영토 찬탈, 그리고 흑인 노예제의 가혹한 노동 착취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지탱한 초기 자본 축적의 핵심 동력이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내부의 팽창 에너지는 국경이 닫히자 자연스럽게 전 지구적 패권주의로 진화했다.
미국이 벌여온 해외 개입과 전쟁은 우연한 정책적 실수가 아니라, 탄생 시점부터 형성된 '확장적 성장 모델'이 현대적 제도와 수트를 입고 나타난 결과다. 이 구조적 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뱉는 미국의 평화 수사학은 늘 기만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토록 불평등한 시스템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간판을 유지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가? 여기에 바로 자본권력에 포획된 매스미디어의 '동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이 개입한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의제를 대중에게 주입하는 '정교한 필터' 역할을 수행한다.
거대 자본의 광고료와 정부의 정보 독점에 의존하는 미디어는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목소리를 철저히 배제하거나 변두리로 밀어낸다. 전쟁의 비참함은 '정밀 타격'이라는 깔끔한 기술적 영상으로 치환되고,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공작은 '자유의 확산'이라는 숭고한 가치로 둔갑한다.
시민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본이 허용한 좁은 스펙트럼 내에서만 논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존재하되, 그 주체인 시민의 의식은 자본에 의해 사전에 '가공'되는 셈이다.
군산복합체 그리고 CIA시스템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수행한 수많은 군사 개입은 피침략국은 물론 미국 시민들에게도 비참한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궤적은 정치적 패배와 도덕적 혼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참혹한 실패의 이면에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챙긴 유일한 승리자가 있다. 바로 군산복합체다.
이라크전 당시 부통령 딕 체니의 전 직장인 할리버튼이 재건 사업을 독점 수주한 사례는 단편적인 비리가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아이젠하워가 퇴임사에서 경고했던 군산복합체는 이제 금융 자본과 결합하여 '영구 전쟁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들에게 평화는 불황이고 전쟁은 곧 배당이다.
국가의 혈세는 무기를 사고 군대를 유지하는 데 우선적으로 투입되며, 정작 시민들의 삶을 지탱해야 할 복지와 공공 서비스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국가라는 유기체가 기생하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세포를 스스로 갉아먹는 '숙주'로 전락한 형국이다.
CIA가 외국 정부를 전복시킨 역사는 이제 비밀이 아니다. 이란, 칠레, 니카라과에서 벌어진 공작들은 모두 자본의 이익과 배치되는 민주 정부를 붕괴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치부가 폭로된 이후 미국 시스템이 보여주는 반응이다.
미국 시스템은 펜타곤 페이퍼나 스노든의 폭로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긴' 하지만, 결코 그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폭로는 대중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소모시키는 배출구 역할을 할 뿐, 정책 결정 구조는 더욱 교묘한 비밀주의 뒤로 숨어버린다.
'알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시스템의 투명성을 과시하는 면죄부가 되는 이 기만적 자정 기능은, 자본권력이 국가를 숙주로 삼아 장기 집권할 수 있게 돕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권력의 구조는 개인보다 강하다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국가 경제를 질식시키는 달러 패권, 그리고 페트로달러 체계는 미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구조의 견고함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링컨과 케네디의 역사다.
링컨은 남북전쟁 중 민간 금융 자본에 의존하는 대신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는 '그린백' 정책을 단행했다. 부의 발행권을 국가로 되돌리려는 이 시도는 금융 기득권과의 첨예한 충돌을 낳았고, 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암살당했다.
케네디의 경우, 촘스키는 암살의 배후를 캐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가 CIA와 군산복합체, 냉전 강경파 등 권력의 핵심 기득권과 동시에 충돌하고 있었음에도, 그가 죽은 뒤 미국의 외교·군사·경제 기조는 단 한 치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철수를 검토하던 케네디가 사라지자, 존슨 행정부는 즉각 전면 확전으로 돌아섰다. 이는 미국의 시스템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어떤 개인도 거스르기 어려운 구조적 관성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자본과 권력의 구조는 '머리'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자주적 평화 주권의 길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공헌과 지난 70년 동맹의 효용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은 다르다. 자국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미국의 시스템은 언제든 한반도를 전략적 카드로 활용하거나 분쟁의 무대로 내몰 유인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뼈아픈 역사를 기억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룬 성숙한 주권 국가다.
다가올 중국과 대만 해협의 위기 국면에서 우리는 과거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참전 여부, 중립 유지, 독자적 외교 채널 구축 —그 어떤 선택이든 우리 시민의 주체적 판단과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밀실에서의 결정'은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국가가 자본이나 외세의 숙주로 된다면 역사의 역적이다.
주권자인 시민이 직접 정책의 결정 과정에 개입하고 평화의 원칙을 세우는 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