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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그림자를 읽다
자살생존자, 그들을 위한 ‘심리부검’
어쩌면 삶의 가장 진지한 질문 앞에 명확해 보이는 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치달았을 때, 그것의 처음과 끝을 알고자 한다. 끝까지 캐물어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어질 때까지 말이다. 어떤 것이 더 좋은 방법일까. 모든 진실을 모두 아는 것과 어떤 것은 놓아버리고 무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내 가슴이 견뎌낼 수 있는 만큼만 알고 싶다.
부질없이 가슴이 뛰는 걸 원치 않으니까.
안다는 것은 고통이다.
알면 알수록 고통도 그만큼 더 커진다.
-파트리지아 발두가 「100개의 4행시와 그 외 사랑의 이야기들」
2013년 1월 1일,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겠다고 결심했다. 언니의 죽음 이후,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썼던 ‘니나 상코비치’처럼 말이다. 그녀처럼 아이를 세 명이나 키우는 것도 아니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므로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단 계획이 무모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결심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책을 소개하는 심야 프로그램의 게스트가 되었다. 또 어쩌다보니, 일간지에 꽤 긴 분량의 인터뷰 기사를 쓰게 되었다. 변호사, 건축가, 요리사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처럼 전문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라 읽어야 할 관련 책들이 믿을 수 없을만큼 늘어나기 시작했다. 1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꼭 읽어야 할 책’ 읽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부활』과 『술탄과 황제』,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읽었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모리스 블랑쇼의 『카오스의 글쓰기』를 읽었다. 그러니까 모리스 블랑쇼라니. 대학 시절 ‘책세상’에서 번역된 『문학의 공간』을 읽다가 중도 포기했던 블랑쇼. ‘니체’의 아포리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블랑쇼의 책은 난해하고 읽기가 힘들다. 그의 아포리즘이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압축과 은유로 가득 찬 시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독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지 않는다. 페이지를 마구 넘기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 앞에서 멈추고, 잠시 펜을 들다가, 밑줄을 긋는 노마드적인 책읽기. 나는 그렇게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라고 적힌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부정한 언어로 쓰인 실험적인 시처럼 읽혔다. 어쩌면 휠덜린이 말한 ‘모든 것은 리듬이다’라는 말처럼 읽히길 바라는 미완성의 글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의 책은 ‘노래’나 ‘휘파람’처럼 어떤 문장 하나를 음미할 수밖에 없는 스타일로 쓰여진 건지도 모른다. 시인이 ‘티끌 같은 겨자씨’를 바라보며 그것에서 ‘우주’의 꼭짓점을 연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파른 문장과 문장 사이의 낙폭이 클수록 현기증이 일었는데, 이 책을 번역한 번역자 박준상 선생과 얘기할 때는 그제야 그의 너털웃음이 이해되었다. “책 프로그램에서 블랑쇼의 책을 소개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철학과 대학원생들도 어려워 쩔쩔매는 책인데. 담당 작가에게 처음 전화를 받고 했던 질문이 그거였어요. 대체 왜 블랑쇼 책을 하겠다느나 건대요?” 나는 그에게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읽던 대학생 시절을 얘기했다. 역시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지만 어떤 기시감 때문에 그 책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이다. 매일 책을 읽겠다는 결심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과 어쨌든 읽어야 하는 책 사이에서 무너졌다.
모리스 블랑쇼는 작가를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난독증에 빠진 독서광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H가 내게 책을 건네주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그는 내게 책을 주었다. “가능하다면 말이야. 낮이 밤이 되는 시간에 네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읽어줬으면 해”라고 말을 건네면서. 그가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했던 말들은 “김경미의 이번 시들이 참 좋아”라던가 “홍성남 신부의 책 재밌더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H가 건네준 『이별의 기술』과 『보이는 어둠』을 읽었다. 『너의 그림자를 읽다-어느 자살생존자의 고백』 (‘자살생존자’가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잃은 사람을 뜻하는 전문용어라는 건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와 『한낮의 우울』 『노란불빛의 서점』 같은 책들을 읽었다. 대부분 우울과 상실과 슬픔과 죽음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그것은 그 책들이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다는 말도 했다. 일산의 한 도서관에서 H는 책 하나를 펼치더니 내게 실비아 플래스의 시 「튤립」을 읽어 주었다.
실비아 플래스는 긴 시간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H는 언제나 ‘행복’을 ‘다행’이라고 바꿔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우울감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한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을, 그러니까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는 이미 태어나는 순간 정해져 있단 말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는 태어나면서, 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해져 있어요.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비관주의자들 덕분에 먹고 사는데, 재미난 점은 그들에게 늘 잘못한다고, 고치라고 하면서 먹고 산다는 거죠”라는 말.
튤립은 너무 쉽게 들뜬다. 이곳은 겨울이다.
모든 것이 얼마나 하얗고, 고요하며, 눈 천지인지 보라.
빛이 이 흰 벼게, 이 침대에, 이 두 손에 내려앉을 때
나는 홀로 조용히 누워 평화로움을 배우고 있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폭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내 이름과 입고 있던 옷은 간호사에게,
내 모든 지난 기억은 마취사에게, 내 육체는 의사들에게 주었다.
H는 ‘고생 끝에 낙이 아닌 병이 온다’거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로 늦은 것’이라는 말들, 속담을 꼬집어 비트는 유쾌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은 맹물처럼 담담했다. 그는 정말 보고 싶을 때조차 보고 싶다고 말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말을 앞세우느니 그 집 앞에 가서 조용히 벨을 누르는 것이 그가 아는 사랑의 문법이었다. 그는 위로가 ‘말’이 아닌 함께 ‘시간’을 견뎌주는 것이란 걸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고, 그것을 믿었다. 그는 내 주변에 얼마 되지 않는 희귀한 어른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나 자신에게 배신당한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그는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을 뒤덮은 우울증을 “끝없이, 끝없이, 끝도 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데, 그 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 그저 어두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그랬다. ‘조금도’ 보이지 않아 ‘그저’ 어두운 것. 그것이 우울증이라고 말이다. 그의 아름다운 레토릭 뒤에는 “우울증은 죽고 싶은 병이야.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끝없이 되뇌게 하는 병”이란 말이 해제문처럼 달려 있었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앨런 휠리스는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우리의 본성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둘러보고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인간의 조건을 알 것이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하기는 커녕 철저히 가려져 있다. 동물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진화하면서 우리는 지식과 자각을 얻은 동시에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 또한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기기만은 아주 밀도 깊게, 아주 두툼하게 쌓여 있다…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또렷이 보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너의 그림자를 읽다』를 읽다가 나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그날 스탠드의 불을 켜고 그에게 “모든 형태의 상실감은 우울증의 시금석이다. 이 병의 진행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고 말한 『보이는 어둠』의 한 문장을 읽어주었다. 영화 <소피의 선택>의 원작자로도 유명한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문학적 명성을 쌓아가던 1985년 가을, 불현듯 우울증이라는 깊은 어둠 속에 갇힌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영혼이 홍수에 잠겨드는 것처럼’ 찾아왔다라고 표현한다. 그때부터 자신의 우울증을 관찰하며 집필한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보이는 어둠』이다.
나는 스타이런이 말한 ‘잠긴다’와 H가 말한 ‘가라앉는다’라는 말의 유사점을 보았다. 그것은 모두 ‘젖는다’라는 동사로 무겁고 깊게 수렴되고 있었다. 스타이런은 영혼을 짓밟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절망이란 말도 했다. 그가 말하는 절망감이란 “하나의 고통에서 다른 고통으로 옮겨 다니는 상태. 절망에 빠진 사람은 어디에 가든 바늘방석이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말년의 수잔 손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그녀와 같은 백발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의 나를 기억했다. 그토록 문학적인 백발을 얻기까지 그녀가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에는 수잔 손탁의 참혹한 투병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마흔세 살 무렵, 그녀는 유방암 4기 판정을 받는다. 2년 동안 고통스러운 방사선치료를 견뎌가며 투병 중에 글을 쓴 그녀는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에세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저작을 통해 그녀는 질병에 들러붙어 있는 것들, 환자의 재활의지를 꺾는 낙인, 은유, 이미지라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적들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실천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유방암에 이어, 그녀는 1998년 자궁암 선고를 받아 절제 수술을 받는다. 그녀의 대표작 ‘타인의 고통’은 이때 구상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마저 창작의 자극제로 삼았고, 고통을 통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식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다시 한번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불치병의 타격을 받는다.
비극이 예술가에게 자양분이 된다는 말은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이 이 모든 어려움이 하나님의 시험이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불행과 그에 따른 고통이 결국 인생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예술과 종교는 비슷하다. 영화 <500일의 섬머>에서 실연당한 톰에게 한 친구의 위로는 여자를 잊는 최고의 방법은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는 헨리밀러의 말이었다. 그때 톰이 했던 말이 “젠장! 그 작자는 적어도 나보다 여자랑 많이 잤을 걸?”이란 자괴감어린 울분이긴 했지만.
언젠가 방 안에 틀어박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건 아주 오랜 시간 요가를 연마한 덕분에 스스로 자신의 성기와 성감대에 닿아 오르가즘에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상대가 없어 혼자 섹스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불현듯 그것이 자궁 속에서 자신의 손가락과 성기를 물고 있는 ‘태아’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에 놀랐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상처의 대부분은 유년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견해 역시 ‘타고 난다는 것’에 맞춰진 것일까. 영화 <비포선셋>을 보다가 9년 만에 만난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가 떠올랐다. 사고로 치명적인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건강할 때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낙천적인 장애인이 된다는 말. 결국 과거가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키워드인 걸까. 우리가 살면서 상실하는 것들 중, 무엇이 가장 비극적인 것일까.
H는 자신이 유기견처럼 누군가의 손을 놓쳐버렸던 기억을 내게 말해주었다. 어린 시절 한강에 빠져 죽은 친구의 시신을 건져 평상 위에 올려놓았던 기억이었다(그 시절에는 햇빛 아래 뉘어 놓으면 죽은 아이가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미신이 있었다고 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너무 작은 ‘관’을 구입한 탓에 또래보다 큰 친구의 시신은 관 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가난은 자식의 관을 살 충분한 돈조차 주지 않아 부모 가슴에 대 못질을 해댔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를 버릴 순 있어도 잊을 순 없다.
노희경은 <굿바이 솔로>에서 배종옥을 통해 헤어진 애인을 끝내 잊을 수 있을까 묻는 김민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잊는다는 건 어느 날 그 사람이 나타났을 때 ‘어머 누구세요?’ 아니면 그 사람 이름을 들었는데 ‘그게 누구더라?’ 하는 게 진짜 잊는 건데, 살 부비고 산 사람을 그렇게 잊을 수가 있냐? 미치지 않고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릴 순 있어도 잊을 순 없어 안 그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 엄마의 손을 놓쳐 버렸던 기억.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 그녀를 화재사고로, 그를 교통사고 때문에 잃어버리고, 순식간에 삶의 조건이 바뀌어 버리는 어느 순간. 『너의 그림자를 읽다』의 주인공은 자살한 동생 때문에 그렇게 삶이 뒤바뀐다. 지속되던 우울증. 그녀가 죽기 직전 동생의 상태를 파헤쳐 실체에 다가가는데 3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그녀는 동생의 ‘심리부검’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심리부검을 하기로 한 의사가 말한다. “심리부검을 하는 이유는 고통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자살이란 심리적 고통입니다. 하지만 미리 경고를 드려야하겠군요. 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답이 없다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어쩌면 삶의 가장 진지한 질문 앞에 명확해 보이는 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치달았을 때, 그것의 처음과 끝을 알고자 한다. 끝까지 캐물어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어질 때까지 말이다. 어떤 것이 더 좋은 방법일까. 모든 진실을 모두 아는 것과 어떤 것은 놓아버리고 무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하지만 결국 회피하지 않고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너의 그림자를 읽다』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쩌면 감정적 고통에 대한 대응 기제일지도 모른다. 우리 내면의 자아를 고찰하지 않는 태만에 대해, 시인 루실 클리프턴은 「루실 클리프턴에게 찾아온 빛」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 삶의 위험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성을 찾기 두려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빛은 고집스럽게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H가 건네준 책을 읽으며 2월이 지나갔다. 2월은 일 년 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달이다. 1월과 2월에는 언제나 그 전 해의 년도를 잘못 표기하는 오래된 악습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2013년을 2012년으로 표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H 때문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유난히 따뜻했던 2월의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생일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생일이 2월 29일이었으면 해. 생일을 치른 숫자만큼 나이를 먹는다면, 시간도 느리게 가겠지.”
난독증에 빠진 독서광을 나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답을 알지 못해 내가 아는 또 다른 질문 하나를 조용히 적어 놓았다.
깊은 밤, 그가 읽던 에밀리 디킨스의 시를 다시 읽는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책읽기다. 매일 한 권씩 읽겠다는 올해의 계획을 좌초시킨 책 프로그램은 3월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이제 공중파 방송에선 단 하나의 책 프로그램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밤 12시 40분으로 밀려난 책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너무 저조하다는 게 이유였다. 공영방송의 참으로 공식적인 책의 사망 선고였다.
아침이 밤을 보이는 사람에게
자정은 어떤 모습일까.
첫댓글 깊이 있는 내용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