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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스크랩 로마(Rome)
김의천 추천 0 조회 136 10.03.30 16: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는 테베레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 우며 로마시대에는 일찍이 고대 세계의 중심지였고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긴 시간 동안 유럽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여러 왕국과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대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로마에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전설이 있다.  이것은 BC 753년 로마의 건설자 로물루스와 쌍둥이 형제 레무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레아 실비아와 전쟁신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나 티베르강에 버려졌는데 이들을 늑대가 데려다 길렸다고 한다. 이 들은 암늑대의 젓을 먹고 자라났으며 그 후에 누가 이 도시를 통치할지를 두고 싸우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물르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왕이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그 후 역사속에서 로마인은 궁지에 몰리면 야수처럼 저항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암늑대의 이야기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그 후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계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가 되어 고대 로마 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이 곳은 카미돌리오 언덕, 첼리오 언덕, 아벤티노 언덕, 에스퀼리노 언덕, 퀴리날레 언덕, 비미나레 언덕으로 처음 집단이 이주하게 되면서 테베레강의 왼쪽에 있는 일곱언덕이 로마의 중심 거주지가 되었다.

 로마인의 도시건설은 우선 공공 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를 벽돌로 벽을 쌓고 교회당과 대하수도를 둘러싼다. 또한 로마 유적의 특징은 완벽한 복원이라든가 화련한 치장을 하지 않고 시간이 흐름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신적, 물질적 중심지로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겼으며, 인류의 예술 및 지성사에 커다란 금자탑을 쌓아올린 도시이다. 현재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로마는 1,000년 이상 유럽의 모든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제국의 영토 축소, 경제의 마비, 정치적, 군사적 무력 등으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 세력으로서의 힘을 잃었지만 입법, 교육, 건축 도시로서 전 유럽에 계속 빛을 발했다. 6-15세기에 교황들의 입지는 때로 위태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전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킨 도시로서 영광을 누렸고, 궁극적으로는 부와 힘을 되찾았으며 또다시 미, 지혜,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

 영원의 도시, '로마' 신화 속의 신들을 보낸 다음 유일신의 대리인이 살던 도시, 또한 그 신과 대립했던 르네상스의 도시, 로마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하나의 낱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이 교차하는 로마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도시이다.

 

 

1) 테르미니 역 주변

◈ 공화국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 나이아디 분수 자리잡고 있음

 

◈ 테르메 디 디오클레치아노(TERME DI DIOCLEZIANO)

 고대 로마 최대의 목욕탕이 있었던 자리에 현재는 국립 박물관과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있다.

 

◈ 500인 광장 - 역앞 광장.에디오피아 전쟁 때 최초로 전사한 500명의 이탈리아 병사를 기념

 

◈ 로마 국립 박물관(MUSEO NAZIONALE ROMANO) - 테르메 (목욕탕) 박물관

 

◈ 국립 미술관(GALLERIA NAZIONALE) - 원래는 바르베리니 궁전 - 바로크 양식(13~18미술품)

 

◈ 베네토 거리(VIA VITTORIO VENETO) - 로마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의 하나.

 

◈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SANTA MARIA MAGGIORE)

 4세기 교황 리베리우스의 꿈에 나타나 성모 마리아의 오늘밤 눈이 내린 곳에 성당을 지어라"라는 말씀에 성당을 짓게 됨.(한여름인데도 눈이 내렸다고함)

 

◈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SAN PIETRO IN VINCOLI)

 비콜리는 피에트로(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쇠사슬을 성당 제단 밑에 간수.후에 예수를 묶었던 쇠사슬과 함께 보관했더니 두 사슬이 하나가 됐다함

 

◈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뒤 봉헌한 성당.

 

 

 

2) 보르게제 공원에서 포로 이탈리코까지

◈ 보르게제 공원

 바르베리니 광장에서 베네토 거리를 따라 올라가면 272년에 세워진 아우이우스 성벽의 문인 핀치아나 문이 나온다. 이 안이 바로  보르게세 고원인데, 원래는 17세기 때 추기경인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저택으로 만들어졌다. 보르게세 가문은 13 세기  때부터 이어져온 시에나의 명가문으로, 이 공원의 정식 명칭은 "빌라 움베르토 프리모"다. 넓은 정원안에는  세계적인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이 2채, 박물관이 1채 있으며, 동물원과 승마 경기장, 분수등이 있다.

 

 

보르게제 박물관(MUSEO GALLERIA BORGHESE)

 로마 시내의 북쪽 보르게세 공원안에 있는 미술관으로 1613년 보르게세 가문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졌다가 18세기부터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 갤러리에는 베르니니의 다비드(Davide)와 아폴로와 다프네(Apollo e Dafne) 그리고 프로세피나의 약탈(Ratto di Prosepina), 안토니오 카노바의 파올리나 보르게세( Paolina Borghee) 상 등의 작품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 La Fornarina, 루벤스의 피에타(La Piet?, 1602), 보티첼리의 불후의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다.바티칸 다음으로 많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

 핀초 언덕과 테베레 강 사이. 판초 언덕에서 보면 아름답다. BC 13세기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중앙에 서있음

 

 

◈ 쌍둥이 성당 - 몬테산토의 성모 마리아 성당과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말함. 현재는 프랑스 문화원

 

 

 

3) 포로 로마노에서 콜롯세움까지

◈ 포리 임페리알리(VIA DEI FORI IMPERIALI)-

 옛날 로마 시가의 중심이 되는 황제들의 포로(FORO) 광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 포로 트리야노(FORO DI TRAIANO)-

 최대의 규모를 자랑. 여기 서있는 원주를 콜로나트라 야누스라함.  원주 안에는 올라갈 수 있는 나선형의 185 계단이 있다.

 

 

◈ 포로 아우구스토(FORO AUGUSTO)-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등을 필리피투 전투에서 격파한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만든 포로로 한 손을 치텨 들고있는 그의 상이 있다.

 

 

베네치아 광장(Plaza Venezia)

 포폴로 광장(Plaza del Poplo)에서 남쪽으로 늘어선 코루소거리(Via del Corso)의 하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로마 교통의 중심지로 6개의 주요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있다.

 광장 정면에 "하얀 웨딩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 기념관이 있다. 187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엠마누엘 2세를 기념에서 건설되었으며, 1911년에 완성된 네오클래식양식의 건물로 유명하다. 엠마누엘 2세국왕의 기마상아래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전사의 묘가 있다.

 왼쪽에는 베네치아 궁전이 있으며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콜로세움(Colosseum) - 원형 경기장

 고대 로마 유적중 가장 큰 것으로 "거대하다"라는  뜻의  COLOSSALE에서 유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극장.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혼잡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에 있는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건설하기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가 완공한 원형 경기장이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100일동안 경기가 열렸는데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며 이 곳의 명칭은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근처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인 클로소(Colossus)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거대한 건물(콜로사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로마를 상징하는 원형극장으로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로 4층이고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지름 86m를 중심으로 관객석이 방사식으로 배치 되어 있으며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는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하였다. 그리고 지하의 방에는 검투사와 사형수들이 갇혀있었는데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이 설치되어져 있었다.

 이 곳에는 5∼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오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에는 교회나 큰 건물을 짓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는 등 몹시 훼손되었는데, 18세기에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 교도의 수난의 현장으로 수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이 경기장은 로마시대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사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곳으로 검투사들의 격투시험장으로 또한 맹수들의 사냥 시합장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제정기 때에는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장내에 물을 채워 넣고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생명을 내건 검투사들의 싸움인 검투사의 격투, 맹수와 인간과의 사투와 맹수들끼리의 싸움 등이 시행되어 지는 처참하고 잔혹한 게임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 후 300년 이상이나 처참한 사투가 되풀이되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막을 내렸다. 현재는 통로와 방의 칸막이가 노출되어 있다.

 

 

성 천사의 성 (Castel Sant Angelo)

 성 천사의 성(Castel Sant' Angelo)은 바티칸에서 가까운 테베레 강에 접하여 있는 데, 본래는 A.D.2세기에 로마를 통치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기 가문의 영지(테베레 강에서 바티칸 언덕까지 그의 가문의 소유였음)의 경계 끝에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을 위하여 만든 거대한 영 묘였다. 이후 5세기초에는 로마를 방어하는 요새로 사용하였으며 10세기에는 바티칸을 방어하는 요새가 되었다. 황제의 영 묘가 성 천사의 성이 된 것은 12세기부터 이다.

 전설에 의하면 6세기말 로마에 페스트(흑사병)가 번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을 때 교황 그레고리오 마뇨(Gregorio Magno)가 페스트 퇴치를 위한 기도를 하던 중 천사가 칼집에 칼을 넣는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이후로 전염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도를 한 장소(영 묘)위에 성을 짓고 황제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천사의 대리석상을 세워 성 천사의 성이라 불렀다. 천사의 대리석상은 18세기에 들어와 청동상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15~16세기사이에는 교황들의 피신 처로 사용되었으며 한때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노의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로마 시대 개선문 중 가장 상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개선문이며, 규모가 가장 크고, 후기 로마시대의 문화 예술의 걸작품이다. 콜롯세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으며, 오른편으로 포로 로마노가 위치하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큰 이 개선문은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적 막센티우스와 치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AD 315년에 만들어졌다. 높이 21m, 너비 25m의 세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을 비롯하여, 인도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등은 모두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인데, 파리 개선문의 원조가 된 것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베네치아 광장과 콜롯세움 사이에 펼쳐진 큰 광장은 로마 시대에 정치,경제,생활 중심지였다. 포리 임페리얼 거리에서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서있는 원주가 에밀리아의 바실리카이다. 기원전 179년에 세워진 금융의 중심지로서 은행이 서있었으나, 410년의 서고트족의 로마 점령때 화재를 입었고, 그 때 녹은 화폐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서쪽에 벽돌로 된 4층 건물이 원로원 CURIA로 공화제 시대의 정치 최고기관이다. 시저가 "브루투스, 너까지도!" 라고 부르짖으며 죽어간 곳이 이 건물 앞에서였다.

원로원 앞의 지붕이 있는 유적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의 묘이다. 이 묘 앞에 있는 것이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높이 23m, 폭 25m의 당당한 문으로 세베루스 황제의 동방 변경의 승전 기념물로 203년에 세워졌다. 개선문의 정면 왼쪽에 있는 좁고 긴 좌대는 연단으로, 예전에는 키케로등 웅변가가 그 이름을 떨쳤던 곳이다. 이 왼쪽 안에 있는 8개의 원주는 로마의 농업신 사투르누스의 신전이었던 곳으로, 당시 가장 중요시 되었던 궁전이다. 12월에 있는 이 신의 축제일에는 노예도 주인과 대등한 관계를 허락 받으며,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아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풍습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원로원, 개선문 정도가 원형을 보전하고 있으며 대부분 흔적들만 남아있다. 포로노마노 안에 솟아 있는 언덕은 로마의 건국 신화가 시작된 팔라티노 언덕이 있다. 이곳은 로마 황제들과 귀족의 거주지였던 곳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살았던 집터와 리바아의 집 등 볼거리가 많이 남아 있으며 서로마 제국 멸망하기 전까지 그곳이 궁전으로 사용된 곳이다 포로노마는 무료이며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을 포함하여 8유로이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흔적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바실리카 에밀리아(Bacilica Aemilia)

 바실리카란 사법 금용, 상업등의 거래를 행하는 장방형의 공공 건물이란 뜻으로 에밀리아 가문이 B.C. 179년에 세운 바실리카·바실리카 줄리아와 함께 포로 로마노의 중심지였다. 410년 서고트 족이 로마를 점령할 때 화재를 당했는데 그 때 녹은 화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로원(Curia)

 바실리카 에밀리아의 북서쪽에 있는 4층 벽돌 건물로 B.C. 7세기 경에 세워 졌다. 높이 20m의 이 건물은 방이 하나로 바닥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라피스 니제르(Lapis Niger)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원로원 앞에 있다. 라피스 니제르란 '검은 대리석'이란 뜻으로 시저가 이 곳을 포장할 때 검은 돌로 포장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로마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의 묘라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Arcus Septimius Severus)

 라피스 니제르 바로 앞에 있는 높이 23m, 폭 25m의 개선문이다. 세베루스 황제가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에서 두명의 아들이 승리한 곳을 기념하여 세운 문으로 3개의 아치로 된 문에는 승리를 나타내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연단(Rostra)

 로마 공화제 때 정치인이나 웅변가들이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던 곳으로 원래는 원로원 앞에 있었지만 B.C. 44년에 시저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사투르누스 신전(Templum Saturnus)

 연단(Rostra) 부근에 8개의 원주가 있는데, 이 곳이 497년에 세워진 사투르누스의 신전 자리이다. 사투르누스는 로마의 농업신으로, 옛날에는 사투르누스를 위한 성대한 의식이 베풀어졌다고 한다.

 

바실리카 줄리아(Basilica Giulia)

 B.C. 54년 시저의 명에 따라 건설하기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성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큰 건물이지만 지금은 원주의 흔적만 남아 있다. 민사 재판소가 있었고, 당시 방청객들의 낙서도 남아 있다. 로마 법도 바로 이 곳에서 만들어졌다.

 

성스러운 길(Via Sacra)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서 바실리카 에밀리아, 바실리카 줄리아 앞을 지나 남동쪽으로 뻗어 있다.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4두 마차를 타고 티투스의 개선문에서 이 길을 타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 주피터 신전에 승전을 보고한곤 했다.

 

콜론나 디 포카(Colonna di Foca)

 성스러운 길을 사이에 두고 바실리카 줄리아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608년 비잔틴 제국의 포카 황제를 기념하여 세운 건물로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늦게 만들어진 기념물이다.

 

시저 신전(Templum Caesar)

 아우구스투스가 우연히 나타난 혜성을 이용하여 시저를 신격화하기 위해 세운 신전이다. 시저 유해를 화장한 뒤에 세웠는데, 지금은 제단의 흔적만 남아 있다.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Templum Castor et Pollux)

 주피터의 아들이자 쌍둥이 신인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제로 이행하던 B.C. 484년에 세워졌다. 바실리카 줄리아의 동쪽에 3개의 원기둥이 서 있는데, 원래는 88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베스타 신전(Templum Vesta)

 쌍둥이 신전 동쪽에 있는 작은 원형 신전으로 B.C. 6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신전의 성화는 6명의 무녀에 의해 1천년 동안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이 신전 안에는 로마의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무녀 베스타의 집(Casa dellae Vestali)

 베스타 신전의 성화를 지키던 6명의 무녀가 살던 집으로 베스타 신전 뒤에 있다. 현재는 1층만 남아 있는데 부엌과 식당 자리등을 볼 수 있다. 이들 무녀들은 신분이 매우 높아 황제와 대등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며, 도중에 순결의 맹세를 어기게 되면 생매장 당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

   (Templum Antoninus et Faustina)

 포로 로마노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는 10개의 기둥이 있는 신전이다. 안토니누스 황제가 황후 파우스티나의 죽음을 애도하여 141년에 세웠다.

 

막센티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Bacilica Maxentius et Constantinus)

 막센티우스 황제가 306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완성한 바실리카. 지금까지 원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구조에서 축벽이 둥근 천장을 받치는 방식의 새로운 구조로 바뀌었다.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

 유태인을 학대한 베스파시아노 황제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위한 개선문으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문이다. 문에는 전리품을 가져 오는 로마군들의 개선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아직도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팔라티노의 언덕(PALATINO Hill)

  '궁전'이라는 말의 어원인 팔라티노.

 로마 탄생의 전설이 되었던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이 언덕에서 늑대에게 길러졌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 언덕 위에 있던 네로의 궁전(Domus Transitoria)은 AD 64년 네로의 로마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네로는 폐허로 변한 팔라티노 언덕과 함께 오피오 첼리오 언덕, 벨리아 능선을 잇는 넓은 대지를 확보해 새로운 왕궁을 세우고, 화재로 인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떠넘겨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역대 황제들의 거주지인 플라비아 궁전(Domus Flavia)과 아우구스타나 궁전(Domus Augustana)과 리비아의 성(Casa di Livia)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에 한켠에 자리잡고 서있는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성당의 입구 한쪽 벽면에 진실을 심판하는 입을 가진 얼굴 모양의 원형석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의 입이다. 이 원형 석판은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원형 석판은 기원전 4세기경쯤 로마시대에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보카 델라 베리타'란 말에서 보카(Bocca)는 입, 베리타(Verita)는 진실을 의미한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그레고리팩과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코믹 로맨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졌다.

 

 

☞ 진실되지 못한 한국인

 진실의 입 오른편 벽에는 온갖 낙서가 다 되어 있다. 특히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한글로 된 낙서이다. 시 당국에서 한번 지웠지만 여전히 한글로된 낙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해 현지 교민들도 부끄러워할만큼 국제적인 망신을 사고 있다.

 

 

대전차 경기장(Circo Massimo)

 이 장방형의 길쭉한 건물은 시민들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어진 전차경기장으로 벤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1인승 이륜 전차 경기와 검투사들(글래디에이터)의 검투가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은 무너진 흔적만 남아있는데, 그 크기가 너비 664mX124m에 이른다. 이 건물은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과거에는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다. 로마의 역사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이며, 중간 중간에 계속 증축되었다.

 이 경기장은 에트루스칸 왕 때, 타르키니오 프리스코에 의해 만들어 것으로 추정되며, 트라얀(Trajan)에 의해 개축되었고, 카라칼라(Caracalla )가 확장공사를 하였다. 현재는 이 지역이 공원과 폐허만 남아 있지만 콘스탄티누스도 개축 공사에 참여하여 이 당시에만 20만명을 수용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사비니 여인의 강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 이야기와 관계가 깊은 곳으로 바티칸 미술관과 피렌체의 광장에서도 조각품을 볼 수 있다.

 

☞ 사비니 여인의 강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

 로물러스 형제에 의해 로마가 세워진 직후 여인들이 부족했었는데, 로물러스는 현재 대전차 경기장이 세워진 곳에서 인근의 사비니인들을 딸과 아내를 동반하도록 초청하여 큰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열리는 동안 로마사람들은 손님으로 온 사비니 여인을 습격하여 강간하고 남자들은 쫓아버렸다. 이 당시 여자들은 약탈된 재산으로 법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했는데, 초창기에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받았으며, 자손들이 로마에 정착한 후에도 여인들의 지위는 노예와 다름이 없었으며, 그들은 이렇게 로마 사회에 융화되었다.

 

 보통 배낭여행을 빼고는 들어가기 힘든 지역으로, 건너편에서 보면 벽면이 보인다. 이 대전차경기장의 오른편은 팔라티노 언덕이, 왼편은 아벤티노 언덕이다.

 

 

 

4)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트라스테베레 까지

캄피돌이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

 캄피돌리오 광장은 고대 로마제국의 시작으로 로물로스가 로마제국을 건국한 후, 쥬피터의 신전을 세웠던 고대로마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 황폐해진 이 언덕에 생명을 불러일으킨 것이 미켈란젤로이다.

 또한 광장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황제의 기마상이다. 이 로마황제상은 여기에서부터 남쪽으로 수킬로미터가 떨어져있는 산 조바니 인 라테라노 교회(San Giovanni Laterano)의 근처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 로마황제의 동상은 기독교인들의 손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으나 이 동상만이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뒤에 이 동상은 후세에 기마상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캄피돌리오라는 뜻은 수도라는 캐피탈(Capital)의 의미이다.

 정면에서 볼 때 우측 건물은 콘세르바토리 궁(Palazzo dei Conservatori)이며 왼쪽은 누오보 궁(Palazzo Nuovo)인데 현재는 둘다 카피토리노 박물관(Museo Capitolino)이란 명칭으로 고대 로마 유적들을 전시하고 있다. 광장 정면의 건물은 고대 로마의 폐허위에 12세기경에 세나토리오궁을 세운 것인데 현재는 로마의 시의회와 시장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캄피돌리오 광장, 좌/우의 박물관, 시청사 앞의 분수, 꼬르도나타(Cordonata) 계단 등은 모두 미켈란 젤로에 의해 설계된 것들이다. 고대로마시대에는 시청사의 우측의 좁은 길이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이 캄피도리오 언덕을 연결하는 길로 되어있었다.

 

◈ 테베레 강(TEVERE) - 가운데 있는 섬 이솔라 티베리나는 고대부터 병을 고치는 곳.

 

◈ 트라스테베라(TRASTEVERE) - 테베라 강의 서쪽이란 뜻. 일요일 마다 벼룩시장

 

 

 

5) 판테온에서 파르네제 궁전까지

◈ 산타젤로 - 천사의 성으로 잘 알려짐. 오페라 <토스카>의 최후의 장면으로 도 유명.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나보나 광장은 로마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장소로 로마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세 개의 유명한 분수에 둘러싸인 보행자 거리는 항상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커피한잔 마시며 거리의 예술가들을 보는 것 또한 로마 여행의 낭만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에는 거대한 도미찌아노(Domitian) 황제 경기장이 있고 경기장은 수세기동안 손상되지 않아 창시합과 물축제가 열렸던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보나 광장은 가로 240m에 세로 65m의 도미찌아노 경기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광장이다.

 나보나 광장에는 환상적인 세 개의 분수가 있는데, 네뚜노 분수(Fontana di Nettuno), 피우미 분수(Fontana dei Fiumi), 모로 분수(Fontana del Moro)로 양쪽 끝의 두 분수는 베르니니의 설계에 의해 17세기 조반니 안토니오 마리가 완성하였다. 이 중에서 중앙에 위치한 피우미 분수(1651년)는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명작으로 이집트에서 약탈해 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다. 피우미(Fiumi)는 이태리어로 강이란 뜻으로 나일강, 갠지스강, 라쁠라따강, 다뉴브강 이렇게 4대륙을 형상화하여 만든 작품이다.

 광장 앞으로는 까를로 라이날디와 지롤라모 라이날디에 의해 세워진 산타그네세 교회(Sant' Agnese in Agone, 1652)가 서 있다. 이 교회는 304년 젊은 성 아그네스가 배교를 강요당하여 발가벗겨져서 순교한 그 자리에 세워진 교회이다.

미네르바 광장(PIAZZA DELLA MINERVA)

 판테온 신전으로 가는 길에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베리니니의 이국적인 코끼리 상이 있다. 간단히 사진 촬영을 할 정도로 부담없이 돌아보고 판테온 신전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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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PANTHEON)

 PAN은 모든것, THEON은 신의 의미. 로톤다 광장 앞. 중앙의 천장이 뚫려 하늘의 계시를 전하려는 듯 밝은 빛이 들어옴.

 수많은 고대 로마의 기념물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이 이렇게 잘 보존되었던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카타콤배 희생자를 위한 교회로 지정을 하여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이란 뜻으로, 기원전 27년 세워진 판테온은 수적 비레의 미와 웅장한 내부 공간의 창조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건축술을 이용해 서양건축사상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곳은 오림푸스의 여러 신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이 훌륭한 건물을 미켈란젤로는 '천사가 만든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내부는 원형 평면에 16개의 화강암 기둥이 바치고 있고 본당의 직경과 천장의 높이는 43.2m로 1:1의 정확한 비율로 일치한다. 돔과 돔 입구에 있는 청동제의 문은 순금으로 깐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중세 피에트로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그곳에 금을 가져갔다고 한다 판테온 안에는 라파엘로의 석관이 왼쪽 유리 진열장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탈리아가 왕국으로 통일된 후 판테온은 이탈리아 왕들의 영묘로 쓰였는데, 오른쪽에는 초대왕인 빗토리오 엠마누엘 2세의 무덤이, 왼쪽으로는 움베르토 1세와 왕비 마르게리타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서 추방된 왕실가를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 트레비는 트리비오(TRIVIO)에서 유래.

 대양의 신 오체아누스(OCEANUS: OCEAN의 어원) 가 있고 양 옆의 석상은 풍요와 건강을 상징.

 고대 로마의 사학자 프리니오는 세계의 경이스러운것 중의 하나로 "물의 여왕"이라 일컫는 로마제국의 상수도를 꼽고 있다. 한때는 로마의 인구가 약 150만까지 육박했었던 로마제국 시절에 건설된 14객의 고가수로를 통해 물을 풍부하게 공급받은 로마는 이로 인해 아름답고 기념비적인 분수들을 많이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때 교황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상수도 시설들을 수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수로를 개발히여 물의 공급을 원활하게 했으며 이를 기념하기위해 많은 분수들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트레비분수였다. "트레비 분수"는 니콜라 살비에 의해 1732년에서 1762년 까지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성 되었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시 에서 볼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품으로서 트리톤(TRITON) 신들과 두 해마가 끌어 을린 커다란 조개 위에서 ?툰신이 위엄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대리석 조각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부랏치의 작품이다.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는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전쟁에서 돌아온 목이마른 로마 병정들에게 한 처녀가 샘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그 샘을 수원지로 한 물이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기 때문이었다.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는 물은 아우구스투스 대제때의 집정관 아그립빠에 의해 건설된 고가수로를 통해 공급되고 있으며 이곳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감으로서 다시 로마에 올수있다는 전설 때문에 로마를 다시 방문하기를 기원하는 많은 관광객들이 등을 돌리고 분수에 동전들을 집어 넣는 즐거운 광경들이 매일 연출되고 있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방법은 동전을 오른손에 잡고 트레비 분수를 뒤로하여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면된다.

 첫번째 동전은 로마에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두번째 동전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세번째 동전은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게 소원을 빌며 던진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 (Piazza di Spagna) - 가장 유행에 민감한 쇼핑 구역의 심장부.

 영화 "로마의 휴일"로 일약 유명해진 스페인 광장은 로마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명소중의하나이다. 아름다운 137개의 계단과 테라스 그 위로 삼위일체 성당이 조화를 이루며 있다. 이 광장의 남단에 17세기에 세워진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는데, 그 연유로 스페인 광장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로마의 고급 쇼핑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광장의 중앙에는 작은 배의 분수가 있다.이 분수는 베르니니 아버지의 작품이며 겨울에도 물이 채워져 있는 이 분수의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로마인들과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계단의 양끝에는 4계절의 여러 가지 꽃들이 장식되어 있으며, 계단 위로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그 위에 트리니티니 몬테 교회가 솟아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산책을 한 장소이다. 스페인 광장 주위의 집들에는 바이런, 리스트, 괴테, 스탕달, 발자크, 안데르센등 기라성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특히, 영국의 서정시인 키츠는 계단의 오른쪽에 붙어있는 집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는데, 현재는 키츠와 샐리 두 영국시인의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예술인들이 주로 다녔던 카페(GRECO)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어려 예술인들의 흔적을 볼수 있다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다. 스페인 광장 정면으로 나있는 Via.condotti 거리에 있다.

 

◈ 캄포 디 피오리 광장(CAMPO DI FIORI) - 꽃의 광장

 

◈ 파르네세 궁전(PALAZZO FARNESE) -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 현재는 프랑스 대사관.

 

 

 

6) 카라칼라 욕장에서 아피아 고대 도로까지

카라칼라 목욕탕(Terme di Caracalla)

 3세기초, 217년에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욕장에는 한번에 1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디오클레치아노(Diocleziano)의 목욕탕이 만들어지기까지 약 100년간 로마의 가장 큰 목욕탕이였으며, 만들어지고 나서 300년간 사용되었다고 한다.

 냉수, 미온수, 고온수의 욕탕에 사우나, 헬스장에 도서관, 운동장, 오락실, 휴양실, 정원, 집회실까지 있는 최대크기의 복합시설이였다고 한다. 탈의실이었다고 하는 대리석의 뛰어난 모자이크는 지금도 아름답게 남아있다.

 콜로세움에서 남쪽으로 약 1km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입구의 사이가 220m, 안까지 들어가는데 100m다. 1100㎡ 이상의 넓이로 남녀혼탕이다.

 지하철 B선 Circo Massimo역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15분 정도 걸으면 다다를 수 있다.

 

 

아피아 고대 도로(VIA APPIA ANTICA)

 ‘‘여왕의 길’이라고 불린 아피아 도로는 기원전 312년에 개통되었다. 도로는 카라칼라 목욕탕 부근의 아우렐리안 성벽의 세바스티아노 성문에서 시작되어 나폴리를 경유, 그리스의 관문인 브린디시까지 연결되어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할 정도로 도로가 발달한 로마에서 이 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바스티아노 문(Porta S. Sebastiano)에서 아피아 고대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km 정도 내려 가면 도미노 쿼바디스 성당이 나온다.

 64년 로마 대화재 때 네로 황제는 기독교도들에게 화재를 일으킨 죄를 뒤집어 씌워 박해를 가했다. 그 때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를 피해 로마 밖으로 빠져 나가는데 그리스도를 만났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보고 묻기를, “도미노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그리스도가 대답했다. “나는 네가 버린 양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에 간다.” 베드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 도미노 쿼바디스 성당은 그리스도가 나타났던 바로 이 장소에 세워졌다.

 

 

도미네 쿼바디스 성당(DOMINE QUO VADIS)

 베드로의 로마 선교이야기는 성서에는 없지만 베드로가 로마에 왔으리라는 가능성은 이미 역사가 들에게는 인정된 사실이다. 그 중 베드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성밖 아삐아가도에 있는 쿼바디스 도미네 성당이다.

 베드로는 박해가 시작되자 박해를 피해 로마성을 벗어나 도망가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세 번 부인한 것을 비롯하여 겁에 질려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가는데 난데없이 한 사람이 앞길을 가로막고 나타났다. 쳐다보니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물었다. 그러자 주님은 "나는 네가 도망 나온 로마로 십자가를 다시 지기 위해 간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대답을 듣고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다시 들어갔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순교를 당하게 된다.특이한 것은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어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 성당 안에는 들어서면서 바로 뒤쪽 가운데 바위 위에 새겨진 발자국이 하나 있다.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났을 때 남겨졌던 예수님의 발자국이라 전한다.

왼쪽을 보면 베드로의 모습이 있는데 이는 로마를 빠져 나가는 장면이다. 반면 오른쪽에는 로마로 향해 가는 예수님의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당시의 아삐아 거리의 모습 그대로의 돌길을 깔아 놓았다.

 제단 앞쪽에는 양 옆면에 두 개의 그림이 있다. 왼쪽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순교 당하는 모습이고, 오른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위의 모습이다.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은 땅에서 태어나 발을 하늘로 향하여 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인간은 하늘을 향해 가야 하는 존재임을 나타난다. 반면 예수님은 발을 땅을 향해 두시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인류를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성당 입구에는 소설 "쿼바디스"를 쓴 셍계비치의 흉상이 있다. 그는 이 소설로 인하여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로마 스페인광장 근처에 그가 소설을 쓰던 집이 있다

 

 

카타콤베 (Catacombs)

 '안식처' '흙구덩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카타콤베는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베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다.

 이후 그리스도가 공인되지 않아 그리스도 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였으며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기독교가 공인 되기까지 거의 300년 동안 박해는 끊이지 않았고 박해를 피해 지하로 피하게 되었다. 카타콤베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구 아피아 가도 부근에는 대소 25개의 카타콤베가 있고 지하통로의 길이를 합치면 500km나 된다고 하며, 이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곳은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로서 5층으로 되어 있고, 지하통로의 길이는 20km이다. 이 곳에는 3세기의 교황님들의 유골이 모두 모셔져 있고, 음악의 수호성자 성 체칠리아의 묘도 있다. 카타콤베의 형태에는 로쿨로, 포르마, 아르코솔리오, 쿠비콜로, 크립타등의 5개로 나누어진다. 로쿨로는 카타콤베 내부에 가장 많은 무덤 형태로, 내부의 지하 통로 양쪽으로 벽처럼 되어 있는 곳에 직사각형으로 구멍을 파 놓고 죽은 사람을 구멍안에 눕혀 놓고, 그 위에 천만을 덮고 무덤을 가리기 위해 뚜껑으로 막은 것이다. 포르마는 규모가 큰 공동 무덤이 있는 곳의 땅에 마련된 무덤이다. 아르코솔리오는 3-4세기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카타콤베 내부 무덤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무덤이다. 쿠비콜로는 가족묘지로 사용되었으며 내부 벽 위에는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마지막 크립타는 카타콤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소이며, 이 곳에는 주로 순교자 교황 또는 성인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공간이 넓기 때문에 교회와 같은 역활을 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모 설지전 성당 :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성 요한 라테라노 궁에서 메톨리나로 가면 로마 시에서 둘째로 큰 성 마리아 대성당에 이르게 된다. 이 성당은 또한 리베리오 교황을 기념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교황은 8월 5일 여름밤에 쏟아진 기적의 눈의 근원지인 이 곳을 찾아 성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건물은 15세기에 와서 시스또 3세가 전부 다시 건축을 했다. 이곳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전 인류의 어머니로 선언한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이 궁전을 구세주의 어머니에게 봉헌한 것이다.

 그레고리오 11세 때 지은 종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 가운데 하나이다. 시스또 5세가 다시 두 개의 부속 성당을 지어서 지금은 시스틴 성당과 바오로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베네딕도 교황 때 후가가 설계와 건축을 한 것으로 현관 윗부분은 필립보 루스티의 뛰어난 13세기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코니 윗부분에는 축복을 내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많은 사도들과 성인,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조각돼 있고 아랫부분에는 리베리오교황과 이 성당건축에 얽힌 이야기를 나타내는 조각이 있다.

 성당 내부는 길이가 86m로 중앙부와 기둥으로 조화롭게 나누어진 양쪽이 대표적인 초기교회 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기둥은 모두 하나씩으로 만들어져 있다. 천장은 줄리아노 다 산갈로 다섯줄로 나누어 105개의 우물 반자로 꾸며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천장은 신세계에서 가져온 첫 금을 녹여 도금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 입구 왼편에는 도메니꼬 폰타나와 레오나르도 다사르찌나가 조각한 니콜로 4세 기념비가 있다. 그 옆에는 클레멘테 11세의 기념비가 있다. 시스틴 성당은 도메니꼬 폰타나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제대 근처에는 베들레헴을 나타내는 구유가 있다. 시스틴 부속 성당의 벽에는 역시 폰타나가 설계한 성 비오 5세와 시스또 5세의 기념비가 있다. 바오로 성당(혹은 보르게세)은 홀라미오 폰찌오가 건축을 했고 이 성당 안에는 클레멘테 8세와 바오로 5세의 무덤이 있다. 여기 조각은 귀도 레니와 그 밖의 여러 화가가 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모께 경배 드리는 로마인>이다. 이 오래된 성상은 6세기의 작품으로 믿어지며 로마인들의 간절한 기원과 봉헌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오른쪽 돌기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안로렌쪼 베르니니의 무덤이다. 이것은 대성당의 참사 회원이었던 그의 아들 로렌쪼가 만든 것이다. 벽에는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 신앙을 신비하게 나타낸 27점의 모자이크가 있다.

 왼쪽 벽에 12점, 오른쪽에 15점이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오른쪽에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왼쪽 벽에 있다. 중앙부 전면에는 성모께 잉태를 알리는 것과 예수아기 공현, 예수가 성전에 나타나신 것과 이집트로 피난 가는 모자이크가 있다. 맨 끝의 둥그런 지붕에는 성모 마리아가 승천해서 예수께 면류관을 받는 자코포토리거의 모자이크가 있고 이 왕관 둘레에는 18명의 천사가 있다. 이 작품은 니콜로 4세의 명령으로 완성된 것이다.

 둥근 지붕에는 또한 4개의 양각으로 된 성모 승천과 예수 공현, 말구유와 기적의 눈이 내린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성세대는 1825년에 홀라미니오 폰찌오가 만든 것이다. 물로 씻기는 돌받침 옆에는 삐에뜨로 베르니니가 만든 성모 승천 조각이 있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마쎈찌오가 세운 궁전의 여덟 개 대리석 기둥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하나 서 있다. 이것은 1614년 마데르노가 여기에 갖다 놓은 것으로, 맨 위에 굴리엘모 베르트가 만든 성모와 예수의 조각이 있다. 기둥 아래에는 연못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만민들이 공경의 근원이신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 황제가 희사한 땅으로 밀찌아레 교황(311~314)이 세운 것이라 한다. 성당을 짓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노 황제의 둘째 부인이며 마쎈지오의 누이동생인 파우스타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마쎈지오의 막강한 힘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중앙부가 이중의 기둥으로 만들어져 구세주 그리스도, 세례자 요한, 선각자이며 제 4복음서를 쓴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었다. 콘스탄티노 대성당은 155년 반달족의 침입으로 빼앗겼다가 후에 성 레오네 교황 때 다시 되찾았다.

 그러나 896년에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905년에 세르지오 3세 때 재건되었다. 그후 니콜로 4세 때에 와서 많은 단장과 장식을 했으나 1308년과 1361년 사이에 두차례 걸쳐 화재로 소실됐다가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때 각각 재건된 수난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은 클레멘테 12세 때 복구된 것으로 로마 예술의 극치라고 불리울 만큼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다. 레오네 13세 때 동쪽 끝 반원형 부분을 복구하기 시작해서 1885년에 완결을 했다. 이곳에서는 신, 구교 일치를 위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1123, 1139, 1179, 1215년과 1512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정면은 알렉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으로 커다란 돌기둥에 의해 아치형으로 구분돼 있다. 지붕 위에는 14명의 사도와 성인들이 십자가를 들고 계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조각이 있다.

 내부는 중앙부와 이중의 기둥으로 돼있고 천장에는 팔을 넓게 편 교황의 조각이 있다. 중앙부 12개의 정교한 돌기둥과 12제자들의 성상은 보로미니의 설계로 된 것이고 그 윗부분의 신약, 구약의 장면을 묘사한 조각은 1659년 알렉산드로 알가르디의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양쪽 측면부는 클레멘테 8세 때 완전히 개조한 것으로 이것은 쟈코모 넬라 포르타와 카발리에레 다르피노의 작품이다. 이곳에는 1851년에 복구된 교황의 권좌가 있으며 위에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이 사용했던 낡은 나무 제대가 보존 돼 있다. 제대 아래는 시모네 기니가 만든 마르티노 5세의 무덤이 있다. 성체실과 끝부분은 1288년과 1294년 자코포토리티와 자코포 다 카메리노가 조각한 것으로 윗 부분에는 구름 위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중앙에는 4복음을 상징하는 강가에서 갈증난 양과 사슴에게 물을 주는 모습이 있다. 그밖에도 프레스코는 조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고 1300년에 성년을 선언한 보니파치오 8세 상과 마르티네쯔 추기경 기념관과 오른쪽에 있는 카사티 추기경의 무덤은 이사이아다 피사의 걸작품들이다. 조각들 가운데서 코르시니성당은 갈릴레이의 작품이며 이 부속성당에는 안또니오 몬따우티의 삐에타(성모의 통곡) 상이 있다.

 성당 앞에 있는 성 죠반니 광장에는 440년 시스또 3세가 새로 짓고 1637년에 우르바노 8세가 지금의 모양으로 다시 지은 성세소가 있다.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의 화강암으로 된 첨탑이 솟아있다. 이 화강암은 B.C 15세기의 콘스탄티노 2세가 이집트의 테베에서 배로 실어온 것이다. 이 첨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것으로 높이가 기초를 포함해서 47m나 된다. 원래 이것은 막시모 원형 경기장에 방치돼 있던 것을 시스또 5세가 이리로 옮겨와 1588년에 복원해서 라테라노 성당 앞에다 세운 것이다.

 

성 계단 성당 -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오른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명령을 받고 돌아가시던 날 몇 번씩이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오르내리셨다는 전설이 담긴 스칼라 산타라는 28층계로 된 계단이 있다. 많은 신자들은 여기에서 무릎을 끓고 깊은 존경을 바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단은 콘스탄티노 황제의 어머니였던 성녀 헬레나가 로마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성 바오로 대성당(Basilica San Paolo)

 성 바오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둘째로 큰 성당이다. 이 성당의 연원은 콘스탄티노 황제가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마침내 전향해서 사도가 되어 67년에 목숨까지 바친 바오로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운 데서 비롯된다. 386년에 티노 발렌티아노 22세 때 확장공사를 했고 그 후 테오도시오 1세 황제 때 궁전은 커다란 중앙부와 80개의 기둥으로 나눠진 다섯 개의 측량을 가진 건물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세계 제일의 큰 성당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1823년 이 성당은 화재로 소실도었다가 그 후 레오네 12세와 비오 11세 때 재건되어 1854년에 새성당으로 세워져 봉헌되었다. 화재는 비오 7세가 운명하기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교황에게는 이 비보를 알리지 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운 사도 성 바오로의 몸과 정신은 이 성당의 높은 제대 아래 잠들고 있다. 그의 묘석에는 <순교자 사도 바오로>라는 짧은 글씨다 새겨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1834년에 성당을 다시 지을 때 발견한 것으로 전문가들이 이 비문이 4세기 때 것이라고 고증을 했다. 현관은 폴레띠가 설계를 하고 베스피냐니 와 칼데리니가 건축을 한 것이다.   

 정문 앞에는 카노니카가 조각한 성 바오로 상이 서 있다. 정면은 콘소니와 아그리코라가 설계한 대로 만든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의 네 선지자를 나타내고 있다. 맨위에는 성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나란히 거느리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현대식으로 무늬를 넣는 청동문은 안또니오 마리아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말씀을 새긴 10개의 나무판이 있다. 오른쪽에는 바오로 6세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폴리에다 그레고리오 7세가 만들었던 것을 청동제로 복원한 커다란 문이 있다. 많은 선지자와 예수의 일생, 그리스도말씀을 새긴 545개의 나무판은 비잔티움 예술의 최고로 알려져 있다. 또한 문은 중세기의 빼어난 걸작의 하나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너무도 훌륭한 실내장식과 비오 9세가 손수 페인트를 칠한 36개으 프레스코가 있는 아름다운 벽이며 우물 반자로 꾸며진 정교한 천장 모습은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곳 중앙열을 따라 차례로 모두 결려 있는 역대 교황의 초상화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순서가 낮지 않다고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쪽 맨 끝의 장엄한 모습이 대성당의 끝 부분이다. 눈꽃 모양의 석고로 된 유리창으로 아름답게 비치는 햇빛은 경건한 신앙심을 자아내게 해준다. 중앙부 끝에는 성 베드로, 성 바오로의 조각이 파브리스와 타돌리니의 솜씨로 만들어져 있다. 여러 차례 다시 고쳐진 맨 끝에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다. 그 옆에는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성 안드레아, 성 루가가 있고 그 밑에는 이 작업을 완성한 교황 오노리오 3세가 있다. 바로 아래에는 십자가의 승리를 상징하는 천사와 사도, 성인들의 모습이 있다. 성당 안에는 전부 일곱 개의 제대가 있다. 교황 제대가 하나, 중앙 측면에 둘, 양쪽 부속성당에 4개가 있다. 이 대성당을 관리하는 베네딕도 수도원 이층에는 고대 콘스탄티노 대성당에서 찾아낸 비석과 글씨들, 그리고 42명의 교황을 원형 프레스코로 만든 것이 있다. 성 베드로에서부터 42명에 이르는 교황 프레스코는 대성당이 불타기 전에는 내부에 장식돼 있던 것이었다.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국가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곳은 전세계 카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불굴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홀륭한 예술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 위치와 면적

 바티칸 시티는 이탈리아 로마 시내 테베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다. 한번에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흰색 선이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짓는 국경이다.

 바티칸은 이탈리아가 19세기 들어 근대통일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교황청 직속 교황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929년 이탈리아와 교황청 주변의 지역에 대해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라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토 0.44㎢의 세계에서 가장 조그만 독립국이 되었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권은 성베드로 대성당과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로마 동남쪽 120km지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하계 관저에 국한된다. 영토 내에는 성 베드로 광장, 대성당, 교황궁전, 관청, 미술관, 도서관, 은행, 방송국, 인쇄국, 철도역, 우체국, 시장 등이 있다.

 

◐ 주의사항

 바티칸 관광 때는 소매가 없는 나시옷이나 배꼽티, 미니 스커트, 반바지, 샌들 차림의 복장을 했을 경우 입장이 금지되니 주의해야 한다.

 

 

바티칸 궁전(PALAZZO VATICANO)

 산 피에트로 성당 옆에있다. 피나코테카,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이집트 박물관, 에트루스코 박물관,비블리오테카, 지도의 화랑, 브라초 누오보, 키아라 몬티, 라파엘로의 방, 라파엘로의 복도, 시스티나  예배당등이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이 있다.

 

피냐정원

  (Pigna Courtyard or Pine-Corn Courtyard)

 이 정원은 1816년 Pirro Ligorio에 의해 만들어졌다. 거대한 청동 솔방울 분수가 있는데, 이것은 아그리파의 욕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천정화나 최후의 심판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쌤플 그림이 걸려져 있고, 내부에서는 가이드가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벨 베데레의 뜰(Cortile Ottagonale)

 관람객이 처음으로 통과하는 곳으로, 18세기에는 클레멘스 14세와 피우스 6세가 수집한 조각들이 놓여있었다. 바티칸 궁전의 전신인 이곳은 19세기 피우스 7세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뜰의 한 모퉁이에 라오콘상이 있는데 이는 16세기초 콜로세움 부근의 티투스 목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대리석상으로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걸작이다. 큰 뱀에 묶여 고뇌하는 모습은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Laoconte)이 신에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레오카레스 작품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을 로마 시대에 복사한 대리석상인 아폴로상도 꼭 봐야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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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관(Pinacoteca)

 바티칸 박물관의 입구를 들어서 안뜰 오른쪽에 있다. 비잔틴시대부터 현대까지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들 중 제8실에 있는 라파엘로의 걸작 '마리아의 대관''폴리뇨의 마리아''그리스도의 변용'은 꼭 관람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변용'은 라파엘의 최후 작품으로 아랫부분은 제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제9실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작 '산 지롤라모' 제12실에서는 마니엘리즘에 지대한 영향을 준 카라바죠와 그의 제자가 그린 '그리스도 강가'등 찬란한 예술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라파엘의 방(Stanza di Raffello)

 궁전 오른쪽 2층에 있는 4개의 방이다. 라파엘로가 이 곳의 그림들을 그릴 당시 성 시스틴 성당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가 교황과의 의견대립으로 피렌체로 귀향했을 때 라파엘로는 아무도 입실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스티나 예배당에 몰래 들어가 미켈란젤로의 예술 기법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이 방은 '화재의 방' '서명의 방' '엘리오도라의 방'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4개의 방 중 가장 아름다운 '서명의 방'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라파엘에게 의뢰하여 그렸다는 천장화를 볼 수 있다. 이 벽화 는 라파엘이 1508-11간 심혈을 기우려 그린 것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지식과 도덕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그의 대표작 '성체에 대한 토론' (1509 - 10년 제작, 너비 7.7m)과 철학의 승리를 그린 '아테네 학파'(1510년 제작, 너비 7.7m)도 벽을 마주보고 전시되어 있다.

 '엘리오도라의 방'에 들어서면 오른쪽에서부터 '레오네 1세, 아티라를 체포하다' '볼세나의 기적' '신전에서 추방되는 엘리오도라' '성 베드로의 해방'이 차례로 걸려 있고 천장화로 '아담과 이브'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은 4개의 방 중 가장 크다. 여기에는 라파엘의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그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미네르바 다리의 성전)'등이 전시되어 있다.

- 주소 : Musei Vaticani e Cappella Sistina Viale Vaticano - 00165 00120 Citt? del Vaticano

- 전화 : 06.69884947 / - Fax : 06.69885061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시스틴 성당은 시스또 4세의 명으로 1475년부터 1482년에 걸쳐 지오반니노 데이 돌치가 설계를 하고 바치요 폰델리가 건축을 한 것으로 교황의 이름을 따서 시스틴 성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성당은 교황이 비공식적인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또 교황의 비밀 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성가대와 양쪽으로 나눠진 대리석 후면은 15세기의 미노 다 휘에 솔레가 완성한 걸작이다. 양쪽 벽에 여섯 개씩 있는 12개의 그림은 모세와 그리스도의 일생을 나타낸 것으로 모세의 일생에 대한 그림은 에집트로 가는 모세(페루지노), 모세의 선택(산드로 보띠첼리), 홍해를 가르는 모세(코시모 로첼리), 코레의 아들을 벌하는 장면(보띠첼리)과 십계 그리고 모세의 죽음(구라 식뇨렐리)이 있다.

 예수의 일생에 관한 것은 예수의 세례(페루지노), 예수시험을 받으심과 나병환자를 낫게 하심(산드로 보띠첼리), 첫째 사도를 부르심(도메니코 기로란다이오), 산상설교(로쎌리와 삐에로디코시모), 천국 열쇠를 주시는 예수(페루지노), 최후만찬(코시모 로쎌리)이 있다.

 원형의 천장은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에 걸쳐 율리오 2세의 명을 받아 창세기를 프레스코로 나타낸 것이다. 제대에서부터 프레스코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는 하느님과 하늘과 해, 달, 식품, 바다와 육지, 특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는 모습과 선악과를 먹는 모습 그리고 낙원에서 내쫓기는 아담과 하와의 그림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노아의 방주와 홍수 그리고 끝으로 아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술을 마시는 노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이 그림들은 네 귀퉁이마다 나체가 된 네사람이 프레스코에 나타낸 사실을 하나 하나 설명이나 하듯 그림을 가리키고 있다. 한참 그림을 따라가면 예언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예루살렘의 장래를 알고 슬피우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천장 한 구석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만의 형벌과 구리뱀, 올로훼르바의 목을 자르는 주디따, 골리앗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제대 뒤에 있는 최후의 심판은 1535년부터 미켈란젤로가 30년에 걸쳐 천장 프레스코를 다 마친 다음에 바오로 3세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비평가들은 미켈란젤로가 천장을 만들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지구상의 인류의 불행을 나타내려는 예술적인 사명감을 갖고 있었지만 후에 가서는 예술보다는 깊은 신앙심이 더 앞섰다고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은 가톨릭 교리를 완벽하게 나타내 주고 있지만 쉽사리 설명을 하기는 아주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 맨 뒤에는 비통한 얼굴의 죄인을 심판하고 반대로 착한 이에게 상을 주시는 예수의 모습이 있다. 이 작품은 390명 이상의 인물이 나타나 있는 2백㎡가 넘는 거대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등장 인물들을 보면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안드레아, 교회를 다스리는 열쇠를 가진 성 베드로, 그 옆에는 성 바오로가 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그물을 가진 성 로렌조와 성 발도로메오가 살갗이 모두 벗겨진 채 그 옆에 있다.

 중앙에서 왼쪽에는 여인들이 서 있고 오른쪽 남자들 모습 속에는 치레네오의 시몬과 도둑이었다가 회개한 디스마가 구세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고 그 밖에 수레에 탄 성녀 카타리나와 활을 쏘고 있는 세바스티아노가 있다. 왼쪽 아래에는 구름 위의 천당에 승천한 착한 사람들이 천사의 나팔소리를 듣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나타나 있다. 지옥의 무서운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왼쪽 맨 아래에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모습이 있다. 그 가운데 동굴에는 마귀들로 가득 차 있으며 바로 오른쪽에는 지옥문이 보이고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삼도의 나룻배가 맨 아래에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여기에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긴 나귀 귀도 두 개 그려 넣었다. 시스틴 성당의 최후의 심판은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이며 바오로 3세가 트렌토 공의회에서 규정한 것 같이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처하는 최대의 작업이기도 했다.

 

 

프레스코 기법

 이태리는 대리석의 산지로 유명하다. 네로 황제 당시의 로마 대화재 이후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석조건물이다. 이 석조 건물에 벽화나 천정화는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당시에 유화가 있었다 해도, 미끌미끌한 대리석에 잘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정교하고 웅대한 작품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 피렌체의 산마르코 대성당의 프라 안젤리코의 명작은 프레스코란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졌다.

 유화가 개발되기 전에 주로 사용되던 회화 재료였던 프레스코는 이태리어로 fresco(신선한)에서 온 명칭으로 아직 덜 건조되어 젖어있는 신선한 석회벽 위에 그림을 그리는 벽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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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상을 표현하는 안료(당시는 주로 대리석의 돌가루)가 젖은 석회에 스며들어 건조하면서 색감이 침투하며 정착하게 되는 기법이다.

 프레스코 기법은 그림의 수명은 오래가지면, 그 표현 방법이 쉽지 않다. 우선 회반죽의 석회 성분을 준비하는 시간도 오랜 기간이 소요되고, 건물의 내부벽이나 천장에 그려야 하므로 오랜시간에 걸쳐 작업하게 된다.

 이 기법의 장점은 마른 벽에 그린 그림에 비해 물감이 벗겨져 나갈 염려가 없고 수정이나 보수땐 층을 끌로 긁어내고 다시 바르면 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명작 가운데는 캔버스가 아니라 벽이나 천정에 프레스코로 그려진 벽화가 많다.

 기원전부터 로마인에 의해 이미 사용되었고,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17세기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등 유화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많은 거장들이 이러한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였다.

 

 

성 베드로 성당(San Pietro)

 바로크 양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3백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황제 때 우리 종교가 공인(公認)되자, 황제는 이곳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를 깔아뭉개고 베드로의 무덤위에 성당을 지었다. 이것이 성 베드로 성전의 시초이다. 그런 후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남은 성당을 헐어내고 대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건축 미술가 브라만떼가 시작한 이 성당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당대 일류 예술가들을 거치면서 착공 120년만인 1626년에 완성됐다.

 울바노 8세 교황께서 이 성당을 봉헌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돌은 성당 초석에서부터 132m나 되는 웅대한 것으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이다.

 사원의 설계 역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부라만테로부터 시작되었다가 미켈란젤로에게로 이어졌으며, 그는 천부적인 재질로서 온 정성을 기울여 공사에 임하였다. 중앙에 치솟은 아름다운 돔은 미켈란젤로의 걸작으로, 직경 42m, 높이 44,8m이다.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은 1,510㎡의 면적과 내부 길이 186m, 안뜰과 벽의 두께까지 합하면 211m이다. 돔의 직경은 42m, 성당안의 제대는 44개, 성상이 395점, 이 가운데 대리석이 104개, 석회석이 161개, 청동이 40개, 석고가 90개이다.

 성당의 내부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일류 예술가들의 조각상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 구석 유리창 뒤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24세때에 만든 이 작품은 그가 젊었을때의 대표작이며, 두 인물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완벽한 미를 이루고 있고, 성모 마리아의 슬픔에 잠긴 성스러운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작품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서명을 남긴것으로 유명한데, 미켈란젤로의 팬들이 이 작품을 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오인하자 그가 아무도 없는 밤에 성모의 가슴부분 옷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돔 밑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베르니니의 작품 "천개"이다. 5층 건물 높이에 해당되는 이 작품은 중앙대 제대를 덮고 있는데, 교황만이 이 제대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중앙대 제대 바로 밑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 성 베드로 좌상은 그 오른쪽에 있는데, 발은 신자들의 끝없는 입맞춤으로 청동이 많이 닳아져 있다. 미켈란제로,베르니니 외에도 라파엘로, 마테르노 등 당대의 거장들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바티칸에는 시국을 경비하는 스위스 용병이 있다. 그들은 파랑, 노랑, 빨강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데, 이 제복 또한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한 것이다.

 

피에타(Pieta

o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조각가·화가·건축가인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 작품 가운데 하나. 

o 작   가 : 미켈란젤로 

o 종   류 : 대리석 조각 

o 크   기 : 높이 175cm 

o 제작연도 : 1498∼1499년 

o 소   장 :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 입구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마리아의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산 베드로 광장(Piazza San.Pietro)

 바로크 양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단순히 규모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가히 세계 최대라 할 수 있는 성당으로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이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네로 황제 때 순교한 그리스도 12제자 중 성 베드로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초기 베드로 성당은 바실리카식으로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16세기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르네상스의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 대부분이 참여하여 120년 이라는 긴 세월을 걸쳐 1626년에 완공되었다.

 

 

로마의 9개 언덕

 로마는 BC 8세기 로물루스의 형제가 로마를 건국되면서 최초의 도시 국가로 세워진 곳이 바로 팔라티노 언덕으로 현재의 위치는 대전차 경기장과 콜로세오 중간의 언덕을 말한다. 그리고 퀴리날레, 비미날레, 에스퀄리노, 첼리오, 캄피톨리노, 아벤티노 등지의 언덕에서 도시가 계속 건설되었다. 9개의 언덕이 바로 로마 건국의 시작인 언덕을 알아보자.

 

1. 팔라티노(Palatino) 언덕

 로마의 9개 언덕중 가장 오래된 언덕으로 대전차 경기장과 포로-로마노 중간의 남쪽에 있는 언덕으로 B.C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로마 건국 신화의 장소인 팔라티노 언덕은 BC 5-6세기경의 주거지와 우물터 등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제정 로마시대에 황제나 귀족들이 살았으며 궁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에도 궁전들이 폐허된 채로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궁전인 '리비아의 집(Casa di Livia)', 역대 황제의 주거지인 '아우구스타나 궁정(Domus Augustana)' '플라비아 궁전(Domus Flavia)'등이 볼 만하다.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포로 로마노는 가히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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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피톨리노(Capitolino) 언덕

 포로-로마노의 북쪽에 있는 언덕으로 해발 57m의 높이에 로마 시대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겨진 주피터 신전이 있던 곳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폐허가 ?지만, 16세기 때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노 언덕과 박물관, 광장 등의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광장에는 기하학적으로 멋진 무늬가 모이는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있다.

 

3. 첼리오 언덕

첼리오 언덕은 콜로세오 남쪽에 있는 언덕으로 로마의 상징인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 언덕이다. 울창한 숲속에는 산 조바니 에 피올레 교회가 있다. 또한 이 언덕에는 네로 황제의 정원이 있다. 

 

4. 퀴리날레(Quirinale) 언덕

 고대 로마의 시민들의 휴식처로 커다란 목욕탕이 있었던 곳으로 로마 언덕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퀴리날레 언덕에는 현재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는 퀴리날레 궁전(Palazzo del Quirinale)과 퀴리날레 광장(Piazza del Quirinale)이 있다. 16세기 말에 세워진 궁전 앞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당에서 옮겨온 오벨리스크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쌍생아의 동상이 있다.

 

5. 자니콜로(Gianicolo) 언덕

 자니콜로 언덕은 테베레 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88m로 바티칸 시국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언덕으로 언덕의 중앙에는 통일 이탈리아을 위해 충성을 다한 가리발디 장군의 기마상이 있다. 이 언덕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파르네시아(Villa Farnesina) 별장이 있는데, 별장의 벽화에는 라파엘로의 갈레테아 등 많은 벽화가 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에서 다리를 건너 가리발디 언덕으로 오르다보면 산 피에토로 인 몬트리오 교회가 있는데 교회의 뒤쪽 예배당에는 산 피에트로(베드로)가 처형을 당할 때 거꾸로 매달렸던 십자가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으나, 나는 예수님의 제자로 어찌하여 똑같이 죽을 수가 있겠느냐?" 면서 자신은 거꾸로 처형을 해달라고 하여 그대로 처형을 당했다.

 

6. 에스퀄리노 언덕 

 에스퀄리노 언덕은 콜로세오에서 바라보면 동북쪽에 위치한 언덕인데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Domus Aurea)'이 있는 자리로 현재는 폐헤속에 잔재만 남아 있다. 콜로세오를 중심으로 4대 언덕이 있다.

 

7. 핀초(Pincio) 언덕

 핀초 언덕은 테르미니역 북서쪽에 있는 보르게 공원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보르게 공원은 로마 시내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구 시가지를 포함하여 테베레 강 서쪽을 다 볼 수 있는 언덕이다. 이 언덕은 AD 4세기때 핀초 가문의 이름에서 붙어졌으며, 포폴로 광장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곧게 뻗은 대로를 따라 가면 산 피에트로 대사원이 나온다. 언덕 근처에는 아직까지 성벽이 남아 있는데, 핀초 언덕 밑에는 네로 황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지하철 A선을 타고 Flaminio에서 내리면 그 곳이 바로 핀초의 언덕이다. 

 

8. 비미날레 언덕

 언덕이라고 하긴엔 낮은 곳으로 현재 이태리 내무부가 있는 곳이다.

 

9. 아벤티노 언덕 

 아벤티노 언덕은 대전차 경기장에서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를 바라보면서 오른쪽은 팔라티노 언덕이고 왼쪽은 아벤티노 언덕이다. BC 5세게경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지만 이민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곳. 현재는 조용한 로마 시민들의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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