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말씀은 열국의 어머니이자, 아브라함의 동반자였던 사라가 127세를 수한으로 별세한다는 말씀이 기록된 부분입니다.
사라는 65세의 나이로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까지 왔고, 가나안에서만 62년을 더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90세에 믿음의 아들 이삭을 낳고 37년을 더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남편인 아브라함보다는 38년 먼저 하나님 앞에 가게 된 사라였지만, 그의 삶은 모든 후손들에게 기념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거룩하고 은혜로운 삶이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을 따라서 애굽과 그랄땅으로 다니면서 위기도 있었고, 후손 문제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었지만, 사라는 아브라함의 충실한 동반자요 반려자로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처로 들어간 것입니다.
평생의 동반자를 먼저 보내야만 하는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합니다. 그러나 곧 일어나 헷 족속의 법 절차를 따라 사라의 장지를 구입하고 장례를 모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애정이 식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천국의 소망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그 슬픔을 속히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왜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은 슬퍼하며 애통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다”라는 말씀은 극한의 슬픔을 가누면서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한 사라와의 이별을 슬퍼했습니다. 타향에서 60년이 넘는 시간을 나그네로 함께 살았던 아내의 죽음은 그를 애통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그는 절망만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극도의 슬픔에 처하게 되면, 옷을 찢는다든지,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기도 했고, 머리털을 밀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남은 인생도 하나님께 의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최종적으로 우리가 거할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곳에 가기 위해 지금을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소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늘의 백성들입니다. 즉, 이세상은 우리가 잠시 다녀가는 곳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그네로서의 본분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그네임에도 토착민처럼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가? 돌아보고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하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늘백성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게 우리의 연수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나그네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다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서 충성하게 하시고,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