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대 실권자>
1. 마오쩌둥(모택동)
*집권기간: 1949년 ~ 1976년(27년간)
*생몰: 1893년 12월 26일(중국) ~ 1976년 9월 9일 (향년 82세)
*학력: 창사 제1사범학교
마오쩌둥(모택동)은 중국의 정치인, 군인, 교육자, 혁명가, 사상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정치가이자
초대 국가 주석이며,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이른바 '모택동주의'를 창시한 사상가로 족적을 남겼으며 시인이나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초기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으며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게 연합정부론을 제의하였으나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장제스와 국민당 일파를 타이완
으로 축출했으며, 잔여 군벌들을 숙청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1949년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과 1950년 임시
국가수반을 거쳐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주석으로 재직했다. 국가주석 재직 중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1959년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뒤에는 후임 주석으로 오른 류사오치와 갈등하다가 린뱌오 등을 사주하여
1959년 류샤오치를 실각시키고 사망 직전까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이 중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논쟁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장제스를
격파하고 중국을 강대국으로 이끈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지만, 대약진 운동 실패로 약 2천 5백만
명, 문화대혁명으로 약 2천~3천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급진적인 정책이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외교관계에 입힌 물적, 인적 피해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 밖에 국공 내전과 한국전쟁 당시 기아로 사망한 약3천 5백여만 명의 사망자까지 초래함으로서 악명높은
학살자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1931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맡아 왔으며, 1949년부터
195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중국공산당 당주석에 전임
하며 사망할 때까지 실권을 행사했다.
2. 덩샤오핑(등소평)
*집권기간: 1978년 ~ 1997년(20년간)
*생몰: 1904년 8월 22일 (중국) - 1997년 2월 19일(향년 94세)
*학력: 중산대학교
쓰촨성[四川省] 출생. 1918년 프랑스로 유학,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후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 반주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
(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
이 되었다. 한편 류사오치[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
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때 홍위병
(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
[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
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華國鋒]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후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1997년 2월 19일 사망했다.
3. 장쩌민(강택민)
*집권기간: 1989년 ~ 2004년(16년간)
*생몰: 1926년 출생(현재 86세)
*학력: 중국 상하이 교통대학교 전기학 학사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 출생. 상하이교통[上海交通]대학 전기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 상하이 학생
운동권의 핵심인물로 두각을 나타내고, 1946년 공산당에 입당, 졸업 후에도 지하활동을 계속하였다. 1949년
상하이에 있는 식품공장·비누공장·전기기계공장의 서기·공장장 등을 지내고, 1955년 모스크바 스탈린자동차
공장에서 1년간 연수하였다.
1956년 귀국 후 1966년까지 창춘[長春]·우한[武漢]·상하이 등지를 옮겨가며 공장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
로 일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곧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어 10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다가,
1976년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의 책임자로 복귀하였다. 1980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
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상하이시 시장이 되고, 1987년 상하이시
당 서기장직도 맡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시위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같은 달에 개최된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이어 1990년 4월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
[鄧小平]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
하였다.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 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4. 후진타오(호금도)
*집권기간: 2004년 ~ 2012년 (8년간)
*생몰: 1942년 출생(현재 70세)
*학력: 칭화대학 기계공학 학사
본적은 안후이성[安徽省] 지시현[績溪縣]이며, 1942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장쑤성[江蘇省] 타이저우[泰州]로 건너가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후징즈[胡靜之]는
타이저우의 토산품 잡화상에서 회계일을 하였다. 1959년 베이징[北京]의 칭화대학교[淸華大學校] 수리공정과에
진학하여 하천발전 분야를 전공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한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만점을 받았다.
1965년 4월 공산당에 가입하고 석달 뒤 대학을 졸업하였다. 하지만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고 약 3년간
학과 후배들의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정치보도원(政治輔導員)으로 있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소극적으로 참여만 하는 '소요파'(逍遙派)로 지냈다. 1967년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어 간쑤성[甘肅省]
수력발전소에 노동자로 배치되었지만,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1971년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로 발탁되었다. 이 무렵 대학 동창인 류잉칭[劉永淸]과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 1974년 발전소
공사가 끝나자 간쑤성 성도인 란저우의 간쑤성 건설위원회 비서로 취임하였고, 여기서 평생 동안 그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당시 간쑤성 당서기 쑹핑[宋平]을 만났다. 1980년 간쑤성 건설위원회 부주임, 1982년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위원회 서기 및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을 거쳐 1984년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8개월 뒤인 1985년 '태자당'의 견제로 구이저우성[貴州省] 당서기로 밀려났고, 1988년에는
티베트 시짱자치구 당서기로 근무하였다. 이 기간 동안 시짱자치구에서 일어난 티베트 독립운동 진압에 성공
하면서 동시에 1989년 톈안먼 사건의 위기도 피해갈 수 있었다. 7년 동안의 지방 근무를 마친 후 1992년
49세의 나이로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로 취임하면서 권력 최정상부에 올랐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권력 7위에 오른 그는 1997년 16차 당대회에서 권력 5위로, 1998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에서는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어 21세기 중국 정치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2003년에 국가주석에, 2004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했다.
5. 시진핑(습근평)
*집권기간: 2013년 ~ (예상)
*생몰: 1953년 ~ (현재 59세)
*학력: 청화대학 대학원 법학박사
시진핑은 산시성 출신으로, 공산당 입당에 10번 실패한 태자당 계열이다. 확고한 개혁개방론자였던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전쟁 영웅 펑더화이의 측근으로 국무원 부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1962년 펑더화이
실각으로 산시 성으로 좌천당한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시기, 숙청된 아버지를 따라 농촌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1975년 시중쉰은 복권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그 후 시진핑은 1979년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
했고 같은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국무원 껑뱌오 부총리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
하였다. 샤먼 시 부시장, 푸저우 시 당위원회 서기 등 푸젠 성에서의 공직 생활을 거쳐, 2000년에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 2007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특히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 재직시 경제발전에 공을 많이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2008년 국가 부주석이 됐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정치국원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공산당 중앙 서기처 서기, 중국 국가부주석, 중앙 당교 교장이다. 부인은 중국의 국민
가수로 통하는 펑리위안(彭麗媛)이다. 개국공신인 아버지 덕분에 보수와 진보의 지지를 모두 받는 시진핑은
2010년 10월 18일 제 17기 5 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고 2013년에 주석의
자리에 앉았다.
<중국 주석/상무위원장/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