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유항검 아우구스티누스는 1756년 전주 초 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권기징의 둘째달인 어머니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지충 바오로는 이종 사촌,권상연 야고보는 외사촌이다. 그의 가문은 호남의 대부호(大富豪)였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다음 해 초에 순교한 유중성(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며,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이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된 이후 호남의 사도로 활동하면서 천주교의 조선 정착과 발전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유항검은 1784년 윤지충으로부터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집에서 권철신과 그의 문하생들이 서학을 탐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권철신의 집을 찾아가 서학을 접하고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게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입교 후 고향으로 돌아온 유항검은 가족과 친척,마을사람들,노비 등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푸는 복음을 증거하였다.
1786년 가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의 신부로 임명되어 호남지역 전교를 전담했다. 고향 전라도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성무 활동에 전념했고, 동생 유관검과 함께 진산에 사는 이종사촌 윤지충과 함께 자주 교리를 연구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가성직 활동이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때부터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큰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10월,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조상 제사를 금지령을 내리자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유항검은 교회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신주(神主)를 조상의 무덤 곁에 묻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1791년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가 모친의 신주와 제사를 폐한 죄로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이 처형되었다. 그는 일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신앙생활을 재개하여 활동하였다.
사제영입 운동의 결과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항검은 동생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지역 순방을 요청하였다. 1795년 5월 주문모 사제의 밀입국과 사목활동이 밀고되어 체포령이 내려졌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오히려 더 적극적인 사목활동을 전개하여 지방 순회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지역에 사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 무렵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장남 유중철(요한)이 동정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주문모 사제의 도움으로 같은 생각을 하는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 루갈다와 동정 부부로 혼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원했다.
주문모 신부는 1796년 9월 14일자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 안에 1795년 초 자신이 입국한지 반 년 만에 신부를 영업하고 은닉시킨 죄목으로 세 사람이 비참하게 처형된(을묘사건:윤유일, 최인길, 지황 ) 사건을 알리며, 박해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은 ‘대박청래(大舶請來)’가 최상책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이 계획은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주문모 신부의 정보제공과 요청에 따라 조선교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게 되었는데 유항검은 호남의 사도로 '대박청래'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당시 국내외 사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1800년 6월 정조 임금이 급서하였고, 1801년의 신유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지역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체포되었고, 정치권력의 속성상 정적들에 의해 죽임과 몰락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와중에 1796년 ‘대박청래(大舶請來)’사건도 드러났다. 그는 4월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참혹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주문모 사제 영입과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10월에 대역부도(大逆不道) 모반죄로 능지처참과 파가저택(破家瀦澤)을 판결을 받았다. 파가저택이란 그 가문의 흔적조차 없애고자,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드는 형벌이다. 그는 전주로 이송된 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된후 그의 목은 풍남문 누각에 내걸렸다.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 뒤, 이복 동생 유관검에 이어 11월 14일에는 두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다음 해인 1802년 1월 31일에는 부인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 마티아와 제수 이육희가 순교하면서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은 직계 가족 7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유항검은 대역부도의 역모죄인으로 선고받았기에 그의 아들 유일석(당시 6세)은 흑산도로, 유일문(당시 3세)은 신지도로, 딸 유섬이(당시 9세)는 거제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유항검은 2014년 8월 16일 방한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거행된 시복식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유항검을 비롯하여 유항검의 가족 6인의 합장묘가 전주시 대성동 치명자산 정상에 모셔져 있다.
참고: 가톨릭 굿뉴스; 한국학 중앙연구원 향토문화 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