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1-10
찬송가 266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는 환상 중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하던 하갈에게 나타나셨던 분이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신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이로부터 약 14년 후 아브라함이 99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1년 후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런 후 여호와의 사자가 죄악의 성읍 소돔을 멸하러 가셨습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이분들을 가리켜 ‘천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과 하갈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신 일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이 세 경우의 공통점은 여호와의 사자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시하실 때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시기도 하지만, 때론 꿈이나 환상이나 다른 방식으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부르실 때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지 않으시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도중 벧엘에서 유숙할 때에는, 야곱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직접 대면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광야 시대를 마친 후 가나안 정복 시대에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처럼 자주 나타나지 않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두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실 때, 모세나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에게 전달하셨습니다. 백성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호와의 사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시대가 열렸는데, 사사시대가 영적 암흑기임을 알려주는 전조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는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신 적이 있지만,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백성에 전할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기드온이 사사가 되기 전 기드온에게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삼손이 사사가 되기 전, 삼손의 부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수태 고지하시며 곧 태어날 아들 삼손을 어떻게 양육할지와 삼손이 하게 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신 이유를, 뒷부분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상태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와(1-5)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 정복 활동을 위한 거점 주둔지로 사용했던 장소입니다. 보김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길갈보다는 해발고도가 높다는 것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여호와의 사자가 이동하신 경로를 알려주므로,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보김’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김이 왜 보김이 되었겠습니까? ‘보김’의 뜻은 ‘통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이스라엘 사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통곡하였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앞으로도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있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음 구절이 알려줍니다.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상태를 사사기 1장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3일 동안 살펴보았듯이 사사기 기자는 1장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아도니 베섹을 직접 죽이지 않았던 일, 지중해 해안 지역을 완전 정복하지 않았던 일, 산지 주민만 쫓아내고 평지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다는 핑계로 쫓아내지 않았던 일,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던 일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요셉 지파가 루스 사람을 선대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스블론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 단 지파 등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잘 나타내는 증언은 ‘쫓아내지 못하였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 조약은 물론이거니와 타협이나 공존조차 절대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나안 족속이 섬기던 우상의 제단을 헐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지역 신을 섬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불러, ‘여호와만 섬기라’고 명령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소위 말하는 종교다원주의에 빠지지 말도록 당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여호수아의 명령에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대답하였지만,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지역신, 우상을 숭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가나안 정복시 우상의 제단을 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3절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해 주십니다.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남겨둔 사람들로 인해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이를 사사기와 역사서와 선지서에서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4,5절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의 반응입니다.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스라엘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그곳의 이름이 ‘통곡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보김’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소리 높여 울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단지 울음으로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울음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회개는 죄악된 삶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리를 높여 울기만 하였지, 우상 숭배의 삶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듯이 세속적 가치관이라는 우상을 동시에 믿고 따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기 이전의 삶처럼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는 삶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어도 삶이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즐기는 대상이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입니다.
사사기 2장 6절부터 첫 사사 옷니엘이 사역하기 시작 전, 사사기 3장 6절까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에 실패한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6-10)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6절은 가나안 정복 활동과 지파별로 땅분배를 했던 과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 여호수아가 정복 활동을 지휘하면서 땅을 자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결과입니다.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정복 활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겼던 시기는,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와 여호수아와 함께 일했던 장로들이 생존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겼을 때가 그때뿐이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7절에 ‘날’이 두 번 나오고 ‘일’이 한 번 나옵니다. 원문을 보면, ‘날’과 ‘일’ 앞에 ‘모든’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모든’을 한 번만 번역하였지만, ‘모든’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원문의 ‘모든 날과 모든 일’이란 여호수아가 사는 ‘모든 날’ 동안, 하나님의 ‘모든 큰 일’을 본 사람들이 ‘모든 날’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차이점을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죽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피상적으로 하나님을 알았기에, 다신(多神) 숭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주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 사사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시대,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사람의 생각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는 사사시대와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여호수아보다 더 좋은 영적 지도자이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날이 사사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믿는 자에게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광풍이 불고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뒤집힐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지하고 있다면,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셨듯이 오늘 영이신 하나님께서 내가 있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만 아니라 언제나 내 옆에 계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어 복을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과거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타산적으로 지키며 살았습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을 때에도 우는 것으로 그쳤을 뿐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중적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는 이중적 삶을 청산하게 하시옵소서. 이를 위하여 옆에 계시는 주님을 잊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보김’의 뜻이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는 여호수아와 또 누가 죽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인생에 가시와 올무가 있다면, 그것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5.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세상을 이기려면 누구를 영적 지도자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