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書有感
其一
朱熹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清如許 為有源頭活水來
其二
昨夜江邊春水生 蒙衝巨艦一毛輕 向來枉費推移力 此日中流自在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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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書, 책을 觀한다. 이 시의 맨 끝은 自在行. 書를 觀함으로써 自在에서 行으로 나아간다. 活水가 그 근원에서 흘러나오니 언제나 行할 수 있는 것. 春水는 四季의 머리[頭]에서 공급되는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 그래서 영원히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고 영원히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영원히 行할 수 있다. 行을 ‘하는 것’이 아니라 巨艦이 떠가듯이 행하는 것. 自在에서 만족하고 머물러 있지 않고 徘徊 혹은 運行한다. 徘徊 혹은 運行은 천지만물과 인간이 거기에서부터 언제나 새롭게 創發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淸하고 한 가운데로 흐른다[中流]. 自在와 行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
半畝方塘은 직사각형으로 책 모양을 하고 있다. 작은 연못에는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배회한다. 빛[光]과 그림자[影]가 공존한다. 혹은 전체[天]와 부분[雲]이 공존한다.
‘관자재觀自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이 아닐까.
‘觀自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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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의 의미는 관세음의 또 다른 표현으로 스스로 세상의 소리를 듣고 또한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인도적 신화의 관점에서 생성된 하늘의 자재한 신, 이쉬바라가 불교에 전용되어 불교적 용어로 토착화된 것이라 한다. 부처님 자신은 신격을 거부했지만 후기 대승불교에서 보살개념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최상의 궁극적 위치에 이르는 자재자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자재는 자유자재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유자재한 자재 자가 될 수 있다면 더없는 위치에 이른 것이리라. 자재가 된다는 것은 시공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범부들이 이룰 수 없는 초월적인 초월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교적 논리를 따르면 인간이 실현하지 못할 영역만도 아니다. 모든 불자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바로 자재 자가 되는데 있기 때문이다.
자재의 세계는 어디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 본래 진면목의 세계다.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뿐이다. 누구나 본래의 자리에서 떠나 있는 것이 문제다. 본래의 자리는 깨달음의 자리다. 미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리 그 자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침 곧 자재라는 말이 된다. 자재라는 단어에 관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자재 자는 홀로 있지 않다. 자재 자는 세상과 더불어 있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이라고 할 때는 이미 주관과 객관이 혼용되어 있다. 성聖과 속俗이라는 이분법적 개념 또한 혼용되어 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 밝음과 어두움, 크고 작음, 높고 낮음, 고통과 즐거움 등 온갖 상대적 개념이 혼용되어 있다. 이 상대적 세계, 곧 로카를 바라보는 관의 철학이 반야심경의 알파요, 오메가가 된다.
관자재보살, 곧 관세음보살이 대승불교에서 신격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있는 경우다. 자재의 세계는 분명 미망을 벗어난 깨침의 자리다. 그 깨침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깨침의 눈으로 세상의 신음소리와 고통의 현실을 여실히 보고 그 고통을 벗어나는 진리의 실상을 깨닫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