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장 1-22절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오늘의 본문은 욥의 세 친구 중 두 번째 사람인 빌닷이 욥에게 말한 충고이자 변론입니다. 빌닷은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며, 속에서 부아가 끓어오른 듯이 보입니다. 빌닷도 엘리바스처럼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가치관으로 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엘리바스보다 훨씬 더 거친 표현으로 욥을 공격합니다.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
빌닷은 욥이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을 듣고서 “시끄럽다. 말같이 않은 소리 하지 마! 네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틀렸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굽게 한다’라는 표현은 상업용어로도 사용이 되었는데, 상인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저울을 속일 때 사용했었습니다. 즉 빌닷의 말은 “네 죄가 1g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네 죄가 1톤이라고 저울을 속여서 벌을 줌으로 네가 이 일을 당했다는 말이냐?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네가 벌을 받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불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평가하시는 분, 상을 주시는 분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빌닷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4-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에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즉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잔인하고 무서운 말입니다.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는 빌닷의 말은 “네가 깨끗해지고 정직해지면 하나님께서 너를 돌아보셔서 네 본래의 목장을 온전하게 해 주실 것이다, 네 본래의 재산을 되찾게 해 주실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빨리 더러운 삶에서 나오고, 부정직한 삶에서 돌아서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은 욥기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가장 많이 걸려 있는 곳은 그리스도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비롯한 가게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시작하는 가게가 작고, 소규모일지라도 나중에는 체인점을 많이 가진 식품회사나 큰 기업이 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말씀으로 현판을 걸어놓은 이유의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빌립보서 4:13과 더불어 성경에서 가장 오용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말씀도 아니고, 욥의 말도 아닙니다. 빌닷의 말입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던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의 말은 ‘틀렸다’가 전체 욥기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 보면 욥의 시작은 결코 미약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양이 7,000마리, 낙타가 3,000마리, 소가 500겨리, 암나귀가 500마리 있었고, 종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욥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는 의미입니다. 당시에 욥보다 더 큰 부자는 임금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욥은 시작할 때에 경제적으로는 이미 창대했었던 사람입니다.
빌닷이 말한 이 말의 의미는 “너와 네 자녀들이 죄를 지어서 이렇게 쫄딱 망하지 않았냐? 이렇게 망하게 된 것이 죄 때문임을 인정해라.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혹 아니?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게 해 주실지?”입니다. 그러니까 미약은 돈이 없는 가난한 상태가 아니라 지은 죄로 인해서 처참하게 된 상태, 모든 가축이 없어졌음은 물론, 자녀들도 다 죽고, 온 몸에 악한 종양이 뒤덮은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빌닷의 말은 8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욥을 정죄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빌닷은 조상들의 지혜, 전통을 통해서 욥을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이 8절은 빌닷이 가진 사고의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즉 자신은 아는 것이 별로 없을지라도, 조상들의 말씀과 지혜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틀림없이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닷의 말은 엘리바스의 말보다 훨씬 날카롭습니다.
조상들의 말이 맞는 것도 많지만, 시대가 바뀌어가면서 의미가 달라진 것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10번을 찍는 것이 마음에 품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었지라도, 지금은 이내 스토커로 여겨져 처벌을 받습니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것에 의존하는 죄인은 이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빌닷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빌닷은 왕골과 갈대, 거미줄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골은 애굽의 강변이나 물의 고여 있는 늪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인 파피루스를 말합니다. 종이가 영어로 ‘페이퍼(paper)’인데, 파피루스에서 온 말입니다. 학창시절에 역사시간에 강화도의 화문석이 ‘왕골로 짠 돗자리’라고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왕골은 다량의 물이 없으면 자랄 수 없는 식물입니다.
또 갈대도 파피루스의 일종입니다. 제가 어릴 때 몇 번 가보았던, 을숙도 갈대밭은 낙동강가에 있습니다. 이 역시 다량의 물이 있어야 자라는 식물입니다. 왕골이나 갈대가 물이 없으면 이내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빌닷은 욥을 늪에 심겨지지 않은 왕골과 물가에 심겨지지 않은 갈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왕골과 갈대는 올리브나무처럼 오래 사는 식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물가가 아닌 마른 땅에 심겨져 있습니다. 이내 말라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네 삶의 근거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라비틀어지는 고난을 겪고 있으니,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미가 거미줄로 정성을 다해서 집을 지어도 이내 허물어지고 맙니다. 처음에는 작은 곤충들이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당 뒤편에, 숲속에 쳐진 거미줄이 군데군데 끊어져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거미무상, 인생무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빌닷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이러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성한 식물도 물이 없고, 뿌리가 뽑히면 이내 말라비틀어지고 말듯이, 또 거미줄을 아무리 잘 쳐놓은 것처럼 보여도 이내 다 끊어지고 말듯이, 네가 한 때 잘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재난을 당한 것 차체가 네 삶이 하나님께 불경했던 것을 반증해 준다.”라는 것입니다.
교리주의자와 같은 빌닷의 말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20-2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사람은 거두어주시지만, 악한 사람은 물리치실 뿐만 아니라 장막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욥아! 제발 악인의 길에서 나와서 의인의 길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욥은 세 친구 앞에서 죄인 중에 죄인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도행전 9장 이전의 사도 바울을 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겠습니까? 기독교의 원수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평생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13년 동안 칩거하고 있을 때에, 사람들은 그가 고향에서 소일을 하다가 생을 마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자가 되어서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이 던진 돌을 심하게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다버릴 정도였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아마 혀를 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그가 전도자로 다녔던 곳들은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가 되었고,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편지로 인해서 기독교는 기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욥은 친구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해해 주심으로 그는 믿음의 사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혹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난이나 고통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다. 혹 우리의 삶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우리 삶의 자리에 마음과 다하여 심어주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고 계심을 믿고, 오늘도 그 주님을 목적으로 살아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내가 가진 경험, 내가 배운 학문, 내가 아는 전통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잣대로 사용되지 않고, 격려의 도구로, 위로의 통로가 되게 해 주옵소서. 또한 다른 사람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그의 인생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또한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특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사람을 본다면, 의미 없는 미사여구를 던지기보다 함께 울어주고, 한 끼의 밥이라도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그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고 계심을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되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신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심으신 곳에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