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자기 문화
허 동 화(사전자수박물관장)
1997. 11. 6
보자기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生活用品으로서 실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직물(織物)을 가지고 만들어 사용했다.
보자기라는 현재의 명칭이 어떤 연유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보자기의 명칭이 변천해온 것은 사실이다. 옛 文獻에 보면 보자기가 “복(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많다. 현재의 한자로는 “보(褓)”로, 우리말로는 “보자기”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각 지방의 방언사례들을 아울러 살펴보면, 보․보자․보재기(또는 보제기) 등의 명칭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보자기라는 명칭이 형성된 과정을 추측해 보는데 시사하는 바 크다. 즉 “보” 또는 “보자”라는 이름이 보자의(褓子衣)라는 뜻으로 새겨졌다가 보자기(褓子器)로 전의된 것이 아닌가 한다. 보자기가 처음에 옷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었음은 현존하는 최고의 보자기로 알려진 선암사의 탁자보(고려 중기의 것으로 추정됨)가 卓衣라고 불린다는 사실이 그 예라 하겠다. 또, 간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싸는 보자기인 강보(襁褓)가 실질적인 의미에서 옷과 다름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외에도 보자기는 분명 물건을 덮어 가리고, 싸서 보호하는 물건이되 수(繡)를 놓거나 조각 천 등을 멋들어지게 이어붙여서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하였으니 이런 의미에서 싸여지는 물건의 옷의 개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보자기가 발달한 배경으로는 무엇보다도 住居空間이 협소했다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住居空間이 협소하므로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자리를 적게 차지하는 물건이 가재도구로서 바람직했다. 보자기는 펴서 쓸 때는 용적이 크고 운반이 용이하며, 접어 둘 때는 부피가 작고 보관이 간편하므로 자연히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자기가 발달하게 된 裏面에는 祈福信仰的인 요인도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口傳에 의하면 보자기를 福으로 지칭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거니와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는 것은 福을 싸준다는 뜻과 통했으며, 특히 각종 禮物을 싸던 홍례용보(婚禮用褓)는 이러한 의미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보자기가 물건을 치장하는 예절을 갖추는 데 쓰여졌던 사실은 儀禮的으로 발전한 배경이 될 수도 있다.
보자기의 발달 배경은 또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즉 보자기를 만드는 일은 폐쇄된 사회에서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건전한 여가 활용으로써 노동과 오락과 예술이 하나로 합쳐진 활동의 일환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록과 실제 遺物을 통해 보자기에 관해 史的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앞서 말한 바 있는 선암사 탁의(卓衣)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遺物로, 탁자보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명칭에 옷 “衣”자가 있어 보자기가 본래 옷 개념과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한 例이다. 前 전주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수보(繡褓)는 현존 수보(繡褓)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경전보(經典褓)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高麗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朝鮮朝에 들어와서는 보자기에 얽힌 史話를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朝鮮初 太宗 8년(1408년)에 前司宰監 李震이라는 사람이 入京할 때 그의 남자 종이 황색보(黃色褓)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본 司憲府 下史 金乙持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덤벼들었다. 이에 司尹 金綢까지 李震에게 가담하였으나 결국 金乙持에게 둘다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에 黃色은 중국 皇帝의 專用色이라하여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건의 결과 李震과 金綢는 命을 어겼다하여 각각 平州와 水原으로 付處되고 金乙持는 朝官을 모욕했다하여 刑杖을 맞고 쫓겨났다. 이처럼 당시에는 보자기의 사용에도 色相의 규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보자기의 色相을 규제한 事例는 또 있다. 睿宗 元年(1468년)에 庶人의 홍염의(紅染衣), 홍염복(紅染袱)을 禁하는 命이 내려진 것이 그것이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궁보(宮褓)중의 하나인 ‘학청운문단 4폭보(鶴靑雲紋緞 4幅褓)’는 顯宗(1659-1674년)의 따님 明安公主가 婚禮에 사용했던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궁보(宮褓)이다.
英祖 28년(1752년)에 刊行된「尙方定例」는 王家一家의 衣財․日用品․儀物 등을 조달하는 尙衣院에서 펴낸 것인데 恒例 1卷, 別例 2卷으로 모두 3冊으로 되어 있으며, 宮褓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보자기 관재의 귀중한 文獻으로 꼽힌다.
高宗 19년(1882년)에 刊行된「宮中機記」는 당시 東宮이었던 純宗의 혼례 때에 사용한 물품에 관한 기록으로서 그 가운데는 보자기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이상으로 보자기에 관련된 史的인 資料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이제 보자기를 몇 기준에 의해 분류해 보기로 하겠다.
보자기는 사용한 계층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궁보(宮褓)와 민보(民褓)로 구분된다. 민보는 다시 제작 방법에 따라 조각보, 수보(繡褓), 식지보(食紙褓) 등으로 분류된다.
보자기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냐에 따라서 홑보(單褓), 겹보(裌褓), 솜보, 누비보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홑보는 말 그대로 홑겹으로 꾸민 보자기를 말하며 겹보는 안감을 대어 2중으로 꾸민 것을 말한다. 솜보는 안에다 솜을 두고 겹으로 만든 보자기로서 깨지거나 다치기 쉬운 물건을 보관하는데 사용했다. 누비보는 솜을 두어 누빈 보자기이다.
文樣을 만드는 방법에 의해 보자기를 분류하면 당채(唐彩)로 그린 당채보(唐彩褓), 金粉으로 찍은 금박보(金箔褓), 보판(褓板)에 물감을 묻혀 찍어낸 판보(板褓) 등을 들 수 있다.
끝으로 보자기의 재료로 사용된 織物을 기준으로 하면 명주보(明紬褓) 사보(紗褓), 단보(緞褓), 모시보, 무명보, 베보 등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色相도 하나의 분류 기준이 될 수 있으나 주요한 기준은 되지 못하고 副次的으로 채용된다.
이제 궁보와 민보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궁보는 多目的用으로 만들어져 쓰인 민보와는 달리 단일한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
昌德宮 遺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100여점의 궁보 유물들을 조사해 본 결과, 홑보의 경우 명주나 모시 등으로 된 4, 5폭 짜리의 것이 많아 예물을 싸 두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대개 끈이 한쪽 귀에만 1-2개 달려 있어 세 귀를 접은 다음 끈으로 묶었음을 알 수 있다.
솜보는 깨지기 쉬운 물건을 함(函) 등에 넣을 때 싸는 내보(內褓)로 쓰였으므로 끈이 없는 경우가 많다. 누비 식지보(食紙褓)는 누비 뒤에 食紙(油紙)를 대어 주로 음식 그릇이나 목판(木板) 등을 덮는데 사용하였다.
「尙方定例」에는 모두 235件의 궁보(宮褓) 내역이 기재되어 있는데 4폭보가 가장 많고 옷가지를 싸둔 것이 대부분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2폭보로서 작은 예물을 싸는 데 적당했다. 그 다음으로 많은 6폭보는 函을 싸는데 알맞았다. 이밖에도 솜보로 만들어져 주로 내보로 쓰인 1폭보와 병풍이나 피륙을 싸 두었던 5폭보, 주로 칠함류(漆函類)를 싸두었던 7폭보 및 이불, 요, 장농 따위 큰 물건을 싸두던 8폭보가 있으나 각각 10件 미만이다.
궁보의 감으로는 향물인 명주(明紬)와 운문단(雲紋緞)이 믾이 쓰였고 궁보 가운데는 唐彩로 화려하게 문양을 그린 당채보도 적지 않다.
창덕궁 유물관 소장품과 그리고「尙方定例」의 기록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궁보 가운데는 장식적인 용도의 보자기, 즉 儀禮用褓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궁보에 쓰인 직물을 보면 조선조 중기까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번홍정주(磻紅鼎紬) 등의 명주가 많이 쓰이다가 후기에 와서는 광폭(廣幅)의 기계적 직물이 쓰여지면서 재래의 幅 개념은 약화되었다.
宮褓의 色相으로는 紅色系列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
궁보는 用途別, 規格別로 다량으로 제작해서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쓴 것으로 보인다.
민보의 대표적인 양식 중의 하나인 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들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즉, 조각보는 폐품 활용이라는 생활의 지혜의 소산이므로 일반 서민층에서 주로 통용되었던 틋하며 실제로 궁보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민간에서 조각보 외에도 조각 천을 활용하여 생활소품을 만들어 쓴 사례를 허다하다. 아주 작은 천 조각으로는 잣배기 베갯모나 골무를 만들고 저고리의 앞섶을 작은 오색의 조각으로 꾸미기도 했으며, 약간 큰 조각들은 실패나 조각상자 등을 만드는데 썼다. 이와 같은 조각보는 알뜰한 생활정신의 전통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각보 가운데는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이 많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조각보를 만들 때 반드시 구체적인 용도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제작 자체의 즐거움이 지배적인 동기가 되어 만든 사례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공을 많이 들인 것, 바꾸어 말해 지성을 들인 대상은 초복(招福)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재래의 俗信이 조각보 제작에 또 다른 동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조각들을 이어간다는 延長 槪念이 長壽를 축원하는 의미와 연결되어 조각보 제작을 더욱 성하게 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각보에 주로 사용한 직물은 각종 견직물(絹織物)과 모시 등속으로, 얇은 사(紗), 나(羅)종류나 모시를 쓴 조각보는 대개 홀보로 꾸며져 여름용으로 쓰였고, 비교적 두터운 단(緞)종류와 명주 등으로는 접보를 꾸며 겨울철에 주로 사용하였다.
조각보의 主調色相은 靑紅과 엷은 파스템조 색상들인데 靑紅은 전통적인 陰陽五行說에 의하면 陽色으로서 創生과 성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명주(明紬) 조각보에 지배적인 파스템조 색상은 매우 은은하여 당시의 염직(染織) 수준이 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색과 면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조각보 가운데는 하나의 造形作品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재료상의 취약점 -조형예술작품을 만들 때는 작품에 대해 미리 구상을 한 후 거기에 맞는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通例이지만 조각보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제한된 재료를 가지고 만들 수 밖에 없다- 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조각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작품을 창조해 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버려질 운명의 것이었던 보잘 것 없는 조각 천들을 모아 세련된 構成美를 창출해 낸 능숙한 솜씨와 탁월한 美的 感覺을 생각할 때 조각보는 예술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수보(繡褓)는 혼례를 비롯하여 주로 吉事에 사용되었다. 繡褓의 바탕천으로는 면직물(綿織物)이 주로 쓰였고, 안감으로는 대개 명주를 썼다. 繡褓가 바탕천으로 쓴 것은 주로 絹織物을 사용한 여타의 날수품(剌繡品)과 대조를 이루는 사실로써 이는 壽命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물건이 직접 닿게 되는 안쪽 면에 명주를 썼다는 것은 싸 두는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보(繡褓)의 문양은 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본 平面的 형식과, 정면을 바라본 立面的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어 입체감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또한 文樣이 배열된 형태는 對稱形과 放財形이 지배적으로 많다.
繡褓의 문양은 주로 나무, 꽃, 새 등의 자연물인데 일단 추상화 단계를 거쳐 세세한 부분을 捨象하고 그 자연물의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최소한 요구되는 요소만을 남겨, 절약된 生物形態的인 線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풍요로와 보이는 문양을 구사하고 있다는 데서 수보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다.
수보 문양의 상징적 의미를 民俗的인 측면에서 잠깐 살펴보자.
「나무」- 우리 나라에서 나무는 특별히 神聖視되는 자연물 가운데 하나였다. 수보 문양에서 나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보가 吉事에 쓰인 보자기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상서롭고 영험있는 자연물이 우선적으로 문양으로 取擇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꽃」- 꽃은 현세에서 富貴榮華를 누리는 富의 상징이다.
「열매」- 多福, 多産, 특히 多男을 상징한다.
「새 · 나비」- 환희나 福과 관련된 부수적인 상징문양이다. 특별히 원앙(鴛鴦)의 경우는 부부간의 금슬(琴瑟)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결국 수보에 나타난 문양들의 상징적인 의미는 한 마디로 福樂祈願으로 요약된다.
수보에도 陰陽五行說에서 말하는 자연계의 기본 색상인 五色(靑 · 赤 ·黃 · 白 · 黑)이 主調色相으로 쓰이고 있다. 特記한 것은 문양 하나하나를 수놓을 때 작은 단위까지도 多色의 선들로 매꿈으로써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동의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나무줄기나 文字의 획을 나타낼 때는 五色絲를 竝列시켜 표햔했으며, 작은 잎사귀나 열매 하나를 처리할 때도 2중, 3중의 색실을 사용하여 조화시킴으로써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게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식지보(食紙褓)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식지보는 보자기의 재료로 유지(油紙)를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민보(民褓)로서 단일한 용도-즉 상(床)이나 목판을 덮는다는-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식지보의 主文樣은 박쥐인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福과 제액(除厄)의 상징으로 쓰여 온 것이다. 그리고 문양은 종이를 오려 붙여 표현함으로써 직물보(織物褓)와는 다른 간결한 분위기를 보여 준다.
끝으로 보자기에 문양을 찍어낼 때 쓰이는 보판(褓板)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면 보판은 나무에 문양을 陽刻하여 물감을 묻혀 찍어내도록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平面褓板과 圓筒褓板이 있다. 平面褓板의 양쪽 모서리에는 하나의 무늬가 나뉘어 새겨져 있어 천에 문양을 연이어 찍으면 양끝 모서리가 만나, 끊어진 흔적 없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어 나가게 되어 있다.
원통보판(圓筒褓板)은 길다란 윤전형(輪轉形)의 나무에 빙 둘러 문양이 새겨져 있어 보자기 바탕 천에 굴려서 찍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문양이 끊어지지 않게 원하는 길이만큼 찍고자 할 때, 또는 한꺼번에 여러장의 보자기를 만들고자 할 때 능률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상으로 보자기에 관해 간략히 언급해 보았다.
보자기는 계급의 上下 구별없이 두루 쓰인 우리의 고유한 생활 용품으로서 훌륭한 民俗資料가 된다는 뜻에서 전통 보자기를 한자리에 모아 先人들의 삶의 숨결을 느껴 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동안 잊혀져 왔던 보자기 遺物의 眞價가 정당한 평가를 받고 그 문양이나 색상 등의 구성 기법이 현대의 造形藝術에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