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古木) / 신우당
바람재를 오른다. 새털구름이 마중 나온 능선 길은 풀꽃향기로 상큼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불심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온 산사(山寺),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가 지팡이 쥔 손끝을 따라 허공으로 스러진다.
백여 년 전, 천덕산(千德山) 남쪽 어깨에 자리한 직지사(直指寺) 삼성암(三聖庵)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할아버지 때였다. 내리 딸만 넷을 생산한 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에 뿌리 깊은 시어른을 뵐 낯이 없었다. 타관의 물을 먹어야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할머니는 대처로 이사를 했다. 먼 길을 마다않고 약사보전에 기도를 올린 지 세 해가 되던 해, 마침내 금쪽같은 아들을 낳았다.
늦봄 햇살은 튼실하다. 연둣빛 이파리와 계곡 물소리가 어우러진 절집 마당, 청아한 예불 소리가 산허리를 감돌아 풀어진다. 새우처럼 굽은 샛길을 돌아가면 아담한 법당을 만난다. 약사보전 돌계단 옆문으로 들어선 어머니가 힘겹게 꿇어앉는다. 자식들의 앞길을 축원하는 당신의 정성이 향 연기 따라 퍼진다. 스님의 독경 소리가, 기도드리는 어머니의 등 뒤로 은은하게 스며든다.
골 깊고 물 맑은 이 산속은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이 가득하다. 황악산(黃嶽山) 날개에서 뻗어 나와, 천 가지 덕을 품고 있다는 산 어깨에 둥지를 튼 삼성암! 이곳은 계곡의 맥박과 숲의 숨소리가 지혈을 뚫고 생동한다는 명당으로 전해진다. 절 마당 모퉁이에 해묵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부러진 한쪽 가지와 굵은 상처를 지닌 고목은 오랜 세월 암자와 더불어 살아왔다고 전해지는 벼락 맞은 보리수나무이다.
온갖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생명을 지켜온 나무가 아닌가. 고목 옆, 평상에 앉은 당신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세월을 짊어진 어머니는 긴 예불 시간이 힘에 부치셨나 보다. 뭉게구름 하나가 마당을 쓸어간다. 모진 풍상에 생채기가 드러난 나무를 보면서 어머니는 살아온 날을 되짚는다. 꽃봉오리 스물에 부부의 인연을 맺었지만, 사십 대 초에 가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날벼락이다. 당신의 삶이 이 나무와 닮았을까? 졸지에 벼락 맞은 신세가 되었다. 그때부터 몸과 정신을 부축해 준 것은 이 고목과 부처님의 힘이었다. 당시에는 20여 리 오솔길을 걸어야 참배할 수 있는 암자였다.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눈비를 뚫고 다니던 절집. 예불을 마치면 으레 이 나무 아래에서 삶을 반추하곤 했다.
벼락 맞은 보리수나무와 어머니는 무슨 인연으로 맺어졌을까? 삶이란 수많은 만남의 고리로 엮어진다. 풋풋한 새순 같은 해맑은 만남도 있었고, 캄캄한 밤 가시덤불에서 허우적거리는 절박한 만남도 많았다. 흔들리고 외로울 때 의지하고 용기를 주는 인연은 자연에서도 만난다. 그런 당신에게 이 고목과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비바람에 삶의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기도하고, 상처 난 나무와 교감하며 자신을 추스르고 살았으리라. 어머니는 현실과의 싸움이 아니라 사랑과 기도로 매듭을 풀어나갔다. 이 나무가 치유의 동반자이자 삶의 버팀목이었다.
나도 물끄러미 고목을 쳐다보았다. 벼락 맞고도 살아남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그도 오랜 세월 구도자의 자세로 지냈으리라. 새벽마다 독경 소리에 깨달음을 얻고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리라. 사계절 부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제 상처를 치료하고 신도들과 마음을 주고받았나 보다. 상처 난 나무에 새살이 돋듯 어머니도 불심으로 세파의 늪을 헤쳐 나갔다. 침침해진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말없는 대화가 끝이 없다.
산속의 햇살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솔바람 소리에 화답하는 풍경소리가 머리를 맑게 한다. 상처 난 고목을 보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고희를 턱밑에 둔 세월에 와 있다. 나는 얼마나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살아왔을까? 굵게 주름진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만 앞선다. 험난한 절벽과 깊은 연못이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뇌졸중으로 생사를 헤맨 가장을 대신한 당신의 삶은 파란만장한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올망졸망한 어린 오 남매의 인생을 짊어지고 지탱해온 작은 어깨가 숨 쉴 때마다 햇살 속에 오르내린다. 어디서 그렇게 살아갈 힘을 얻었을까? ‘비교하지 마라’ ‘따지지 마라’라는 가르침이 있는 절집. 오직 불심과 고목과의 교감 덕이리라. 말없이 나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부처님의 형상이 떠오른다.
진달래 피고 벚꽃 지는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그날 이후 당신은 삼성암을 다시 찾지 못했다. 큰 수술로 어렵게 지탱하던 허리가 문제였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병원의 침대 머리맡에는 늘 조그마한 암자 달력과 염주가 자리했다. 찾아뵐 때마다 어머니의 손에는 염주가 떨어지지 않았다. 보리수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이다. 그것을 돌리며 암자의 고목과 대화하는 듯하다. 이제는 간병인과 휠체어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 힘들지만, 새벽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벼락 맞고 살아난 보리수나무의 삶과 흡사하다.
지난 밤 비바람에 봄꽃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음이 스산하다. 어머님은 잘 계시고 있을까? 문득 거실 책장 유리에 꽂힌 암자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 겨울, 어머니와 함께 가서 찍은 사진이다. 절집 마당을 덮은 하얀 눈과 종무소 앞의 고목이 또렷하다. 굵은 주름만 가득 찬 당신의 얼굴이 벼락 맞은 보리수나무와 겹쳐져 눈가가 촉촉해진다.
벼락 맞은 고목과 어머니의 삶이 치유된 천덕산 삼성암! 다시 천년 세월 중생을 구제하려는 약사보전 예불소리만 풍경소리에 얹혀 세상을 어루만진다.
첫댓글 2022년 대구일보 주최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