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8대명당 藥峯 서성 先生墓所
가 . 藥峯 서성 先生
서성(徐渻, 1558~163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생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字)는 현기(玄紀)이며, 호(號)는 약봉이다.
1558년(명종 13) 5월 19일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에 있는 외가에서 출생을 하여, 생후 1년 반만에 부친을 여의게 된다. 세 살 되던 해(1560년)에 오늘의 서울역 뒤 중림동 천주교당 터인 약현동(약전현, 藥田峴)의 둘째 큰 아버지 집에 의탁이 되어 글을 배우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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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에게서 배워 1586년 29세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 회령(會寧)에 이르렀을 때,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난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窘)․황정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끌려가다 도망쳤다. 뒤에 경성(鏡城)에서 병사를 일으켜 평사(評事)를 제수받고 이내 국경인을 토벌하였다.
조정에서는 약봉이 문․무(文武)를 겸하였음을 알고 각 도의 관찰사로 내려 보냈으나, 그 일 역시 무리 없이 수행하였다. 혹 사람들이 오늘날 인재가 있느냐고 물으면 이항복은 거침없이 약봉을 으뜸으로 꼽았으며, 선조 때에는 이름 있는 일곱 신하의 한 분으로도 불리었다.
뒤에 삼남(三南)의 암행어사를 거쳐 경상우도 감사와 동부승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관찰사 등을 두루 걸치면서, 전쟁수행과 민심수습에 진력을 하였다.
난이 끝난 후 도승지가 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고, 뒤이어 형조와 병조판서를 지낸다.
약봉은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였고, 또한 정철(鄭澈)․성혼(成渾)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류되어 단양(丹陽)과 영해(寧海) 등지로 11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이 있자 다시 등용되어 형조 판서에 대사헌을 지내었다.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병조 판서에 오르고,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되었다. 서화(書畵)를 즐기고, 역학(易學)에도 밝았다고 하며, 74세에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 내려졌다
< 계축옥사 >
약봉이 계축옥사 때 반역죄에 연루되어 광해군이 친히 국문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약봉은, “저희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미천하여, 사족(士族)이 된 지 4백 년 동 안 왕실과 혼인한 일이 없으니, 이 것이 첫째로 불가한 것이요.
저희 5대조 이하 모두 50~60살로 생을 마치었고, 죽은 아비와 백부는 나이 20 살에, 중부(仲父)는 45살에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단명한 집안이라고 호가 났으니, 이 것이 둘째로 불가한 일이요.
저희 어미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지나치게 슬퍼하고 상심한 나머지 30도 못되어 머리가 세 고 이가 빠졌으며, 46세에는 두 눈이 완전히 멀어서 지금은 날씨가 흐리 고 맑음과 검고 흰 것을 가리지 못하여 영원히 폐인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세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라고 거침없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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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조선 8대명당 藥峯 서성 先生墓所
1. 위치 : 경기도 포천시 포천읍 설운리 ( 경기 기념물 제 35 호)
경기도 포천시 포천읍 설운리에는 약봉 서성 묘를 비롯하여, 그 옆 자락에, 아버지, 서해(徐해)와 조부인 서고(徐固)의 묘소가 함께 자리를 잡고있다.
포천읍에서 43번 국도로 의정부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운설리가 있는데, 마을 진입로 오른쪽에는 곡장과 커다란 신도비가 있는 약봉(藥峯) 서성(徐渻)의 묘가 있다.
신도비는 마모가 심하여 문자를 알아 볼 수 없고 오랜 세월에 이끼가 끼고 거무스레한 호석은 세월의 무개를 더해준다.
묘비에는 생전의 벼슬이 나열되어 있고 끝쪽에 ‘贈諡忠肅徐公之墓’라고 쓰여 있다. 곡장(曲墻)도 단아하고 문인석도 아담하여 품격있는 묘소이다.
2 . 形氣論
한북정맥이 남서진(南西進)으로 내려오다, 의정부의 축석령 어름의 백석이 고개까지 진행을 한다. 여기에서 한 맥을 북쪽으로 분지(分枝)하여, 주맥(主脈)은 의정부를 거쳐 도봉산으로 나가고, 분지 된 맥은 내려오던 방향을 다시 역(逆)으로 취하는 천보산맥(天寶山脈)이 된다.
이 용맥(龍脈)은 포천 방향으로 북진(北進)하다가, 회암사가 있는 회암령을 지나서, 해룡산, 왕방산, 국사봉(754m), 소요산(532m)을 걸쳐 종현산(589m)까지 이어지다, 한탄강(漢灘江)으로 합류(合流)되는 영평천 앞에서 그 맥(脈)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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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묘는 해룡산(661m)을 주산(主山)으로 앞에는 넓은 들이 내려다 보인다. 예전에 이 해룡산 위에는 감지(鑑池)가 있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하며, ‘군마(軍馬)가 산 위를 짓밟으면 비가 오지 않으면 구름이라도 낀다고 한다.
약봉과 부모, 조부모 묘를 일군 주룡(主龍)은 해룡산으로 들어온 한북정맥이 오치재에서 크게 과협(過峽)을 하다가 여기서 한 맥이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몸 자락을 낮춘 양룡(陽龍)으로 진행하여 기복굴곡(起伏屈曲)등 몸뚱이를 흔들며 벌판을 건너서, 부대뒤쪽에 있는 나지막한 현무봉을 솟구쳐 놓는다.
현무봉을 출발한 내룡(來龍)은 평지에 바짝 엎드려 행룡을 하는데, 주산인 해룡산이 가는 방향과는 역(逆) 방향으로 들어와 군부대 담장 아래에다 묘역을 일구었다. 좌측자락에는 약봉 묘가 있고, 약봉 묘의 백호가 되는 우측자락, 아래쪽에는 조부모 묘, 위쪽은 부모 묘를 조성하여 소위 말하는 역장(逆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3 . 理氣論
약봉 묘소 뒤 용진처를 간심(看審)하고자 부대 담장에 바짝 붙어 부대 안쪽을 주시한다. 힘을 실은 용(龍)이 좌우로 몸을 뒤틀며, 완만한 경사를 형성하면서 내려온다. 용(龍)의 생김새가 후덕하고, 튼실한 허리와 함께 부룡(富龍)처럼 보이는 기계(氣系)가 넘치는 용이다.
묘소 앞에 전개되는 명당(明堂)은 평탄 원만한 모습으로, 짜임새가 있고, 명당 주위에서 나온 물이 명당으로 모여드는 당전취합(堂前聚合)의 국세가 되어 포근하리 만큼 안정된 모습이다. 그러나 약간 먼 감이 있는 안산(案山) 바로 앞으로 아파트가 들어서 이미 안산의 조망은 차단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선(右旋)으로 들어오는 입수룡(入首龍)이 계방(癸方)에서 머리를 파묻는다.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물은 우측에서 나와 묘소 앞을 감싸고 좌측으로 흘러 나가다 사방(巳方)으로 파구(破口)되는,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길향인 정양향(正養向)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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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약봉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소로 옮겨 용혈사수(龍穴砂水)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훤하게 보이는 주산인 해룡산과 왕방산이 살기(殺氣) 한 점 없는 수려단정(秀麗端正)하고, 양명(陽明)한 큰 덩치로 우뚝 서서 이곳 묘소를 우측에서 응기를 한다.
묘소 뒤 만두(巒頭)로 이어지는 용맥은 약봉 묘보다 더 활발하게, 작은 능선으로 들어온다. 입수룡은 혈처를 감싸안으면서 약 30。를 굴절(屈節)하다가 작은 분지(盆地)를 일구듯이 좌선룡(左旋龍)으로 들어와 혈장을 작혈(作穴)하였다.
또한 완만한 전순아래에 붙어있는 하비사(下臂砂)가 혈을 감싸주면서 생기(生氣)를 갈무리한다.
주변 산세도 청룡 백호를 비롯하여 어느 것 하나 이곳을 배신하거나 홀대하는 사격은 보이지를 않는다. 주변의 많은 산자락들이 중첩으로 혈(穴)을 감싸주며 응기(應氣)를 해주니 분명 이곳 터로 기를 뭉쳐놓은 정혈(定穴)임이 틀림없다. 그것도 부모 묘가 아닌 그 아래에 있는 조부모 묘로 정확히 입혈(入穴)을 한듯하다. 즉, 정확한 정혈처(定穴處)는 약봉의 묘소가 아닌 조부모의 묘소로 연맥(連脈)을 하여, 한미한 대구서씨들을 조선 선조 이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아닐까?.
좌선(左旋)으로 들어오는 용맥은 입수일절(入首一節) 축방(丑方)에 머리를 파묻는다. 물은 우수도좌(右水到左)하다가 종견처(終見處)는 사당건물을 지나서 약봉 묘 끝자락이 되는 병방(丙方)에 파구(破口)된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은 이 묘는 정음정양법의 순청(純靑)이 되어 합당하다. 또한 사대국법(四大局法)과 후천수법(後天水法)으로는, 녹존유진패금어(祿存流盡佩金漁)와 녹존파(祿存破)가 되어 길수(吉水)가 되었다.
우리는 풍수를 배우면서 항상 용진혈적(龍眞穴的)한 혈장을 우선적으로 찾게 된다. 그래서 명당 터란 항상 용혈(龍穴)이 우선이고 사격(砂格)과 물은 차지(次之)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듯이, 비록 청룡 백호나 물의 방위가 약간 부실할지라도 결국 혈(穴)을 맺게 되는 것은 용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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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전하는 이야기
약봉의 부친이 장가를 가기 위하여 규수가 있는 마을앞 주막에서 다리를 쉴 때, 일행을 보고 주모가 어느 집으로 장가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어느 댁이라고 답하자 그 주모는, “다 괜찮은데 한 가지가․․․․․․” 라며 혀를 찼다. 연유를 물으니 그 규수는 눈이 어둡다는 것이었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서거정(徐居正)의 후손으로 감히 그런 집안에 장가를 들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돌아가자는 삼촌의 재촉을 뿌리친 약봉의 부친은, “그 규수가 나 아니면 어찌 시집을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이니 장가를 들겠읍니다.” 하고는 규수댁으로 향하였다. 규수를 보니 인물도 좋고 학덕도 갖춘 휼륭한 처녀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혼인을 하였다.
그 뒤 약봉의 모친은 일찍이 남편을 잃고 한양의 약현(藥縣)이라는 곳에서 생계를 위하여 술과 약과(藥果)를 팔았다. 술맛과 약과의 맛이 어찌나 좋았는지 사방으로 소문이 나 부자가 되었다. 그 후 자식들이 장성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가세도 늘어 집을 새로 짓게 되었다. 자식들이 새로 지을 집의 규모를 상의하자 모친은, “마루가 12간이나 되는 큰 집을 지어라. 조만간 그 집도 좁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정작 얼마 가지 않아 자식들이 하나 둘 과거에 급제하고 후손이 번성하니, 마루가 좁아 큰 일을 치룰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눈이 어두면서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건물의 크기와 잘못을 일일히 지적하였다. 오늘날의 약주(藥酒)와 약과(藥果)는 이 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전하며, 달성 서씨는 그 후 많은 고관 대작을 내었음은 물론이다. 지금 서울 중구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고개인 약현(藥峴)이란 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의 어머니 이씨는 거의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을 보지 못했는데, 약전현에서 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약봉을 공부시켰다.성한 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이 어찌 쉬웠겠냐 만은, 어린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결국, 한미(寒微)한 약봉의 집안(대구 서씨)을 명문가로 일구어 놓은 장본인이다. 약현동이란 지명도 약봉의 어머니가 빚은 술과 떡에서 유래된 동명이다.
약봉이 대성(大成)하였을 때다, 약봉의 어머니가 만든 떡과 과자 그리고 술은 장안의 유명한 명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직접 약봉의 어머니를 궁 안으로 불러들어 떡과 과자와 술을 진상하도록 하였는데, 그 맛에 반한 임금이 직접 약과와 약주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4남, 서경주가 선조의 큰딸 정신옹주(貞愼翁主)의 부마가 되고, 선조 말년의 유교(遺敎)를 받은 칠신(七臣)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연루되어, 11년 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형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때는 강화도로 인조를 모시고, 호종(護從)하는 등 활약을 하다가 1631년(인조 9) 4월, 74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생전에 다섯 아들과 함께 손자 13명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넷째 아들 서경주는 정신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서경우의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현종 때 병조참판과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은 숙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한때 약봉의 자손들이 너무 현달(顯達)하다보니, 왕이 하루는 용상(龍床)에 앉아 백관(百官)들을 바라보다가 거의 서씨들이 도열한 지라, 임금이 농담하기를 "허! 조종 안에 늙은 쥐가 새끼 쥐들을 데리고, 조당(朝堂)을 가득 메우고 있구려" 하였다고 할 정도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