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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6-8(345)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2023.12.31.(송구영신예배)
2023년을 마무리하고 2024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 한해를 이끌어주신 하나님에게 먼저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립니다.
2023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다들 바쁘고 분주하고, 그리고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린 하루하루였나요? 그렇다면 후회 없이 잘 살아 오셨던 2023년이었습니다. 농땡이를 피우면서 그냥 대충 대충 시간만 죽이는 모습으로 의미 없이 2023년을 보내셨나요? 이런 불성실한 나의모습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다가오는 2024년에는 더 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각고하고 결단하는 이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연말연시를 앞두고 마음 맞는 몇 분의 목사님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다가 이런 공통되는 모습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느긋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급 해진다”는 점입니다. 다들 목사님들이 말하기를, 나이가 들수록 조급해져서 일을 잘못 판단하고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저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저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300여년전의 사람이었던 요한 웨슬레 목사님(1703-1791)의 설교집에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마귀는 조급하게 하고 서두르게 합니다. 그래서 실수하게 하고 일이 안 되게 하지요. 마음에 조급한 생각이 들면 일단 그 일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하나님은 느긋하게 하고 막힘이 없이 잘 흐르게 합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하고 일이 잘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처럼 보여도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조급함으로 결정하기 보다는 ‘한번만 더 기도해 보고 결정합시다’라는 말이 인생의 방향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는 구절을 읽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이든 서두르면 안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이 앞어서 서두르면 실수 합니다. 2023년에 혹시 여러분이 서둘러서 일을 망쳐 버린 경험은 없으신가요? 너무 조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서 자신이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나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하루를 기다려 보세요. 하루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결심이 선다면, 그 일을 결정해도 됩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하루 정도 숙성시켜서 결정을 하세요.
세상 만사가 기다림의 미학이 담겨 있습니다. 제 아무리 신선한 한우고기라고 해도 방금 잡은 한우는 맛이 없다고 합니다. 잡아서 적어도 하루 이상 숙성을 시켜야만 가장 맛있는 한우의 맛을 느낀다고 합니다.
가끔 고기집에 방문하면 이런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메뉴를 보니 <숙성된 고기>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갓 잡은 고기가 더 신선해서 맛있을 것 같지만, 갓 잡은 고기보다 며칠 숙성한 고기가 훨씬 부드럽고 더 맛있다고 합니다.
이제 조만간에 햇감자가 나올 것입니다. 겨울철 별미인 감자도 그렇습니다. 밭에서 방금 캔 감자는 싱싱할지는 모르나, 바로 먹기에는 너무 독하여 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며칠 숙성된 감자가 더 풍부한 맛을 낸다고 합니다.
제 아무리 신선한 한우고기라고 해도 방금 잡은 한우는 맛이 없다고 합니다. 잡아서 적어도 하루 이상 숙성을 시켜야만 가장 맛있는 한우의 맛을 느낀다고 합니다. 빵을 만드는 밀가루 반죽도 그렇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해서 바로 빵을 만들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해서 못 먹습니다. 겨울철 별미인 감자도 그렇다고 합니다. 밭에서 방금 캔 감자는 싱싱할지는 모르나 바로 먹기에는 너무 독하여 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 병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하루 하루 돈을 조금씩 모아서 큰 목돈을 만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전에는 “티끌 모아 태산이다”라는 구호가 유행하여 사람들은 적은 돈이라도 모아서 목돈을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비꼬아서 “티끌은 모아 보았자 티끌”이라고 비아냥 거립니다.
이런 조급함이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도 콩나물 자라듯이 쑥쑥 자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한꺼번에 왕창 받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결코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의 성숙과 <거룩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정금 같이 쓰시기 위해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게 했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히 쓰시기로 작정하실수록 거룩한 사람을 위해 많은 준비를 시키십니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랍니다. 호박은 6개월이면 자랍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흘러 자란 나무가 남대물 대들보가 되고 경복궁 대들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참나무와 같은 인물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비록 내가 하나님에게 드린 기도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충분하게 받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듯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 또한 인생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고백의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2023년을 마무리하고 2024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점검하고 진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6-7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전제>는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 위에 붓는 일종의 제주(祭酒)를 의미합니다. 제주를 붓는 행위는 희생 제사의 마지막 의식으로서 바울 자신의 희생적 순교를 상징합니다. 바울 자신이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예견하고, 남은 생명을 그리스도와 온 교회를 위하여 산 제물로 순교의 제단에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합니다. “선한 싸움”이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혈투가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믿음의 싸움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믿고 전할 때 불신 세력의 도전과 방해를 받게 됩니다. 악한 마귀와의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말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지 이것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두 사람이 싸우는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은 항상 성도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싸움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항상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 싫다면, 선한 싸움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원하는 <악한 싸움>으로 싸워야 합니다. 비열하게 싸우고, 상대를 헐뜯고 물고 뜯으며 시궁창 같은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싸움도 아니고, 예수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싸움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작년 한 해 동안 어떤 싸움을 했나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나요? 내가 싸울 대상은 악한 마귀이지, 내 주변에 있는 성도가 아니고 내 이웃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싸우셨습니까? 아니면 싸우라는 마귀와는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헐뜯고 죽이려는 데 혈안이 되었나요?
2024년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12월 초 노회 행사가 있어서 행사가 끝나고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 식사자리에서 어떤 목사님이 식사를 영 불편하게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옆에 있는 목사님이 ‘준비한 사람 정성이 있는데, 왜 음식을 앞에 두고 깨작깨작거리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음식을 조금 먹기만 하면 바로 체합니다. 소화제를 먹기도 하고, 심지어 체한 것이 내려가라고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따는 것도 수차례 합니다. 도저히 안 되어 혹시 위에 이상이 있나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위내시경도 합니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여전히 급체하고 소화불량으로 고생합니다.
목사님이 계속해서 고생을 하다가 다시 다른 병원에 들렀는데, 목사님의 소화불량이 심리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스트레스 받는 것 때문에 극도의 소화불량 증상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화불량의 원인과 발단이 바로 그 교회 안에 있는 안수집사님 한 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집사님은 사사건건 목사님을 건드리는 분입니다.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장로님도 아닙니다. 집사님 한 분 때문에, 목사님은 그 집사님만 보면 숨이 멈출 듯이 긴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됩니다. 결국 이것이 만성 소화불량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악한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성도끼리 싸우고, 당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싸우고, 교회 안에서 같은 교인끼리 싸우는 것은 결코 덕이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감정을 다 해소하고 시작합시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묵은 것들을 다 날려 버리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가는 우리 덕민 교회 성도님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나는 달려갈 길을 마쳤는가?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달려갈 길>이라는 말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스”를 일컫는 말입니다. 제 아무리 빠르게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서 달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잘 달리는 것도, 빠르게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해진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런 비유는 자동차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자동차는 모두 빠른 속도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속도만 빠르게 달리고 자동차를 운전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자동차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믿음의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으로 길로만 달려가야 될 줄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생활이요 교회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믿음의 길로는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 길이 힘들다고 핑계를 대고, 내가 원하는 다른 길로 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믿음의 생활이 아닙니다.
7절 하반절에 나오는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에 해당되는 모습도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는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의 길로 달리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23년 한 해 동안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 길로 달렸나요? 행여 내 마음대로 달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로만 달리는 모습이었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2024년도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길로 달리는 모습이 되길 소망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2024년도에 내가 믿음의 길로 달려 나갈려면 힘든 것이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끝까지 달리지 못하도록 방해가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때로는 내 자신이 내 발목을 잡을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 그리고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성도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2024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위나라에 왕의 총애를 받는 “미자하”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전갈을 받은 미자하는 급한 나머지 임금님이 타는 가마를 타고 집으로 달려가는 일을 벌입니다. 당시의 법은 임금의 허락 없이 임금의 가마를 탈 경우 발의 뒤꿈치를 자르는 <월형>의 형벌을 내렸으나, 임금은 오히려 그의 효심에 감복합니다.
얼마 뒤에 왕과 과수원을 거닐던 미자하가 복숭아를 따서 먹어보니, 너무나 맛이 있어 왕에게 그것을 바칩니다. 이런 미자하의 모습을 보고 임금은 감동을 하면서 “자신이 먹을 것도 잊고 나를 먹이다니 그 충성심이 갸륵하다”하며 기특하게 여깁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미자하에 대한 왕의 총애도 식어져 갑니다. 어느 날 미자하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왕은 “너는 원래 그런 놈이었다. 내 수레도 왕명을 빙자하여 몰래 탔고, 자기가 먹던 것을 임금에게 바친 괘씸한 놈”이라고 꾸짖고, 엄한 벌을 내립니다.
이는 한비자의 세난편에 나오는 글인데,, 하나의 장점이 때로는 단점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인심이란 것은 언제든지 바뀌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 적이 되고, 믿고 믿었던 사람이 나의 등 뒤에서 비수를 나에게 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대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2014년 마지막 시간까지 믿음의 길로 달려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왜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믿음의 길로만 달려 나가야 합니까? 그래야만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이 나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지금은 멸종되어 버려서 그 모습을 구경도 할 수 없고, 그리고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는 도도라는 이름을 가진 새가 있습니다. 마다가스카르 앞바다의 모리셔스 섬에 생식했던 현재는 멸종한 조류입니다.
도도는 날지 못하는 새로, 날개가 퇴화하여 몸체에 비해 매우 작아 날 수 없었습니다.
날개가 퇴화한 이유는 도도새가 살던 섬에는 도도새를 위협할 만한 맹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도새는 천적이 없는 서식지에서 적응해 버립니다. 굳이 짐승의공격을 피해 하늘 높이 날라 다녀야 하는 필요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땅에 내려와 다리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날개는 겨우 모양만 가지고 있는 작은 형태이며, 튼튼한 부리와 두 다리를 가진 모습으로 변모되기 시작 합니다. 역사적 문헌 기록에 의하면 1681년 영국인 벤자민 해리가 목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멸종되어 버린 것입니다.
도도새는 시사 하는 바가 많은 새입니다. 스스로의 안락함에 빠져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구상에서 그 흔적이 사라져 버리는 멸종의 새가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 한해 여러분에게 어떤 도전과 어려움이 다가올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도전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내 앞에 태산준령 험한 것들이 가도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서 넘어가는 이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안일함을 택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고 도전하며 나아가서, 믿음의 승리를 얻고, 신앙의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 하나님에 칭찬받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