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상 1:1~18
우리 삶에 고된 돌부리가 있음.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를 때 침울해지는 그런 것. 행복이 증발해버리는 그런 것. 어떤 사람은 죽음을 떠올리기도. 실제로 넘어지는 사람도. 세상 등지는 사람도. 오늘 목사님 자신도 depression의 기조임. 12.6자 YTN 보도, 혼자서 어린 딸을 키우던 30대 여자, 불법 사채업자의 협박과 지인들까지 불법 추신당하니 목숨을 끊은 일. 딸에게 남긴 유서, '죽어서도 다음 생이 있다면 거기서도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새끼, 사랑한다.' 너무나 서러운. 다음 줄에는 '조부장 50만원, XXX 40만원....' 유가족 모자이크 처리, 인터뷰 '차라리 툭 까놓고 말했다면..' 그러나 이보다는 '툭 까놓고 말할 수 없는 나여서 미안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말씀은 돌부리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이상적이어서 현실적인 말을 하고자 함. 여기에 우리가 있는 이유는, 예수님보다 이상적인 분은 없고, 예수님은 가장 현실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 가장 이상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임. 돌부리가 사라지는 기대보다 여전히 있떠라도 이전보다 힘들지 않거나 심지어 있어도 상관 없다는 지혜, 혜안, 저항력이 더 위대한 선물이 아닌가. 암이 오면 두 가지로 나뉜다. 암의 뿌리를 뽑고자 하는 사람과 암과 함께 살려는 사람. 돌부리가 뽑히면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그러나 그 돌부리를 뽑아도 또 다른 돌부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돌부리를 대처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 낫지 않는가?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 문제로 인해 넘어지지 않는, 또는 함께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에게도 돌부리가 있음. 상대적으로 작지만 거기에 사로잡히면 헤어나오기 힘든 경우가 있다. 교회를 안 다니는 딸이 있음. 아무도 묻지 않지만 목사님은 자신에게 항상 묻게 됨. 막내 딸 20대 중반, 무직, 게임/영화에 빠져 있음. 그리고 마음에 불안이 있다고 고백하였음. 괴로웠음. 그리고 목사님의 건강 문제. 그러한 돌부리들. 추가로 마음의 연약함, 약한 의지. 늘 그런 것 때문에 싸우고 힘겨워 함. 자격지심, 도주하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그 분' 때문에 살아감. 때로는 오늘만 살아도 좋을 것 같은 만족감. '네 딸을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 마. 너 혈액암과 함께 살 수 있어. 걱정하지마.' '나는 널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거야.' 이 말씀이 스며들면 돌부리들이 여전히 힘들어도 살 수 있다.
본문의 배경은 어두운 시대. 나라 전체가 혼란한. 지도자가 없음. 팔레스타인, 필리스틴, 블레셋.... 혈통적으로는 섞여서 같다고 할 수 없지만 흐름상으로는 그렇다. 당시는 블레셋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강한 시대. 어두운 시대에 어두운 가정의 이야기임. 불임 여성. 그 여성은 이스라엘의 상징.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인물이 없는. 한나. 어의는 '은혜', 그런데도 은혜가 없는. 당시 불임은 저주. 남편이 다른 여자를 들여서 아이를 낳는 상황. 그렇게 되었음. 다른 여인이 애를 낳고 한나에 대한 적대감. 아이는 낳는데 남편은 한나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한나를 괴롭힘. 고통스러운 한나. 슬픔, 신음과 눈물의 한나. 세대가 변했어도 여전히 현실적 생활조건보다 생명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젊은들이 많음. 마음의 돌부리가 됨. 기본값이 서러움. 버림받은 것 같은 심정. 당시 출산유무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잣대. 이 모든 불행이 어디에서부터 왔나?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 누구는 출산, 누구는 출산 불가... 불임의 고통, 또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 때문에 자신이 더 미움을 받는 상황. 인간의 사랑은 이렇듯 불완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 한국과 이스라엘. 외세를 극복해온, 그것이 반복되면 DNA에 반영. 절망 속에서 살아남은 자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 사라, 리브가 등 많은 성경의 여인들이 불임. 그래서 진이 다 빠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에서...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됨. 아마도 그런 의식이 생길 때까지 두시는 건가? 하나님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가장 완전한 상황을 만드시는 분. 아이를 너무 쉽게 출산하면 내 기대대로 만들어가려는 모습들. 내가 키우는 아이, 내 기대를 만들어 가는 아이. 그러나 한나와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아이로 여기는 경향. 그 아이가 위대한 인물로 세워지는 현상. 사무엘도 시대를 바꾼 인물.
'이 돌부리 그대로 있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봄. 이런 일을 통해서 내 인생이 단단해지는 어떤 순간이 온다. 한나는 지금 서러운 통곡만 지속되고 있음. 18절 하반 주, 슬픔과 두려움이 증발됨. 근심이 더 이상 없음. 10~18절 사이에 무슨 변화? 10~11절 이미 결정적 변화가 시작. 우리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경청해 보라. 10절, 나에게 아이를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라는 고백은 나실인 서약. 드라마 바이블에서는 울적거리면서 한나가 10절을 간구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목사님 생각에는 매우 단호하게 했을 것이라 생각. 나실인 서약은 원래 본인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 감히 아들 대신 그 서약. 왜? 확신이 없기 때문. 조건으로 거래하는 것이 아닌, 통곡하다가 불현듯 확신이 서서 단호한 감사의 서약을 하는 것임.
(한나의 기도 해석 3장 사진)
보통 우리는 돌부리에 닥쳤을 때 두려움, 불안, 염려 앞에 가서 해결할 수 없는 곳으로 간다.(사채업자, 술, 마약, 도박....) 해결하지 못하고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곳. 한계를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적 한계(생명의 소진), 심리적 한계(내 마음도 통제 불가), 관계적 한계(내가 사람을 못 바꿈), 신체적 한계(질병 극복 불가), 우주적 한계(지금 우주의 물리적 환경은 무한으로 가는 것, 우리는 접근도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인정하면 '길이 안 보이는 것'이 정상. 그래서 길을 보여줄 것을 찾아가지만, 놀랍게도 그곳은 하나같이 우리 자신에게 돌려보냄. 마치 못 걷는 장애인에게 노력해보라는 것처럼...
그 때 누군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
'내가 곧 그 길, 너가 살 그 길이다.
I am the Way, 너가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내가 대신 해 주려고 왔다.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
내가 너 대신 죽어라도 줄께. 그리고 죽어주심.
그때는 48킬로의 초라한 인물.
초,중,고 결핵을 지니고 살았음. 세상이 온통 원망스러움.
어느 날 부르짖기라도 하고 싶었음. 하나님 안 믿어집니다.
왜 살아야 되죠? 당신이 존재하고 계신다면...
6개월 만에 '정갑신!' 음성이 들림.
'내가 너를 알고 있고, 너와 함께 할거야.'
변혁이 일어남. 겨울인데 봄으로 느껴질 정도로.
의사한테 갔더니 결핵 완치 판정.
모르겠음. 내 가능성이 없고 길이 안 보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
한나처럼. 늘 울고 불고만 했었음. 그런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각성하는 순간, 깨달음. 하나님만이 나를 도와주실 분.
그리고는 모든 것이 바뀜. 바뀌니 조금 있다가 시대를 바꿀
인물이 나오게 되는 것임. '주님 마음껏 하세요. 저는 이제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순간.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통하려고' 있는 것임.
매 주일 아침, 큐티책을 찾는다.
설교를 한 번 더 보고 싶어도, 그렇게 한다.
오늘을 생명이 살아가는 방향으로 산다.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