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3일간의 동행 - 1
어린 시절, 소풍 전날처럼 밤잠을 설쳤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기를 반년이 지났다. 멀리서 나를 보러 오는 친구는 진도와 완도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필이면 이 더운 계절을 골랐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칠말팔초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계획은 계획일 뿐이지만 이틀 동안 머릿속에 넣어 두었던 여행 일정을 종이 위로 옮긴다. 거리와 시간에 따른 이동 경로를 도식화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오래된 습관이다.
고작 3일이다. 남도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장소를 고르고 끼니때를 맞춰 남도 음식을 맛 보이고 싶다. 숱한 문화유산과 다도해의 절경을 몽땅 보여주고 싶으나 내가 욕심이 많으면, 우리의 시간은 부족해지고 마음이 고달파져 몸만 피곤해진다. 여행지의 적절한 선택과 합리적 동선에 맞춰서 과감하게 몇 개를 포기해야 한다. 여행의 즐거움이란 비워야 채우고 더하는 묘미가 있다고 한다. 성품이 온유한 친구를 위해 남도의 아름다운 경치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진도로 향했다. 구국의 아이콘 성웅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1598)이 13척의 판옥선으로 왜선 133척을 격파한 명량대첩의 울돌목에 들렀다. 남해에서 서해로 채워지는 밀물의 시간이다. 썰물의 거친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물때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아쉬움이 컸다. 적어도 너덧 시간을 지키고 서 있어야 그날의 소용돌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도대교를 넘었다. 운림산방에서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의 남종화를 감상하고, 세방낙조의 붉은 바다에 혼쭐을 놓게 할 작정이었다. 반은 성공했으나 서쪽 바다로 밀려드는 낮은 구름은 불가항력이었다. “아쉬워야 다음에 또 오겠죠” 친구는 잔잔한 물결 위로 떨어지는 태양의 휴식을 꿈속에서는 만났으리라. 급하게 구한 흑석산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이 마음에 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둘째 날은 월요일이다. 대흥사 계곡을 걸으며 가을을 그리워하고 부도전에서 초의(草衣 意恂, 1786~ 1866)선사와 서산(休靜, 淸虛堂, 1520~1604)대사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해탈문에 서서 오심재와 가련봉, 만일재, 두륜봉을 잇는 유연하고 선명한 곡선을 보며 감탄했다. 문수·보현 동자의 이야기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5)의 편액 이야기로 따가운 여름 햇살을 피했다.
작은 욕심이 실수를 저질렀다. 바람조차 잠들어 버린 날이다. 연일 폭염경보로 나라 전체가 시끄럽고 서울은 아흐레 연속 열대야를 이어가고 있다. 시원한 곳을 팽개치고 들어간 수목원에서 친구는 무척 힘들어했다. 이런 날씨에 생뚱맞게 4est수목원으로 이끈 내 생각은 너무 짧았다. 갖가지 색상의 풍성한 수국꽃과 수목원에 꾸며진 소품들 사이에서 예쁜 사진을 남기라는 숨은 뜻은 있었으나 더위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친구야! 미안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한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멀쩡한 날에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다. 도솔암을 향하는 중에 달마산 머리에 걸린 구름의 정체가 해무(海霧)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완도는 해무 아래에 숨어버렸다. 기암괴석 사이에 자연석을 층층이 쌓고, 흙을 메워 한 칸짜리 암자를 지어 낙조를 살폈다는 도솔암이다. 오늘도 붉은 해넘이는 어렵다. 해무에 숨어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암자와 팽나무를 보고 있자니 소치의 증손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 1941~)의 그림을 되살아난다. 친구는 그림 속 신선이 되었다.
새날은 밝았으나 안개가 짙다. 해군 출신인 친구는 해무의 위험과 선박의 출항이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을 대신하여 해상왕 장보고(張寶高, ?~846)의 청해진 유적지인 장도 노둣길을 걸었다. 신지도 명사십리해수욕장의 바다는 하늘빛을 담아 맑고 푸르렀으며 노무현이 아낀 전혁림의 코발트블루를 연상하게 했다. 해남을 출발하여 완도대교와 신지대교, 장보고대교, 고금대교를 달려 강진 마량항에서 멈췄다. 식탁 위에 놓인 장어주물럭을 맛본 친구는 소주를 겸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배려라는 명목으로 유혹을 불렀으니 모두가 다 내 불찰이다.
친구란?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을 말한다.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라는 말은 오래 사귄 친구일수록 믿음과 우정이 두텁다는 뜻이다. 그런데 친구는 고작 5년으로 내 마음을 훔쳤다.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눈동자에는 그의 선함이 보이고 그의 입술은 내 생각을 이야기할 때가 지나치게 잦다. 같이 있어도 불편함이 없고 내가 양보해도 억울하지 않으니 벗이라 자랑하고 싶다.
子曰 (자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내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하길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 아니겠는가?
아쉬움을 남긴 여행이다. 월요일은 정기 휴관이라 입장이 어렵겠지만 껍데기라도 보자는 마음에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 박물관과 녹우당에 들렀다. 녹우당 미인도와 국보인 윤두서 자화상은 언제 보더라도 한 번은 직관해야 할 작품이다. 해무로 놓친 보길도 윤선도 원림까지 연계한 ‘어부사시사 문학 여행’을 계획해 봄 직하다는 친구의 생각이 내 생각과 똑같다. 먼 길이지만 꼭 한번은 다녀가야 할 합당한 이유가 생긴 것 같다. 그때는 그대가 앞서시고, 나는 그대의 친구가 되어 뒷짐 지고 거만하게 뒤따르는 모양새를 그려본다.
첫댓글 다 못 보여줘서 애탓네
해무가... 구름이...
뭐 어쩔 수가 없더라고.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는데 우짜겠노.
방법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