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아버지의 서러운 죽음을 슬퍼하는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 용 학 |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갓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 최후의 밤은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출처 《 이용악 시전집》 (2018) 첫 발표 《분수령》(1937.5)
* 노령: 러시아의 영토.
*자래운: 길러 온.
*파선: 풍파를 만나거나 암초 따위의 장애물에 부딪혀 배가 파괴됨. 또는 그 배.
*설룽한: 썰렁한 춥고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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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학 李庸岳 (1914~1971)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5년 3월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분수령》(1937), 《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을 간행하였다. 집안 대대로 이어진 가난, 고학, 노동, 생활인으로서의 고달픈 삶 등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많은 시를 창작했다. 그러한 개인적 체험을 일제강점기 유이민의 참담한 삶으로 녹여 내어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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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한 아들과 딸이 있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의 화자는 슬픔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담담한 어조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비통함 속에서도 슬픔을 목 놓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마주한 "우리"의 슬픔을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독특한 시적 효과를 발휘한다. 화자가 처한 상황을 장면화하여 제시하는 듯한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시를 읽으면서 화자의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어떤 장면을 보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 낯선 이국땅에서의 삶과 죽음
1연에서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를 알 수 있다. "우리 집도 아니고 / 일갓집도 아닌 집 /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더군다나 몸을 제대로 누일 수 있는 “침상”도 없는 곳에서 아버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아니고, ~아닌, ~ 아닌' 곳이라면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시에서는 아버지가 최후의 밤을 맞은 장소를 ‘풀버렛 소리 가득 찬 곳이라고 하였다. "최후 최후의 밤”이라는 표현에 드러난 '최후의 반복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동시에 죽음을 대하는 긴박감마저 전해 준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 고통이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표현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고 싶어 한다. 그러한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여망일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낯설고 먼 이국땅에서, 일가 친척 집도 아니고 자신의 집도 아닌 곳에서, 심지어 몸을 누일 변변한 침상도 없는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함께하는 것은 오로지 풀벌레 소리뿐이다. 가득 차 있는 풀벌레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의 메타포(metaphor)다.
2연에서는 자식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삶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낯선 러시아 땅에서 아들과 딸을 키우며 힘겹게 살았다. 그 고통스러운 삶을 함께한 피불이놈에게조차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무을만"이나 춥고 차가운 "니코리스크"는 아버지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신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러시이의 어느 장소일 것이다. 그런 한 많은 삶의 여정을 "완전히 잊"고 "목침을 반듯이 벤" 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3연에는 세상과 이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다 '피지 못한 꿈도 이제 가라앉고, 생명을 다한 아버지의 몸온 얼음장에 누우신 듯 식어 가고 있다. 입술도 색을 잃었다. 의원이 오기는 했지만 이미 늦은 뒤다. 유종호(2002: 184)는 "눈빛 미명"이 '눈빛 무명'의 오식(誤植, 잘못된 글자나 틀린 글자를 인쇄함)이라고 본다. 《리용악 시선집》 (1957)에는 '눈빛 무명'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눈빛’을 ‘눈(雪)의 빛깔과 같은 흰빛'으로 본다면, 유종호의 의견대로 '눈빛 무명'은 이웃 늙은이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덮은 흰 무명천으로 볼 수 있다. 흰 무명천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이제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는 형식적 절차가 끝났다.
마지막 4연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아들과 딸이 아버지의 "머리맡에 옆디어 /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면서 통곡하고 있다. 3연까지 슬픔을 억제하고 담담한 어조로 아버지의 최후 모습을 묘사하던 화자는 4연에 와서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슬픔을 쏟아 낸다. 그런데 그 슬픔을 풀벌레 소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시행이 1연과 4연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각 연에 따라 '풀버렛 소리'의 의미망이 달라지고 있다. 1연의 풀벌레 소리는 앞에서 보았듯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소(고향도 일갓집도 자신의 집도 아닌, 몸을 누일 침상조차 없는 쓸쓸하고 비참한 곳)의 특성을 부각시킨다. 이에 비해 4연의 풀벌레 소리는 특히 자식들의 울음소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감정을 장면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4연에서 자식들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다고 했지만 곧이어 3.4행에서 풀벌레 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 표현을 보자. 표현대로라면 풀벌레 소리가 가득 차 있으니 자식들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울고는 있지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결국, 독자의 귀에 들리는 것은 자식들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최후를 맞은 밤에 가득 차 있는 풀벌레 소리일 것이다. 이러한 4연의 풀벌레 소리는 우선, 아들과 딸의 울음소리를 대신하여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풀벌레 소리와 울음소리 모두 '소리'라는 공통점을 지니기에, 풀벌레 소리는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가득 메운 풀벌레 소리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대면한 자식들의 터질 듯 가득한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 연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한번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자. 화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풀버렛 소리가 들린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마치 어떤 장면을 객관적인 태도로 보고 있는 듯하다. '풀버렛 소리가 가득 찼다'는 표현은 풀벌레 소리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들어설 틈 없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게 한다. 즉 청각적 이미지를 공간화하여 소리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감정을 장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독자가 화자의 감정에 몰입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전략의 일종이기도 하다.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킴으로써 독자가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시적 상황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비극적 생애와 그 가족의 슬픔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풀벌레 소리만 가득 찬 공간
앞에서 서술했듯 이 시는 풀벌레 소리를 통해 오히려 자식들의 울음소리를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드러내고자 하는 특정 대상을 다른 것으로 가림으로써 오히려 그 대상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 방식과 관련된다. 울음소리를 풀벌레 소리로 가림으로써 울음소리를 더 강조하는 방식 말이다. 1, 2, 3연을 거쳐 마지막 연에 이르면 독자는 자연스레 슬픔으로 가득 찬 자식들의 통곡 소리를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가득 차 있는 풀벌레 소리 때문에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가득 찬 풀벌레 소리 너머 자식들의 울음소리를 상상하려고 할 것이다.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풀벌레 소리 너머 처절한 슬픔의 울음소리를 상상으로라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 속에서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귀로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통곡하고 있는 자식들의 모습을 장면화하여 상상해야 한다. 가득 차 있는 공간화되어 있는 풀벌레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는 자식들의 울음소리를 떠올리게 하면서 슬픔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슬픔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읽도록 하는 방식이다. 우리 시에서 청각적 이미지를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한 시가 또 있을까 싶다.
| 궁핍과 절망의 공간 '북방'
이 시는 이용악의 첫 시집 《분수령》에 수록된 시다. 《분수령》은 이용악이 일본 도쿄에서 공사판 막일꾼으로 일하며 고학하던 시기에 발간한 시집이다. 당대 평론가였던 최재서는 《분수령》의 특징을 “소박하고 침통한 생활의 노래"(1938: 196)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이용악의 삶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그의 불우한 삶의 체험에서 촉발되는 북방의 비극적인 풍경이 애절하게 표출되어 있"(고형진, 2007: 282) 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용악은 일제강점기에 "대규모적으로 발생한 국내외 유이민의 비극적 삶을 깊이 있게 통찰" (윤영천, 2018: 447)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함경북도 경성에 살았던 이용악의 집안은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용악의 할아버지는 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러시아 영토를 넘나들며 장사를 했고 그러한 삶은 그의 아버지 대에도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그 일을 하다가 러시아에서 객사한 것으로 추측된다(윤영천, 2018: 451). 이렇듯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시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개인적 체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당대 민중적 삶의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궁핍과 절망을 피해 선택한 먼 이국땅 '북방' 역시 또 다른 궁핍과 절망의 공간이었음을 당대 유이민의 비극적 삶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최미숙
참고문헌
고형진(2007), <이용악>, 최동호·신범순·정과리 · 이광호 편,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시》, 문학과지성사,
유종호(2002), 「식민지 현실의 서정적 재현: 이용악」,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윤영천(2018), <민족시의 전진과 좌절>, 윤영천 책임편집, 《이용악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윤영천 책임편집 (2018), 《이용악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최재서(1938), 『문학과지성』, 인문사.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10. 3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