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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의 정의
화장품의 법적인 정의는 "인체를 청결 또는 미화하고, 피부 또는 모발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도찰, 살포 기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물품으로서 인체에 대한 작용이 경미한 것을 말한다. 다만 이러한 사용 목적 이외에 의약품의 사용목적을 겸하여 사용되는 물품은 예외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화장품이란 의약품과는 달리 어떤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정상인이 피부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위하여 매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성이 고려되어야 하고 사용상 부작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 최근 기능성 화장품이라고 하여 많은 피부과 질환에 효과가 있는 것처럼 과대 선전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예가 많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 화장품 자체가 피부질환을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고 치료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왜 화장품을 사용하는 걸까? 화장품의 사용목적은 피부의 청결, 미화를 위해서 또는 자신의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 알려진 화장품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피부를 청정하게 한다.
∙피부 거칠음을 방지하고 살결을 가다듬는다.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고 조절하여 촉촉함을 주며 유연하게 한다.
∙피부를 보호하고 건강하게 한다.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곱게 태워 주거나, 햇볕에 타는 것을 막아준다.
∙피부에 색조 효과를 준다.
∙손상된 모발을 보호하고, 모발의 거칠어짐, 갈라짐을 방지한다.
∙모발에 윤기와 탄력을 주고 두피와 모발을 건강하게 유지시킨다.
∙모발을 청결하게 하고 유연하게 한다.
화장품의 기원 및 역사
1. 화장품의 기원
1) 성적본능의 일부인 미적본능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지능을 가진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본능으로, 이성을 포함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화장을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화장의 기원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가설이라 할 수 있다
2) 주술적, 종교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아직도 미개민족 중에서는 얼굴에 다양한 무늬의 색칠을 통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거나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믿고 있는 역귀를 내쫓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집트와 같은 고대국가의 유물에서도 종교적인 의식을 나타내는 그림들에서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서 화장을 하고 있는 제사 관련 인물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3) 사회적 지위와 소속 집단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
BC 3000년 경의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용술은 성직자 계층에게 고유한 영역의 행위였다. 성직자들은 특정 원료들을 이용한 화장품의 혼합에 대한 연구를 시행 했으며, 그것들을 의식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사용했다고 한다. 미개인의 사회에서는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예속을 과시하기 위해 피정복자의 화장을 강요하는 곳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현재도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 종교집단을 표시하기 위해 화장이 사용되고 있다.
4) 신체의 보호 또는 보온을 위한 실용적 수단
현재도 태양광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선크림과 같은 화장품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과거에도 태양광선과 같은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원시적 의미의 화장을 이용했을 것이며, 그것이 화장술을 발생시키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보는 관점이 있다. 이처럼 화장술은 종교적, 철학적,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 기능을 가지고 각각의 독립된 시대문화환경 하에서 나름의 차이를 보이면서 발전해 왔다.
2. 화장품의 역사
1) 최초의 화장품
최초의 화장품은 이집트 제 1 왕조(기원전 2100-2907)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 여성들은 눈썹, 눈꺼풀, 속눈썹을 유황 납으로 만든 kohl(역주: 콜 먹-회교국의 여성이 눈 썹을 검게 칠하는데 쓰는 화장 먹)로 어둡게 칠했다.
많은 왕조의 무덤 속 석관 옆에서도, 고인을 위한 팔레트와 녹색의 공작석(malachite) 가루 주머니가 발견되곤 한다.
2) 발상지
인류최초의 화장은 BC 7500년 이집트에서 시작, 발전되어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손에서 집대성 된 것이 4천년이 지난 20세기 말까지 그대로 원형이 유지 되고 있다. 이집트의 목동과 사냥꾼들은 내려 쪼이는 강렬한 태양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야생 피마자나무에서 짜낸 기름을 온몸에 발랐고 죽은 자의 장례식에서 이집트의 태양신에게 향수를 바쳐 죽은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원불멸 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3) 창시자
클레오파트라의 화려한 MAKE UP은 새로운 화장품의 개발로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녀의 MAKEUP은 단순히 " 바르는 기술 "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7500년간 발전되고 축적된 이집트의 화장품을 체계화하고 세분화한 것이다. 그녀가 쓰던 화장품의 원료중 많은 성분이 화학이 생활을 지배하는 21세기 문턱으로 향하는 지금도 무독성분과 무공해적인 요소로 화장품 제조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SKIN CARE, ACCESSORY, BODY CARE, NAIL CARE, HAIR CARE, PERFUME에 AROMA까지 클레오파트라는 20세기 말과 비교도 뒤떨어지지 않는 완벽한 화장법을 썼다.
4) 그리스
이집트의 모든 화장품 제조 비법은 그리스의 약초학과 임상학의 대부 GALEN(또는 CLAUDIUS GALENUS․AD 130~200)과 물리학자 DEMOCRITUS 두 사람이 낱낱이 기록, 전해 내려오고 있다. 더구나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생약의 권위자이며 임상학의 대가 GALEN은 단순 경험과 토속적이고도 전통적 처방에 따라 만들수 밖에 없었던 이집트 화장품의 구전을 일일이 기록하고 체계화 했다. 최초로 약학과 본초학을 접목시켜 과학화한 후 그것을 기초로 FORMULATION(처방)을 만들어 냈다. GALEN의 학문적 노력은 결국 불별의 명품 COLD CREAM을 "창조"하게 된다. 콜드크림은 피부의 수분증발을 막아주고 피부를 햇볕으로부터 막아주고 바르고 난 순간부터 피부가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게 되어 COLD CREAM이라고 불렀다.
3. 한국 화장품의 역사
'우리나라여성들이 언제부터 화장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분명한 기록이 없다. 다만 얼굴에 바르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지저분하고 징그러운 돼지의 기름이 피부를 보호하고 유연하게 해주며 동상을 막아주는 기능이 있었다는 인식이 퍽 오래 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최초의 화장품은 돼지기름이 아니었을까라는 좀 비약적인 추측을 할 수 있겠다. 문헌상으로 보면 단군신화에서부터 어느정도의 화장품에 대한 실마리를 추측할 수 있다. 신화에 의하면, 곰이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을 먹고, 백일 동안을 견디어 내고나서 여자로 변하여 환웅의 아내가 되고 단군왕검을 낳음으로써 우리민족의 모체가 되었다. 그런데 곰이 먹었던 쑥과 마늘이 미백효과가 뛰어난 재료임을 생각해볼 때 하얀 피부를 지닌 인간으로 변하려는 어떤 주술적인 노력이 아니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로 선사시대를 지나 국가 형태를 지닌 조직이 등장하면서, 세계적인 화장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화장이나 문신 등이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화장기술은 세련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1) 삼국시대 화장
삼국시대는 상고시대(上古時代)의 화장문화를 기반으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한(漢)의 화장문화를 효과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화장문화를 융합하고 발전시킨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뛰어난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화장문화는 삼국시대 초기에 '영육일치사상'에서 비롯된다.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와 그의 황비 알영이 미남, 미녀였고, 단체의 우두머리인 원화와 화랑 역시 미남, 미녀였다는 사실은 신라인들의 지, 용, 체의 합일 신봉을 의미한다. 불교나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우리 조상의 화장술은 청결을 많이 강조하고 짙은 화장을 피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한다. 불교의 교리가 향, 향료를 신성시하고 목욕재계를 중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므로 화장과 화장품, 목욕용품 발달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단순한 청결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죄악을 씻는 신성한 의식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있었다.) 신라인들은 홍화로 연지를 만들어 볼과 입술을 치장하였다. 화장문화는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위해 발달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상과 미의 기준에 따라 변화, 발전하여 왔다. 즉, 원시시대에는 부족간의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방어나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화장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발달로 인해 화려하지 않고 은은한 화장기법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청정․청결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2) 고려시대 화장
통일신라시대에는 한국 고유의 엷고 우아한 화장이 다소 중국화 되었지만 그 기본은 고려시대에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일부 계층에서의 화장방식은 상당히 사치스러워져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백분을 많이 바르고 눈썹을 진하게 그리는 것이 당시의 전반적인 유행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화장문화가 더욱 발달하여 향료를 옷과 몸에 뿌리고, 향연이 몸에 배이게 하고, 향낭을 여러 개씩 패용 하였으며, 분을 겹겹이 바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치를 금압하는 사회풍조에 따라서 본래의 아름다움을 바탕삼은 미용으로 경향이 바뀌고, 내외면의 미의 합일을 추구하며, 덕과 도량의 수련을 중시하였다. 고려 여인들의 치장은 신분에 따라 달랐는데, 대표적인 예로 기생중심의 분대화장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엷은 화장이 점점 화려해지고 사치스러워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삼국을 통일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가 화려하게 발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본적으로 화장이 수수함보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면서, 생활이 어려운 민중들보다는 아름다움이나 사치에 관심이 많은 귀족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신분에 따라 화장법도 달랐졌다. 특히 기생들의 화장법이 일반 여염집 여성들과 구분되었다. 아마도 이 시대부터 야한화장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조선시대 화장
조선시대에는 이웃나라인 일본에까지 유명해질 정도로 화장품 제조술이 뛰어났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화장품의 원료가 중세 유럽이나 외국의 화장품 제조성분처럼 화학물질이 아니라 그 대부분이 백토나 꿀, 각종 식물성 기름이나 꽃잎, 수세미 추출물 등 요즈음 우리가 즐겨찾는 그야말로 천연무공해 화장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신분별 화장 형태가 무너진 대신에 궁녀, 기생 등의 화장법이 일반여성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즉 여염집 규수와 부인들은 평상시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 연회와 나들이 때에만 화장함으로써 애써 분대화장을 기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들어오면서 여성들의 치장에 있어서도 폐쇄적인 성향을 띄게 되는데, 고려시대에는 신분별로 화장법이 달랐다면, 조선시대에는 일반 여성들의 화장법이 기생이나 궁녀와 같은 직업적인 여성들의 화장법에 비해서 확연하게 수수해졌다. 또한 보통 양반들이나 민중들도 평소에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다.
4) 개화기
조선왕조와 서구의 이같은 화장문화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화장품 공업은 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는 외국의 화장품 제조기술을 배워들여서 급격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업분야의 발달은 비단 화장품 공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전반에 걸쳐 산업화의 싹이 돋아나는 시기였는데, 일본의 상업자본이 조선왕조 후기 사회에 상륙하여 자생적 발전력을 짓밟은데다 민족 자본의 성장을 완전 전멸시키려 했었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서양의 자본기술을 배우기 위한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나라 화장품이 최초로 기업화된 것은 1916년 박승직(현 두산그룹 회장 박용곤의 할아버지)이 만든 '박가분(朴家粉)'이었다. 1922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문에 "화장계의 패왕, 경성 생산품 품평회 심사장 공학박사의 심사장 상을 수(受)한 박가 분은 항상 바르시면(발르시면) 주근깨(죽은깨)와 여드름이 없어지고,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박가분은 경향 각지 내외국인 신용 있는 포목점과 잡화 상점에서 판매 하옵네다"라고 하면서 박가분의 제조 및 발매처를 경성 연지동 270번지라고 밝혔다. 박가분 이후에 서석태가 광업화장품연구소를 설립하고 서가분을 제조해 인기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서 화장품이 기업화가 된 것은 박가분이 효시이며 문헌상 확실한 근거를 남긴 것은 '박가분' 과 '서가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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