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앞에 서다
조선의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쇠락할 때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이어서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었다. 세력을 확장한 청은 조선을 침략하여(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1~3.3) 두 나라가 형제의 나라라고 일컫기로 하고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 조건으로 양국 간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 후 인조 14년(1636)에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다시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28~1637.2.24) 때에 청군은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려는 길을 막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최후통첩에도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여 1월 22일에 함락시켰다. 인조와 조정은 1월 26일 강화도 함락에 항전의지를 상실하여,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의 막사인 수항단(受降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에 비석을 세우라고 요구하였다. 청에게 패한 조선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비석에 새기었다. 그렇게 세어진 비석을 삼전도비하고 하는데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3.95m, 폭 1.4m이다. 원래의 비명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고,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어 로제타석(Rosetta Stone)처럼 17세기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아래에서는 정묘호란과 변자호란의 간단한 연대기, 삼전도비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고,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내는 편지와 백성에게 보내는 포고문, 인조의 항복문서, 공덕비 내용(몽골어, 만주어, 한어) 등을 차례로 살펴본다(이 부분은 너무 길어서 카페에 올릴 성격이 아니므로 필요하면 전자책 원전을 참조하세요).
조청전쟁
1616년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는 후금(後金)을 건국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채택,
대후금강경주의(對後金强硬主義)로 외교노선을 급선회.
1627년 1월, 후금의 태종 훙타이지(皇太極),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제1차 조청전쟁(정묘호란).
1627년 3월에 조선과 후금은 ‘형제(兄弟)의 맹약(盟約)’을 맺고 정묘화약(丁卯和約)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조청전쟁은 종식됨.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 군주의 칭호를 황제(皇帝)로 개칭한 후, 조선에 ‘군신(‘君臣)의 의(義)’로
국교 관계를 재설정할 것을 요구.
1636년 4월 후금은 몽골을 통합한 후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 황제에 오름. 이후 조선에 대해
청을 명과 동등하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
1636년 12월 2일, 청 태종(홍타이지)은 조선 친정(親征)으로 12월 14일에는 수도 한성 근교까지 남하(병자호란).
1637년 1월 29일 남한산성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감. 삼전도에 도착한 인조는 9층으로 만들어진
수항단 아래 무릎을 꿇고 홍타이지 앞에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 절차를 행함.
1637년 1월 30일, 조선 국왕 인조는 화약(和約)의 약조에 따라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훙타이지에게 항복(降伏)의 예(禮)를 올림(남한산성에서 47일간 버팀).
1639년 인조 17년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세움(높이 3.95m, 폭 1.4m)
삼전도비 관련사건
( 자료: 송파문화원, 해설사와 시인의 송파역사문화이야기, 2018: 141~142)
1639년 인조 17년 삼전도에 세움.
1895년 고종 32년 청일전쟁(1894.7~1895.4)후 삼전도비각을 무너뜨리고, 비석은 귀부에서 뽑아서 엎어버림.
1897년 조선의 ‘칭제(稱帝)’와 함께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과 그들의 숙소인 남별궁이 부수고
독립문과 환구단을 세움.
1909년 세키노 타다시 교수 촬영, 비신만 넘어간 상태의 사진.
1916년 '고급유물보존규칙', '등록번호 제11호' 등재.
1917년 다시 일으켜 세움(일제에 의해).
1935년 '삼전도청태종공덕비’를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보물 제164호 지정;
소재지 :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
1955년 국보고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제2차 총회에서 보물 해제.
1956년 지하 7척 깊이에 다시 매몰(이승만 정부, 문교부).
1957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址)' 지정.
1960년 홍수에 의한 하안 유실로 모두 수중으로 전락.
1962년 다시 세움,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로 복구.
1963년 문화재보호법제정으로 '사적 제101호'.
1981년 '삼전도비'로 정정(전두환 대통령 지시).
1982년 삼전도 굴욕 묘사한 동판 부조 설치(익선관 고증오류, 혐한자료 이용).
1984년 어린이공원으로 조성. 소재지 : 송파구 삼전동 289-3
2003년 송파구청, 삼전도비의 제자리 이전을 위한 문화재청 심의요청.
2007년 붉은 스프레이 낙서사건
(2007년은 삼전도의 굴욕으로부터 370년 의미;
2007년 2월 3일 비석 전면과 후면에 페인트로 2007년은 삼전도의 굴욕으로부터
370년이 되는 해라는 의미에서 '철거 병자 370‘라고 쓴 사람으로 백 모씨(남, 39, 경기도 수원시) 이다.
2007년 1월 30일에도 함양읍 ‘역사의 인물공원’에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탐관오리 조병갑의 선정비 등을 망치로 훼손하였고,
2012년 12월 12일에 노태우 생가에 방화,
2016년 12월 1일에 박정희 생가에 방화 한 바 있다).
2010년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이전(부조철거), 소재지: 서울 송파구 잠실동 47번지
2011년 명칭변경ㅡ삼전도비→서울 삼전도비
한국 역사상 커다란 '굴욕의 상징'인 삼전도비(三田渡碑)가 현재(2008.6.9)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수난의 '삼전도비(碑)' 옮긴다, 조선일보, 2008.06.09.).
서울 삼전도비의 내력
< 아래는 원전 참조 >
청태종의 편지 203~204 쪽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 206 쪽
대청황제공덕비 탁본 207 쪽
대청황제공덕비 전문 번역문 209~214 쪽
* 더보기: ‘ 삼전도비’ 앞에 서다 ’,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5, 강역의 기억, 영토의 변경, 한국문학방송, 2023.02.01.: 200~214
http://dsb.kr/ebooks3/ecatalog5.php?Dir=XVOLY6P8815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