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7-16
찬송가 135장 ‘어저께나 오늘이나’
히브리서 13장 1절에서 6절까지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등의 믿음 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믿음 생활의 연속으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으라는 권면입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란 각자 몸을 담고 있는 교회에서 설립 초기부터 신앙을 지도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3가지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라’ ‘주의하여 보라’ ‘본받으라’입니다. ‘생각하라’는 것은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인도하던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어려움을 이겨낸 모습입니다. ‘주의하여 보라’는 것은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의 행실의 결말은 사람마다 달랐겠지만, 교인들이 보았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일로 여길만한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본받으라’는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면 그들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니 현재 겪고 있는 핍박과 신앙적 혼란을, 주님 안에서 이기라는 권면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믿음의 선배들과 영적 지도자들의 행실을 생각하고, 주의하여 보고,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이 밑가지로서 과거의 행실을 드러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시지만, 교회의 역사 자료를 좀 찾아보셔서 이분들의 행실을 기억하고, 주의하여 보고, 본받으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임이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분들을 통해 교회를 이끌어주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지금 교우님들이 믿음의 생활을 잘하시면, 세월이 흘러 다음 세대 교우님들이 주님 안에서 지금 교우님들의 믿음을 본받아 어려움을 이기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될 수 있는 근거를 다음 구절이 알려줍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선과 정의로 정치를 한다면 그들의 불변성은 국민에게는 절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절대선’(絕對善)과 희생적인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주님의 불변성은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와 힘이 되어 주셨던 주님께서는 현재 고난을 받는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과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시고, 나아가 미래의 성도들에게도 영원토록 동일하게 소망과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십니다.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이란 ‘잡다하고 접해본 적이 없는 교훈’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구체적으로 그것을 열거하지 않았지만, 음식에 관한 교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갈등에 빠진 기독교 유대인들에게 권면하는 서신이었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규정에 얽매이는 사람이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란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자’는 레위기의 음식에 관한 규정에 따라 음식을 가려 먹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율법의 행위로서 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강하게 됩니다. 로마서에서 배웠지만,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레위기 음식법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잡다하고 접해본 적이 없는 교훈’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를 포함해서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인 우리에게 무슨 제단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제단’은 구약시대 짐승의 제사를 위한 제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십자가’를 비유한 말입니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는 말은 속죄제를 드린 제물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다는 레위기 제사 규정을 언급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일상 제사에서 드려지는 제물 중 남은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속죄제의 제물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속죄제는 속죄를 위한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고 짐승의 기름을 하나님께 불태워 드리는 것인데, 남은 짐승의 고기는 먹을 수 없으며 반드시 진영 밖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제단의 제물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제단 위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는데, 그 몸이 어떻게 되셨는지를 12절이 알려줍니다.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성문 밖은 예루살렘 성 밖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사형 판결을 받으신 후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시 사형을 집행할 때는 성 밖에서 집행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도 사형 집행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머무는 진영 밖에서 집행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성 밖에서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고자 한 점은,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뿌리고 짐승의 고기를 진영 밖에서 불태웠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가 성 밖이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속죄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더이상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도록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속죄함을 받은 우리는 죄악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거룩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13절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줍니다.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의 치욕은 주님께서 받으신 치욕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핍박과 신앙적 혼란 등으로 갈등에 빠진 히브리인들을 향해 고난이 곧 사라질 것이라며 거짓 위로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입니다. 13절에서 주목할 곳은 ‘영문 밖으로’입니다. ‘영문’이라 함은 출애굽 당시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진영을 가리키거나 신앙공동체의 거주 영역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수신자들이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들은 영문 안에 있습니다. 즉 편의와 안락을 제공하는 예루살렘 성과 같은 도시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의식주(衣食住)의 세계와 세속적 가치관의 세계에서 머물지 말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치욕을 짊어지기 싫어서 여전히 현실에 안주하여 영문 안에 머물러 있으면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이 어디이겠습니까?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여기’는 세상을 뜻합니다. 지금 머무는 곳이 어디이든지 그곳은 우리의 영구한 도성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왜 사는지,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리고 ‘여기’에서 누구를 위해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머물 곳은 주님께서 준비하신 ‘영구한 도성’,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세계와 현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차 올 것을 찾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래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여기’라는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15절과 16절이 알려주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배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드리라’고 합니다. ‘항상 드리라’는 말은 특정한 날 또는 주일날만 드리는 것이 아니기에 예배가 생활화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찬송의 제사는 짐승의 제사가 아니라 입으로 드리는 자원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예수님의 피를 흘리사 속죄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이지 않습니까?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증언하다’는 감사의 증언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입술의 표현이, 열매이자 찬송입니다.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자원제물’도 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찬송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고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안다면 사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자신의 몸으로 선을 행하고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은, 몸으로 드리는 자원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입으로 드리는 ‘찬송의 제사’이든 몸으로 드리는 ‘선과 나눔의 제사’이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신 치욕과 고난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상 가운데 ‘입으로 드리는 찬송의 제사’와 ‘몸으로 드리는 선과 나눔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현실의 어려움이 크게 보이지 않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으며, 삶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감사의 찬송’과 ‘선을 행함’과 ‘나눔을 실천’하는 하루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신데 저희의 마음이 자주 변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환경이 크게 보이지 않고 언제나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에게 일러주고 저희를 인도하신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고 주의하여 보고 그분들을 본받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저희를 굳건하게 함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찬송의 제사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몸으로 드리는 선과 나눔의 제사를 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일러 주고 나를 인도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주의하여 봅시다’ 그분의 무엇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2.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께 드릴 감사는 무엇이 있습니까?
3. 나의 마음을 굳게 할 수 없는 것과 굳게 할 수 있는 것은 각각 무엇입니까?
4. 우리의 제단은 무엇이며,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예배)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