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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정부가 기존의 동 주소를 폐지하고, ‘도로명 주소’라는 것을 쓰고 있다. 나는 이 도로명 주소를 강력히 반대하고 하루 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도로명 주소가 우리 역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도로명 주소가 도입되면서 역사나 역사의 자취를 담은 우리 지명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있다. 도로명 주소의 도입은 일제가 우리 행정 구역의 이름을 전면적으로 바꾼 일, 해방 뒤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한 일에 이어 우리 지명에 대한 세번째 학살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서울 종로구에는 청운동(맑은 구름 마을)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것은 일제가 엉터리로 붙인 이름이다. 과거에 이 곳은 ‘청풍계’와 ‘백운동’이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청운동은 이 두 지명을 멋대로 섞어놓은 이름이다. ‘바람 맑은 골’과 ‘흰 구름 마을’이 졸지에 ‘맑은 구름 골’이 되고 말았다. 청풍계(바람 맑은 골)라는 것은 이 곳이 청계천의 상류인 백운동천의 최상류여서 물도 맑고 바람도 맑았기에 붙은 이름이다. 청풍계는 청계천의 최상류일뿐 아니라, 청계천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다. 조선 때 청계천은 통상 ‘개천’이라고 불렸는데, 일제 때 청풍계의 이름을 인용해 ‘청계천’이라고 고쳤다.
김정호의 <수선전도>(서울지도) 가운데 백운동과 청풍계를 표시한 부분.
백운동(흰 구름 마을) 역시 유래가 분명한 이름이며, 유명한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운동은 과거에 한양에 비가 내린 뒤 개면 인왕산에 구름이 내려앉았다가 사라졌고, 이 백운동 일대에 구름 걸린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아마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백운동’도 서울 종로구의 백운동과 같이 산기슭에 있는 마을일 것이다. 백운동의 모습은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역사상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인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바로 백운동과 청풍계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인왕제색’이란 ‘비갠 인왕산’이라는 뜻이며, 이 그림에서 오른쪽이 백운동과 청풍계다.
결국 이렇게 청풍계(바람 맑은 골), 백운동(흰 구름 마을)과 같은 아름답고 유래가 분명한 이름을 일제가 제멋대로 ‘청운동’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만약 정부가 조금이라도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의식이 있었다면 주소를 바꿀 때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옛 지명은 바로잡고, 이 시대의 역사를 반영할 것은 반영해서 새 지명을 붙였어야 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우리 역사와 현실에 무지한 정부는 하루 아침에 미국과 유럽식의 도로명 주소를 갖다 붙여놓았다. 청풍계와 백운동은 모두 사라지고 그 짬뽕인 청운동도 사라지고 '자하문로'라는 길이름만 남았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무조건 따르라’고 요구한다. 정말 무지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인인왕산을 그린 정선의 <인왕제색>(비갠 인왕산). 오른쪽이 백운동, 청풍계다.
이런 일은 세종시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세종시는 예전에 연기군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건설 공약에 따라 행정도시인 '세종시'가 들어섰다. 그런데 이 행정도시를 건설하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마을 이름이나, 행정 지명을 거의 대부분 없애버리고 새 지명을 붙였다. '연기군'을 '세종시'로 바꾼 것에서 시작된 세종시의 새 지명 붙이기는 마치 행정자치부가 전국의 옛 지명을 싹 쓸어버리고 ‘도로명 주소’를 밀어붙인 것과 매우 비슷하다. 하여간 이 나라는 역사와 전통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언제나 이렇게밖에 일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현재 정부세종청사가 들어선 곳은 연기군 시절 종촌리 지역인데, ‘종촌’이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이 이름을 쓰지 않고 ‘어진동’이라는 이름을 갖다붙였다. 다행스럽게도 ‘종촌’이라는 이름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어진동의 서쪽에 옛 종촌리의 서쪽 일부와 공주시 장기면 제천리, 연기군 남면 고정리를 합친 지역에 ‘종촌동’이라는 지명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옛 ‘종촌리’의 대부분 지역은 ‘어진동’으로 바뀌었고, 새 ‘종촌동’의 절반 이상은 옛 ‘종촌리’가 아니라 공주시 장기면 제천리, 연기군 남면 고정리 지역이다.
아쉬운 점은 애초에 옛 연기군 종촌리였고, 현재 세종시 어진동인 이 마을에는 분명한 이름과 그 유래가 있는데, 이를 살리지 못한 것이다. 이 마을의 이름인 ‘종촌’(마루 종, 마을 촌)은 행정도시청에서 발간한 <행정중심복합도시 지명>이라는 책을 보면, 이 마을의 중심에 있던 ‘민마루’(또는 밀마루)라는 지형에서 비롯했다. 민마루는 밋밋한 언덕, 낮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민마루는 현재 국토교통부 건물 북쪽의 작은 언덕을 말하는 것 같고, 종촌이라는 마을은 그 언덕 아래에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세종시 어진동은 ‘종촌동’이나 ‘민마루동’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했던 것이다. 종촌이나 민마루라는 지명엔 으뜸, 중심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정부청사 지역의 이름으로 매우 적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종촌’, ‘민마루’라는 이름은 민마루와는 관계가 없는 방축천 서쪽의 지역에 붙여졌다. 물론 이 지역도 과거 종촌리의 일부가 포함됐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도림(이)’였다. 따라서 이 마을은 종촌동이 아니라 ‘도림동’ 정도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주변에는 꽤 높은 언덕 위에 ‘밀마루’(민마루) 전망대도 있어서 마치 이 곳이 밀마루(민마루, 종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민마루, 종촌은 현재 어진동으로 바뀐 방축천 동쪽의 지명이었다. 결국 민마루(종촌)에는 어진동, 도림(이)에는 종촌동이라는 잘못된 지명을 붙인 것이다.
또 지금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 국무총리실이 들어선 지역의 옛 이름은 백호나리, 옥동구레(옥동들, 옥동말), 서판날이었다. 백호나리는 100가구가 들어설 마을, 옥동구레는 물이 많고 기름진 논, 서판날은 글씨판처럼 평평한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날’(망)이라는 말은 충청도 사투리로 ‘언덕마루’, ‘산마루’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큰뽕나무고개, 작은뽕나무고개, 뽕나무골, 서낭고개, 방죽(철방이), 이사막골, 상현, 장등길, 서당골, 옥샘, 중뜸, 모정고개, 태롱고치, 도잠, 함지고개, 큰말, 상지마을, 비뜰배기, 공수마루 등 아주 다양한 지명이 있었다. 나는 도로명 주소에 반대하지만, 굳이 도로명 주소를 도입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살려 쓸 수 있는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갈매로니 도움로, 다솜로, 두레로와 같은 뜬금없는 길이름들을 갖다 붙였다.
물론 세종시에서 옛 지명을 살려서 지명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대부분 아파트 단지를 표시하는 마을 이름이고, 법정동은 거의 다 새로 이름을 지어 붙였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 이름 가운데 가락마을, 범지기마을, 가재마을, 도램마을, 샛골마을, 새뜸마을, 머래마을, 나릿재마을, 호려울마을, 수루배마을 등 대부분을 해당 지역의 옛 지명을 활용해서 이름을 붙였다. 아파트 단지 이름 가운데는 새로 붙인 경우는 한뜰마을과 첫마을뿐이다. 반면 법정동은 아파트 단지 이름과 달리 대부분 새로 붙였는데, 고운동, 아름동, 도담동, 어진동, 다정동, 새롬동, 가람동, 한솔동, 소담동, 보람동 등이다. 이들 지명은 이 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뜬금없는 이름들이다. 법정동 가운데서도 그나마 종촌동, 나성동, 대평동, 반곡동은 옛 지명을 살린 경우다.
세종시의 지명과 관련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100% 같은 지역을 표시하는 법정동과 아파트 단지 이름을 각각 따로 붙인 점이다. 예를 들어 법정동 고운동의 아파트 단지 이름은 가락마을인데, 고운동과 가락마을은 100% 같은 지역을 표시하는 이름들이다. 다시 말해 고운동과 가락마을 가운데 하나만 써도 될 것을 굳이 법정동 이름과 아파트 단지 이름을 각각 붙여서 두 가지 모두 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동 범지기마을, 도담동 도램마을, 종촌동 가재마을, 어진동 한뜰마을, 다정동 샛골마을, 새롬동 새뜸마을, 가람동 머래마을, 나성동 나릿재마을, 한솔동 첫마을, 대평동 해들마을, 보람동 호려울마을, 소담동 새샘마을, 반곡동 수루배마을이 모두 마찬가지다.
내가 사는 곳의 주소는 세종시 어진동 한뜰마을인데, 주소를 적을 때 세종시 어진동 0동 0호나 세종시 한뜰마을 0동 0호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렇게 내용상 같은 지명을 반복해서 쓰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기존의 동 주소, 아파트 단지 이름, 도로명 주소가 뒤섞이면서 주소가 아주 복잡하게 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아파트에 붙은 주소를 모두 더하면 세종시 어진동 갈매로 0 한뜰마을 더샵 포스코아파트 0동 0호가 된다. 이 곳의 법정동은 어진동, 도로명은 갈매로, 아파트 단지 이름은 한뜰마을, 아파트 건설사는 포스코, 포스코 아파트의 브랜드는 더샵이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하고 너저분한 주소를 갖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한 주민들의 혼란과 불편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 이 곳은 세종시 어진동 0동 0호, 또는 세종시 한뜰마을 0동 0호만 쓰면 되는 곳이다. 하루 빨리 도로명 주소와 뜬금없는 법정동 이름을 없애고 옛 지명을 살린 아파트 단지 이름을 법정동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내가 사는 곳은 세종시 한뜰동(또는 옛 지명을 살린 민마루동) 0동 0호로 쓰면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이 곳 주민들은 이렇게 혼란스런 상태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그나마 아파트 단지의 이름을 옛 지명을 활용해 붙인 것은 잘한 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약간의 티가 있다. 예를 들어 다정동을 샛골마을, 새롬동 새뜸마을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골’과 ‘뜸’은 ‘마을’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냥 샛골, 새뜸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밖의 범지기마을, 도램마을, 가락마을, 가재마을, 머래마을, 호려울마을, 새샘마을, 수루배마을 등은 '마을'을 붙여도 자연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