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어의 사열대장이다.
그의 외모는 빨강 모자를 쓰고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한 손에는 지휘봉을 들기에 딱 어울리는, 깐깐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다. 그가 시를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정갈한 책상에서 네 모서리의 각이 완벽히 맞는 종이에 만년필로 또박또박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시어들은 그의 지휘봉에 맞춰 주어로 목적어로 비유로 자리 잡고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글자의 임무를 다해 낼 것 같다.
그가 쓴 시는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다. 사열대장의 지휘가 깐깐했으니 시어들도 긴장하고 자리에서 흐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 행 한 행 도열된 시어들이 각자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은 없다. 한 행, 한 단어도 의미 없거나 쓸데없거나 있으나마나 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의 지 휘하에 쓰인 시들은 그래서 폼이 난다. 읽을 맛이 난다.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 시인은 무방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게는 어라?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사열 받듯 쓰인 글들이 문학이라 할 수 있겠냐고 물을 수 있다. 여기가 또 시인의 남다른 점이다. 시어 하나하나 똑바로 세워 검열하고 재고 점검해 배치한 언어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원형의 운동장에서 발맞춰 걷는 병사들을 보면서 지금쯤 뒤로 돌아를 시키겠지, 라고 생각할 때 그는 계속 앞으로 간다. 그런데 막힘이 없다. 가는 길이 모두 언어의 길이 된다. 너무 자유롭고 무방비여서 모든 시도가 가능한 표현이 된다.
상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상상하지 못한 언어와 손을 잡고, 상상할 수 없는 언어를 호명해 와 느닷없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희망은 손잡이 떨어진 서랍 같아서/ 궁금하다가 애쓰다가 열어놓고 실망하는 것/’ (「날씨」중에서) 그의 시집은 곳곳에 이와 같은 표현이 포진하고 있다. ‘희망’이라는 시어 곁에 ‘손잡이 떨어진 서랍을’ 위치시키려는 계획, ‘궁금하다가 애쓰다가 열어놓고 실망하는 것’이라는 행을 서랍의 속성을 이용하여 희망이라 정의하려는 계획,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들이 이렇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
2부 소제목은 ‘안부는 서로의 고통을 교환하는 방식’이다. 안부는 상대의 소식을 듣는 것, 내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하지만 전영관 시인은 ‘고통을 교환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러게 말이다. 그랬다 내가. 누군가의 안부를 물었을 때 서로 잘 있는지 아니 사실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심지어 누구의 고통이 더 큰지 확인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전영관 시인의 시는 언어만 사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심리를 사열하는 데에 이른다. 자기도 확인하지 못했던 내면의 상태를 끌어올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시는 철학보다 깊고 심리학보다 솔직하며 위로보다 더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그를 보아 왔다. 그의 정갈함은 변함없고 시에 대한 집중과 애착과 끈기는 더더욱 강하고 깊어지고 있다. 필사의 힘으로 글을 쓰는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그가 기울인 고독이며, 그가 삼킨 눈물이며, 그가 보낸 방황의 시간들이다. 그렇게 농축되고 의미부여 된 시어의 병사들이 그의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것 같다. 시의 언어로 전쟁을 한다면 중국의 인해전술도 당할 수 없는 언어전략을 펼칠 것이다. 그의 방대한 어휘가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했다. 당연히 기질에서 나왔을 것이지만 8할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탈환하려는 ‘시인다움’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극진한 ‘관찰’ 오랫동안 마음에 새기고 새기는 ‘애정’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나 쓰’거나 ‘시를 쓰’거나 ‘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지키는’그의 행군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다만 그가 언어의 지휘봉을 다루는 일, 까만 선그라스 속에서 눈동자가 바라보는 방향, 머릿속에 펼쳐놓은 시의 지도를 보고 읽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도록 훈련받고 싶다. 그러려면 그가 받은 훈련을 받고, 고통을 느끼며 시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