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떡만을 고집해 온 장인 정성으로 만드는 ‘낙원떡집’ 오산시민신문 "> 이라는 아주 유명한 떡집이 있는데, 1920년대에 시작해 3대에 걸쳐 90년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이 일대에 30여 개의 떡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떡 수요가 줄어 10여 개의 떡집만 남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서울에서 떡집하면 낙원떡집을 떠올리고, 더불어 인사동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우리나라의 떡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여러 군데 생겨났다. 떡이란, 대개 곡식을 ">
<맛집칼럼 35>평생을 떡만을 고집해 온 장인 정성으로 만드는 ‘낙원떡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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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부리박사 권영대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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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관광명소인 인사동 바로 옆이 악기로 유명한 낙원상가가 있는 낙원동이다. 이 낙원동에는 <낙원떡집>이라는 아주 유명한 떡집이 있는데, 1920년대에 시작해 3대에 걸쳐 90년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이 일대에 30여 개의 떡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떡 수요가 줄어 10여 개의 떡집만 남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서울에서 떡집하면 낙원떡집을 떠올리고, 더불어 인사동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우리나라의 떡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여러 군데 생겨났다.
떡이란, 대개 곡식을 가루 내어 찌거나 삶거나 기름으로 지져 만든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떡의 어원은 옛말의 동사 찌다가 명사가 되어 찌기- 떼기- 떠기- 떡으로 변화된 것으로 본디는 찐 것이라는 뜻이다. 시루떡·인절미·송편·주악·경단 등이 모두 이에 속하며, 떡을 일컫는 한자어로는 고, 이(餌), 자(瓷), 편(片), 병이(餠餌), 투(偸), 탁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병(餠)이라고 부른다. 떡은 초기에 한 가지 곡분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곡분을 배합시키거나 과일, 버섯, 꽃, 풀, 해조류 등을 부재료로 사용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또 꿀, 설탕, 엿기름 등을 감미료로 사용했으며, 발색소로 치자, 수리취, 승검초가루, 송기, 쑥, 연지 등을 사용해 빛깔과 모양이 다양해지고 맛도 독특해졌다.
▲ 시장 떡집에서는 여러 종류의 떡을 만들어 포장해서 판다. © 오산시민신문 | | 최근에는 시장 외에도 아파트상가 내에도 떡집들이 생겨났으며, 떡은 필요한 만큼 소량으로도 주문하거나 작은 낱개포장으로도 살 수 있고, 옛 전통을 되살리면서도 맛과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 젊은 세대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웰빙음식으로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오산과 수원 사이의 병점이라는 곳이 있다. 한자를 살펴보면 떡 병(餠) 자에 가게 점(店) 자를 쓴 지명이다. 옛 수원군 태촌면 지역으로, 고려 때부터 병점(餠店)은 삼남지방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이어지는 큰 길목이었으며,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오르는 선비들, 장사꾼 등이 오산의 죽미령 고갯마루를 넘게 되면 여기서 하룻밤을 쉬면서 다음날 한양까지는 걸어서 하루거리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예로부터 많은 떡 장사들이 있었다고 해 그 이름을 ‘떡전거리’라 하였던 것을 일제 때 억지로 병점이란 한자로 개명한 것이다. 몇 년 전부터는 옛 떡전거리의 명성을 되살리고 옛 이름을 찾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떡전거리 축제도 개최하고 있다.
송편은 시루떡처럼 고물이 없어 서로 엉겨 붙기 때문에 솔잎을 깔고 찌여 유래가 되었는데, 송편을 먹으면 소나무처럼 건강해지는 끈기가 생기고 절개와 정조가 강해진다고 여겨왔다. 송편은 또 아기들 돌상에도 올리는데, 송편 속처럼 머리가 꽉 차 명석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백제 의자왕 때 궁궐 땅 속에서 거북등이 하나 쑥 올라왔다. 그 거북이 등에 '백제는 만월이요, 신라는 반달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유명한 학자에게 찾아 물었더니 보름달로 꽉 찬 만월인 백제는 이제부터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것이고, 신라는 반달이기 때문에 앞으로 차차 커져 만월이 되기 때문에 승승장구하는 역사는 신라 쪽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백제는 신라에게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옛 조상들은 떡 하나에도 이런 축복과 소망을 담아냈던 것이다.
▲ 오산 중앙시장 안에 위치한 낙원떡집 전경 © 오산시민신문 | | 오산의 중앙시장 안에는 <낙원떡집>이 있다. 주로 폐백, 회갑, 돌, 백일, 결혼 등의 맞춤 떡을 전문으로 한다. 물론 종로의 낙원떡집과는 별개이다. 박창근(58)ㆍ최숙자(51) 씨 내외가 운영하는 떡집으로 오산시장 안에서만 30년 이상을 떡집을 해오고 있다. 원래는 시장 안의 공영주차장 자리에 있었으나, 재래시장의 현대화를 위해 공영주차장이 지어지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박창근 사장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상경해 용산 후암시장의 떡집에서 처음으로 떡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십대 때부터 떡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군대를 제대한 뒤에는 선배가 있던 서울 잠실의 떡집에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울의 낙원동의 떡집에서 떡 일을 하며 배웠다.
직접 떡집을 하려니 밑천이 들지 않으면서 잘될 만한 곳을 선배에게 추천받아 들어온 것이 오산시장이다. 몇 년만 하다가 다시 서울로 가려 했는데, 오산에서 일하면서 결혼을 하고 1남 3녀를 낳으며 30년을 넘게 시장을 지켜오고 있다. 부인인 최숙자 씨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지인의 중매로 만나 결혼하였다.
▲ 낙원떡집을 함께 꾸려가는 박창근ㆍ최숙자 부부 © 오산시민신문 | | 당시 오산의 인구는 얼마 되지 않아도 시골의 옛 문화가 살아 있었고, 동네잔치라도 벌어지면 최소 일곱 말에서 한 가마까지 떡 주문이 들어왔다. 많을 때는 세 가마까지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골이라 가격은 저렴해도 주문량이 많아 밤을 새운 적도 많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서는 뷔페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뷔페가 없어 잔치를 하게 되면 떡은 필수로 주문하게 되어 경기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뷔페가 많이 늘어난 지금은 떡 주문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예전 잔치와는 달리 뷔페에는 다른 먹을 음식들이 많아 뷔페에서 소비하는 떡의 양은 몇 집의 잔치를 해도 예전에 한 집 잔치 치르는 정도의 양만 되어도 충분한 정도이다.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딸의 도움으로 홈페이지(www.nak-won.com)도 만들었다. <낙원떡집> 전화는 031-374-5492, 011-358-5492이다. 평생을 바쳐 만들어온 멋진 장인의 솜씨가 대를 이어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오산의 <낙원떡집>이 우리의 소중한 전통 떡 문화를 지켜나가고 한류를 상징하는 기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부리부리박사 권영대 강남성형외과 원장 psdrow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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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9/09 [17:29] 최종편집: ⓒ 오산시민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