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Ⅱ.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1. 지나문화의 발상지인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1) 곤륜산은 어떤 산인가?
지나인들은 곤륜산(崑崙山)을 지나문화의 발상지, 지나인의 정신적 고향, 지상선경, 산의 조종으로 믿는다. 그러면서도 곤륜산맥이 지나대륙 서쪽에 있음으로써 곤륜산도 곤륜산맥의 어디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추정할뿐 그 위치가 신비속에 가려져 있다. 마치 불교에서 설산과 바다가 지금까지 신비속에 가려 있었듯이 곤륜산도 지금까지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곤륜산은 어떤 산인가? 곤륜산의 성립요건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참고문헌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 불교의 {석가방지} 등이다. 이들 서적에 의하면 곤륜산의 성립요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곤륜산은 그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다. 그 못을 당(唐)나라에서는 아나타답다라 하고, 불교 명칭으로는 아뇩달지라 한다.
2) 못의 3면이 비등한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人面像)이다.
3) 곤륜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못의 북쪽에 큰 폭포가 있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4) 곤륜산은 3층으로 되어있다.
5) 곤륜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6) 곤륜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7) 곤륜산은 아름다운 옥(玉)이 나는 곳이다.
8) 곤륜산에 서왕모(西王母)에 대한 전설이 있다.
9) 곤륜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곤륜산의 성립요건이 이상 외에도 많으나 대체로 생략하고 위에 제시한 요건에 한정해서 곤륜산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2) 곤륜산은 지나대륙에 없다.
지나대륙의 서쪽에 곤륜산맥이 있는데 거기에 곤륜산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위에 제시한 요건을 갖춘 그러한 곤륜산이 곤륜산맥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 지구상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산을 모두 같은 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곤륜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강하의 원천인 아름다운 못(호수)이 있다는 기록을 본바 없고,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해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산상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에 있는 티티카호(湖)와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 있는 라도카호(湖)라 하여 곤륜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큰 못(호수)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지나 서쪽 곤륜산맥에 곤륜산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함경도에 함경산맥이 있으나 거기에 함경산이 없는 것과 같은 격이며, 인도 부부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으나 거기에 히말라야산이 없는 것과 같은 격이다.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에도 곤륜산은 중국의 곤륜산맥과는 아무런 상관이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그러면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석가방지}에 곤륜산을 곧 설산이라 했고, 설산이 백두산이라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백두산의 특수성을 곤륜산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1) 곤륜산의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의 정상에도 형형색색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못인 천지가 있다.
2) 곤륜산 정상의 못이 그 모형에 있어서 3면이 비등하나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의 모형도 3면이 비등하고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3) 곤륜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못의 북쪽으로 큰 폭포가 흐르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그런데 백두산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천지의 북쪽으로 큰 폭포인 천지폭포가 흐르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4) 곤륜산이 3층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도 3층으로 되어있고, 실제 답사하여 보거나 사진을 보아도 3층이다.
5) 곤륜산에 신선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한웅·한검·자부선인 등 신선이 살았으므로 백두산 일대를 신시(神市) 또는 신주(神州)라 한다.
6) 곤륜산에서 불사약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도지}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도 삼근영초(三根靈草)인 산삼(山蔘)이 나고 이를 불사약이라 하였다.
7) 곤륜산에서 아름다운 옥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도지}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도 7색보옥(七色寶玉))이 생산되었다고 하였다.
8) 곤륜산에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다.
9) 곤륜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는 좌청룡, 지나대륙은 우백호에 해당되며,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외청룡,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대륙은 외백호에 해당되고, 시베리아 대륙은 현무, 오세아니아주는 주작에 해당되어 백두산이 비교적 지구에서 가장 중심인데, 세계지리학회에서 위성사진을 근거로 백두산을 지구의 중심이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우리민족사 연구에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이 곤륜산의 성립요건과 부합일치된다. 이는 백두산이 곧 곤륜산이고, 곤륜산이 곧 백두산임을 의미한다. 백두산 토착민들도 백두산을 곤륜산이라 하였다. 청(淸)나라의 제4대 강희제(康熙帝)도 지나의 태산(泰山)은 물론 한국·지나·만주의 모든 산이 백두산에서 뻗어나간 지맥임을 주장했다. 즉 곤륜산이 모든 산의 조종인데, 백두산이 모든 산의 조종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문화와 유교가 곤륜산에서 기원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기원되었다는 이론이 성립되고, 공맹의 유교가 우리나라 신선도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이 제1차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유교의 창시자는 우리민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문화의 개조(開祖)는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이다. 이들 삼황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주지하다시피 복희는 배달국 태우의한웅(太虞儀桓雄)의 막내아들로서 동이족이다. 복희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부사년(傅斯年) 등 중국학자들도 인정한다.
신농(神農)씨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고시(高矢)씨의 방계(傍系) 후손이다. 고시씨는 농경을 맡은 단군왕검의 직속 신하이다.
그러므로 신농씨 역시 동이족인 것이다. 오늘날 강(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황제 헌원 역시 소전(少典)의 별파로서 동이족이다. 그래서 {초사:楚詞}에 "황제는 백민태생(白民胎生)이고 원래 동이족이라"고 하였다.
삼황 다음 유학은 누구에 의해서 전승되었는가? {중용}을 보면 "중니(仲尼:孔子의 字)는 요순(堯舜)의 도를 조술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헌장으로 하였다"고 했다. 또한 유학의 계통을 당(唐)나라 시대의 한자(韓子)는 {맹자집주} 서설에서 "요(堯)임금은 인의(仁義)의 도(道)를 순(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은 이것을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에게 전하고, 우임금은 이것을 은(殷)나라의 탕(湯)임금에게 전하고, 탕임금은 이것을 주(周)나라의 문(文)·무(武)·주공(周公)에게 전하고, 문·무·주공은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맹가(맹자)에게 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복희·신농·황제 다음, 중국문화와 유학은 요임금과 순임금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이들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사기}에 의하면 요임금은 황제 헌원의 5세손으로 동이족이다.
요임금이 동이족이란 것은 안호상과 최동 등 여러 학자들이 여러 전거를 들면서 주장한다. 또한, {맹자}를 보면 순임금의 출생지·거주지·사망지가 모두 동이지방임을 밝히면서 순임금도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사계의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유학을 집대성한 공자는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공자는 은(殷) 왕실과 송(宋) 왕실의 후손이다. 은왕실과 송왕실은 동이계이다. 그러므로 공자 역시 동이계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문화와 유학을 개창한 개조가 모두 동이족이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동아문화의 개창자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공맹의 유교는 우리민족의 신선도에서 갈려나간 신선도의 지류라는 사실이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3. 한자의 창제는 우리민족에서 비롯되었다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유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이는 한자가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추정이다. 그러면 한자를 어느 민족이 먼저 창제하기 시작했는가? 다시 말하면 한문의 사용문제가 아니라 한자의 기원문제이다.
이는 마치 영어는 영국어이지만 영어를 표기하는 알파벳(Alphabet)의 기원은 영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니키아문자 또는 그리스문자에 있다고 하듯, 한문은 지나어이지만 한문을 표기하는 문자 곧 한자의 기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한자는 중국을 위시로 하여 한국·일본·동남아 등 아시아권 일원에서 거의 쓰여지고 있다. 그 제작도 동양 각국에서 이루어져 한자는 동방문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자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신시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투전문속(鬪佃文束)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 용서(龍書)가 있었다. 단군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러한 글자와 글이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九黎)의 지역에서 널리 쓰여졌다"고 하였다.
또 이어서 "부여인(扶餘人) 왕문(王文)은 처음에 전(篆)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나 점점 그 획을 생략하여 새로이 부예(符隸;예서의 서체)를 만들어 그것을 썼다. 진(秦) 때에 정막(程邈)이 숙신(肅愼)에 봉사하여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다.
또 그 획을 가지고 약간 바꾼 것이 지금의 팔분체(八分體)이다. 진(晉) 때에 왕차중(王次仲)이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원예(遠裔)이다. 지금 문자의 기원을 궁구하여 보면 다 신시의 유법이며 지금의 한자 역시 그 지류를 이은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嘉勒) 2년조를 보아도 상형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 곧 한자(漢字)가 있었다 하고,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울 때도 국호를 한자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는 단군왕검 시대에도 한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이 한자와 더불어 전래됐을 것이라는 추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 사학계에서는 위의 기록을 믿으려 아니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통설에 따라 한자의 유래를 따져보기로 한다. 그러면 한자의 창제설에 어떤 것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5백년 전 은(殷)나라의 한 때 도읍지였던 안양(安陽)에서 발견된 갑골문자가 한자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갑골문자 발달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창힐(蒼?) 등 어느 개인이 한자를 창제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1) 갑골문과 한자의 기원
갑골문이란 점을 치는데 사용됐던 문자로서 거북의 등딱지인 귀갑(龜甲)이나 소와 말의 어깨뼈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이 문자는 1899년 왕의영(王懿榮)과 유악(劉?) 등에 의하여 발견된 후 많은 연구에 의하여 은(殷)나라의 것임이 밝혀졌고, 은나라는 B.C. 17세기 경에서 B.C. 11세기 중반까지 지나 황하유역에 존재하였던 나라이다.
그러면 은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은나라는 상(尙)나라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시조는 설(契)이다. 설의 아버지는 제곡고신(帝嘗高辛)이다. 제곡고신의 할아버지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이다. 소호금천은 황제 헌원의 맏아들이다. 황제 헌원은 동이족이다.
이래서 은민족은 우리민족과 같이 백의를 입었고, 천신제를 지냈으며, 수골에 의하여 점을 치고, 순장제도(殉葬制度)였으며, 시조의 탄생설이 난생설(卵生說)로서 은왕실과 은민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즉 은민족은 우리민족과 동일계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한 단군조선 시대에도 이미 한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갑골문 역시 동이족의 본거지인 동부지방에서 서쪽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지나에서 우리민족 사회로 전래됐을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2) 한자의 창제와 우리민족
한자의 창제설에 어느 개인을 두고 말할 때는 ?복희설 ?창힐설 ?주양설(朱襄說) ?저송(沮誦)·창힐설(蒼?說) ?범(梵)·거려(?廬)·창힐설(蒼?說) 등이 있다. 이 다섯 가지 설을 비교하여 보면 가장 공통적인 학설이 창힐설이다. 그래서 창힐을 한자의 최초 창제자로 꼽는다.
그러면 창힐(蒼?;倉?)은 어느 시대 사람이며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 창힐은 상고시대의 황제(黃帝)이다.
? 창힐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다.
이들 두 가지 설 가운데 어느 설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창힐이 황제라 할 경우 황제는 동이족이므로 창힐은 동이족이다. 또한 황제의 사관이라 할 경우, 황제는 동이족이므로 창힐 역시 동이족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창힐과 고신(高辛) 역시 다 치우의 묘예(苗裔)다"하였는데 치우는 동이족이다. 그러므로 창힐은 어떻게 보든 동이족이다. 여기에서 한자의 지나족 창제설은 두번째로 부정된다.
3) 한자의 상형과 우리민족
이상과 같이 한자의 기원이 동이족 곧 우리민족에 있었다면 한자의 제작원리인 한자의 상형(象形) 역시 자연적인 현상 외에 우리민족의 생활과 그 습속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명지대학교의 진태하(陳泰夏)교수는 한자의 형성과정에 우리민족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자료를 제시하여 국내 언어학계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진태하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근거를 몇가지 소개한다.
첫째, '집가(家)'자는 집면(?)자 안에 '사람인(人)'자가 들어가 있어야 당연한데 '돼지시(豕)'자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집가(家)자는 집 안에 돼지를 키웠던 민족, 즉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글자라는 것이다.
둘째, '날일(日)'자는 해 모양을 상징한 문자이다. 그렇다면 해와 같이 둥글게 그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해 안에 까마귀 그림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 문자를 만든 민족은 금까마귀 신화를 가진 민족이다. '날일(日)'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수만년 전부터 그러한 신화를 전하여 오는 민족은 한민족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날일(日)'자 역시 우리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셋째, 지나에서는 종자를 나타낼 때 '씨(氏)'라고 쓰지 않는다. '씨(氏)'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오직 성씨만을 '씨(氏)'라고 한다. 그런데도 성씨를 나타낼 때 쓰는 '씨(氏)'자는 씨앗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는 모습에서 나왔다. 지나족이 이 문자를 만들었다면 종자를 '씨(氏)'라고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씨(氏)'는 종자와 성씨 모두에 사용된다. 따라서 '씨(氏)'자 역시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이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한글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 진교수는 "젊은 세대들은 특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여야 할 시점이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문자도 만들었고,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이 일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라고 강조한다.
4) 한자의 반절음은 우리민족 중심이다
한자는 자형(字形)·자음(字音)·자의(字義)의 3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를 반절음(反切音)이라 한다. 반절음은 한자(漢字)로써 한자의 자음(字音)을 표기한 일자일음(一字一音)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나족의 발음과 우리민족의 발음 가운데 어느 민족의 발음이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까운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백두산(白頭山)을 예로 들면, 백(白)의 반절음은 박맥절(薄陌切)로서 원음이 '백'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바이(bai)'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백'이다. 두(頭)의 반절음은 도후절(徒侯切)로서 원음이 '두'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또우(tou)'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두'이다.
산(山)의 반절음은 사한절(師閒切)로서 원음이 '산'이다. 지나족의 발음도 '산(shan)'인데, 우리민족의 발음도 '산'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일치하고, 지나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틀리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한자의 발음은 원래 일자일음(一字一音)인데 지나족의 발음은 일자이음(一字二音)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음절이 모두 우리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보아도 한자의 기원이 우리민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자의 발생기원을 탐색하여 보면 그것은 우리민족에서 먼저 발원되었다. 그러나 {단군세기}를 보면 "상형표의(象形表意)의 한자(眞書)가 있었으나 서로 뜻이 통하지 못하고, 국가 사이에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움으로써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우리민족은 한자를 먼저 창제하였으나 그 난해성으로 인하여 고대에 이미 그 사용을 포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지나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에 걸쳐 한자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글자 수가 늘어나면서 한자(漢字)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한자가 마치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와 더불어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