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4회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항의하고 모세에게 불평하다: 탈출 5,6-21
안녕하십니까?
탈출기라는 역사적 진행에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그 중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모세가 모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이 야훼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 이집트도
야훼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 텍스트에는 쓰여져 있지 않지만 그리하여 나중에
예언서에 등장하는 것처럼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이런 사건의 목적인 겁니다.
사건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역사가 목적이래는 겁니다. 사건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커다란 큰 목적은 뭐냐? 그리하여 온 세상이 바로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오늘날 보면 어떤 선교 신학이랑 연결 돼
있는 그런 테마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 거기에 대해서 모세가 뭐라고 얘기 합니까?
탈출 5,3: 그들이 다시 말하였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예,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엘로힘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이 저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야훼 우리 엘로힘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요.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흑사병이나 칼로 저희를 덮치실 것입니다." 이상하죠?
앞서서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얘기하는 겁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이제 누가 피해를 받게 됩니까? 이제 우리는 스토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나가게 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은 이집트에 재앙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얘기를 합니까?
안 합니다. 왜 안 할까요?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수사적인 또는 외교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리실 겁니다."
상대방을 위협하는 이야기를 감히 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은 참 무섭지요? "아, 제가 아는 거는 없지만요."
요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대개 어떤 이야기입니까? 당신이 맞는다는 얘기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틀렸다는 얘기입니까? 당신이 틀렸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뭐 아는
바는 없지만, 제가 경험한 것은 없지만. 데토릭이, 여기서도 하나의 외교적인 발언
입니다. 그리고 흑사병, 칼이라는 모티브가 나오는데 이 흑사병과 칼은 각각 병마와
전쟁. 인간이 자기 수명을 살지 못하고 죽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병 걸려 죽든지,
아니면 사고고 나서 죽든지.
요즘도 마찬가지잖아요. 물론 요즘 대한민국에서 더 큰 사망의 원인은 뭡니까?
자살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보기 드문 연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제가 2시간을 해야 되니까 그냥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과연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오늘날 우리는 행복한가? 뭐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성찰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얘기 안 하지요? 우리는 흑사병과 칼 그리고 자살로 인해서 우리가 흔히
이런 얘기 안 지요? 이런 얘기 없었던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외적인 면으로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습니까? 적게 가졌습니까?
예, 적게 가졌고 뭐 전자렌지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뭐 어디 가려면 걸어가야 하고,
자가용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그런 사람들인데 그런 걸 다 갖고 있는 우리들인데
자살 하는 걸 이 사람들은 그렇게 죽지 않는 거예요. 죽음의 이유가 뭐냐?
사고 나서 죽든지, 전쟁나서 죽든지. 병마와 전쟁입니다.
레위 26,25: "너희에게 칼을 보내어"
누군가가 너희를 공격하게 해서 너희를 망하게 할꺼다. 너희에게 벌을 줄꺼다.
그리고 누군가가 공격을 당하면 이스라엘은 성으로 피해 갈 꺼 아니예요. 그렇다고
너희가 안전해질 줄 아느냐? 그땐 너희에게 흑사병을 보내겠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죄는 뭡니까?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위험에 처합니가? 계약을 어긴 것에 대해서.
예레 14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단식하여도 내가 그들의 호소를 듣지 않고,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쳐도
받지 않겠다. 나 너희한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제물도 받지 않겠다. 오히려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나는 그들을 전멸시키겠다. 여기서는 굶주림, 기아까지 겹쳐
있습니다만 칼과 흑사병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적어도 구약의 정신으로서는 전쟁이 일어나거나 병이 되는
것을 하느님의 벌로 이해했던 겁니다. 특히 어떤 벌로?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벌로 인식한 겁니다.
따라서 계약을 깨트릴 경우 이스라엘은 칼, 흑사병, 기아 이런 것들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은 흑사병이나 칼로 우리를 덮칠지 모르겠
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대답합니다.
모세와 아론 대단합니다. 이집트 임금이 모세와 아론의 이름을 알고 있어요.^^*~~
여러분의 본당 신부님들은 여러분의 이름을 압니까? 단체장이나 활동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알꺼고 아니면 모릅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이거 충격적입니다.
4절: 이집트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모세와 아론, 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이
일을 하지 않도록 부추기느냐?" 따라서 파라오의 관심은 뭡니까? 노예들이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하느님을, 자신들의 엘로힘을 섬기겠다고 하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너희 일터로 돌아가라." 그리고 또한 파라오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이 이제
이 땅의 백성보다 많아졌는데도 너희는 그들이 일을 그만두게 하려는구나!"
이 문장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이게 문장이 번역하기 어려우니까
주교회의 성경은 조금 다르게 고대어 번역본을 이용해서 의역을 했어요.
히브리 말 본문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첫째,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다.
둘째, 그리고 너희는 그들이 일을 그만두게 하는구나. 이게 직역입니다.
이 땅의 백성이 누구일까요? 제가 생각해도 이스라엘 백성인데 그런데 아무튼
중요한 거는 '땅의 백성'입니다.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은 노예인 '땅의 백성'으로 여기서 표현되지
않았는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무튼 본문은 굉장히 이해하기가 어렵고
주석가들도 굉장히 좀 쉽게 이 문장을 풀어 내기를 조금 어려워하는 그런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을 그만두게 하다.'라고 번역한 동사의 원형은 '샤밧'입니다.
'샤밧' 그러면 뭐 생각나지요? 예, '사바티칼' 영어 단어까지 여기 와 있잖아요.
사바티갈. 그러니까 6년이라고 한 해는 쉬는. 엿새 일하고 하루는 쉬는.
그런 개념에서 이스라엘의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라는 그런 계명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따라서 그들이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에 대해서. '샤밧'에 관해서는 파라오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합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정도 쉬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봅니까? 아니면 부정적으로 봅니까? ^^*~~~
조금 일하다가 쉬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봅니까? 부정적으로 봅니까?
쉬게 해 줍니까? 요즘도 아마 그와 같은 일들이 계속 되어 온 거 같은데
뭐 여기 회관 건물도 마찬가지겠지만 각 대학에서도 또는 각 백화점이나 이런
데는 그냥 항상 보면 깨끗하잖아요. 어떤 얘기일까요?
누군가가 그걸 닦고 있다는 얘기 아니예요? 그런데 그것을 닦은 청소 용역을 하는
그런 미화원들이 하루 종일 건물에서 그거를 닦다가 쉴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없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데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는 거 같애요.
다음에 그 장소에 가 보면은 굉장히 상황이 열악한 그렇게 할 수 있는 올바른
조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파라오의 마음은 단지 탈출기에만 등장하는 겁니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과
좀 관련이 된 겁니까? 예, 우리들의 마음 안에도 아, 백성을 쉬게 하려는 하느님의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끊임없이 일하게 햐려는 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파라오의 마음을 우리가 닮아 갈 수도 있습니다.
예, 생각해 볼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자,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계속해서 말씀드리
겠습니다. 탈출기 전반부 또는 탈출기 전체가 제기하는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모세가 누구인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야훼가 누구인지. 그런데 여기 5,2에서
결정적인 질문이 던져집니다. 야훼는 누구인가라는 파라오의 질문입니다.
5,2: "그 주님이 누구이기에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
여기서 던져지는 질문은 야훼는 이집트에게 과연 누구인가?
파라오가 보기에는 이집트에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수많은 신들이 이집트에 어떤
신학적인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는데 야훼는 없다. 야훼가 과연 누구이냐?
마지막에 말씀드린 대로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은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이 제사를 바치는 또는 축제를 지내는, 섬기는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관계를 맺고 섬겨야 할 사람은 그렇다면은 파라오인가,
아니면 야훼인가?
앞서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고 파라오의 마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렸지만 반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입장이라면 우리가 섬겨야 될 것은 파라오인, 아니면 야훼인가? 라는 선택 앞에
우리도 역시 놓여 있는 겁니다.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권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라는
겁니다. 오늘날 전체적인 신앙인들의 흐름은 어떨까요? 세속적인 권력을 선택할까요?
아니면 종교적인 권위를 선택할까요? 오늘날 제가 알고 있는 신앙인들은 그때 그때
자기가 편한 거를 선택합니다. ^^*~~~
"아, 이거는 나라법을 따라야 돼! 이거는 교회 가르침을 따라야 돼!" 라며 그때 그때
자기가 편한 거를 선택하는 거 같습니다.
예, 다음으로 우리들이 접하게 되는 것은 제가 약간 주교회의 성경이랑은 다르게
문단을 끊습니다. 탈출 5,6-21절을 세 개의 작은 단위로 나눕니다.
여기서 누가 계속 등장하지요? 조장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이거는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자주 접하는 명칭입니까? 조장이라는 명칭?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장들이라는 것으로 세 테마가 등장하고
그리고 이 대목이 끝나면은 조장들은 또 등장하지 않아요. 나중에 언제 다시 등장
하느냐 하면 조장이라는 명칭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다시 등장을
합니다. 성전 건축과 함께 다시 등장하는 굉장히 조금 생소한 잘 만나지지 않는
그와 같은 명칭입니다.
6절: 파라오는 그날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에게 명령하였다.
"파라오는 그날로" 여기서 다시 한번 시간을 표시하는 한 대목이 나오지요? 그날로.
어떤 뜻이냐 하면, 당일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바로 그 당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여기서 감독이란, 이집트 사람이 분명하고 조장일 경우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인지 아닌지. 왜냐하면 나중에 문제들이 같이 겹쳐서 돌아갑니다.
여기서 아마도 파라오가 말한 감독과 조장들은 모두 이집트인 감독과 이집트인
조장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감독은 이집트인이고 조장은 이스라엘인이다라고
일반적인 주석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조금 의문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14절을 보면 "그리고 파라오의 작업 감독들은 자기들이 세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장들에게" 그냥 조장이라고 안 나오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장들에게" 라고 특화시킵니다. 따라서 조장 중에 이집트의 조장과
이스라엘의 조장이 조금 다르게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감독이라는 말의 어감은 뭐냐하면, 누군가를 억압한다. 또는 내리 누른다
라는 그런 어감입니다. 우리도 사실은 조금 기분 좋지 않지요? 누군가가 아,
오늘부터 내가 너를 감독할께! 그러면은. 오늘부터 밥 잘하는지 시어머니가 감독
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거 같애요. 청소 잘하는지 아니면 뭐 본당 신부 잘 하는지
감독할꺼야! ^^*~~~~
사실상 교회 성직은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거든요. 주교, 사제, 부제.
이 세가지가 성직입니다. 그런데 주교를 그리스 말로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에피스코포스 episkopos 라고 부릅니다. epi 에피 그러면은 '위에서'라는 의미이고
skopos 스코포스 그러면 '본다' 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우리 말로 직역하자면
뭐냐하면 '감독'이예요. 감독. 교구가 잘 되는지 돌보는 보는 사람.
주교의 그런 임무입니다.
감독은 분명 이집트 사랑이었을 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뭐나 지켜본다.
억압한다라는 히브리 말적인 어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조장'이라는 사람은
'조정한다. 정리한다.' 이와 같은 뜻입니다.
뭐 이런 뜻이겠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무슨 건축일 같은 거 할 때 '십장'이라고
있잖아요. 일정한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서로 분배해 주는 거죠.
누구는 무슨 일을 하고... 전부 다 벽돌만 날라도 안 되고, 전부 다 세멘만 개도
안 되고. 일을 나누듯이 조장은 따라서 뭔가를 정리하고 일을 나누는 역활을
하는 그런 사람들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자, 파라오의 명령이 직접 화법으로 전달 됩니다.
7절: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더 이상 예전처럼 저 백성에게 대 주지
마라. 그들이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이게 우리 한테는 생소해요. 요즘에 벽돌을 만들 때 우리가 짚을 사용합니까?
아니면 찍습니까? 우리는 그냥 찍지요? 고대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
같애요. 그냥 흙으로 벽돌을 만들면은 벽돌이 부서지니까 그것이 조금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짚을 이렇게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열심히 찾았더니
사진이 한장 나왔어요.
지금 벽돌을 만드는 겁니다. 요즘 현대에도 아직도 벽돌을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흙을 개 가지고. 진흙 같은 거겠지요. 머드를 짚을 가지고 그 안에서 같이 반죽을
해 가지고 벽돌을 만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벽돌은
이 정도의 그와 같은 모양이고.
그리고 벽돌을 쭉 널어 놓은, 줄 맞춰서 배열해 놓은 그와 같은 모양입니다.
이 벽돌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벽돌들에 비해서 강도가 그렇게 강할 꺼 같지
않지요? 그런데 그 벽돌을 가지고 이런 건물을 짓습니다.
지쿠랏이라고 부르는 그런 건물들이 그런 벽돌로 지어져 있고 몇 천 년을 서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다음과 같은 모양입니다.
위에는 제단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
바빌론을 발굴해서 나온 이슈타르의 문입니다.
벽돌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다 색깔을 입히고 뭔가 이렇게 조각도 하는.
그래서 옛날에 함무라비 법전이나 이런 것들이 어디 써 있었냐 하면, 토판에 써
있습니다. 옛날에는 벽돌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글자를 새겨 놓는 도구이기도
해요. 따라서 토판 같은 것 안에 글자를 써 넣기도 하고 또는 이런 식으로 부조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거는 미리 기획을 한 거 같지는 않고 거기다가 조금 두텁게 만든 다음에 이거를
깍아 내서 이런 동물 모양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모두 바빌론과 관련돼 있는 그런 고고학적
자료들입니다.
자, 5장 8절을 봅시다.
"그러나 벽돌 생산량은 그들이 예전에 만들던 것만큼 그들에게 지워라. 그 양을
줄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노동의 강도가 늘어 납니다.
"그들이 게을러져서 가서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며
아우성치고 있다." 여기서 파라오가 조금 왜곡하고 있지요? 모세와 아론이 가서
그렇게 얘기했을 뿐인데 그런데 누가 그렇게 얘기한 걸로 얘기한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아우성치고 있다라고 약간은 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자들의 일을 더 힘들게 하여라. 그러면 그들이 일만 하느라 허튼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허튼 말이라는 고 단어는 조금 단어의 본래 의미를 우리가
좀 깊이 있게 들여다 본다면은 '속이는 말, 현혹하는 말'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이 자기한테 와서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현혹하고 있다고. 그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광야로 나가 제사를 지내겠다라는
그 말이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하는지.
여러분들 나중에 열 가지 재앙으로 가면은 파라오가 계속해서 모세와 아론을 한테
재앙을 피하고 싶으니까 재앙을 피하게 해 달라고 얘기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얘기
하느냐 하면 "젊은 사람들은 나가라. 또는 다 나가되 재산을 갖고 나가지 못한다."
뭐 이런 식의. "니들 나 속이려고 하는 거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파라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갔다가 다시 이집트로 와서 자신의 종으로써 일해야 하는데 영영 떠나는 게 그게
굉장히 두려운 겁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모세와 아론은 조금 정직하지 못한 거
같기도 해요.
우리 인제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으로 떠나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가서 제사만 드리고 다시 돌아올 것처럼 얘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팽팽한
어떤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는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인,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인 야훼가 있다는 것 자체를
파라오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게 그렇게 속이는 말이라고 생각
하는지, 아니면 위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차차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밝혀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10절: 이에 그 백성의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이 물러가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파라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웃기지요? 웃겨야 됩니다. ^^*~~~ 이런 거는 흔히 누가 하는 겁니까?
야훼의 예언자들이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얘기하고 예언자처럼 전해야
되는데 여기서는 감독들과 조장들이 "파라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지들이 무슨
예언자인 것처럼, 파라오가 마치 신인 것처럼 이렇게 얘기합니다. 따라서 이 안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조금 조롱하는 어조가 있는 거예요.
"나는 너희에게 더 이상 짚을 대 주지 않겠다. 직접 가서 너희가 쓸 짚을 어디서든
찾아 가져와라. 그러나 너희의 일을 조금도 줄여서는 안 된다." 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예, 여기서 얘기하는 주체는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이지요? 따라서 조장들은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은 모릅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
이후에서 보면은 그들이 만들어야 될 그런 벽돌을 만들어 내지 못하자,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조장들을 때립니다. 그러자 조장들이 불만을 갖습니다.
어, 이상하죠? 조장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요?
파라오한테 그 얘기를 들었지요? "짚을 대 주지 말고 벽돌 양을 그대로 해라."
그런데 조장들이 그거를 모르는 첫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15절 이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가서 부르짖었다. "어찌하여 임금님의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그럼 파라오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뭡니까?
"내가 옛날에 얘기할 때 너희들 거기서 다 들어 놓고 무슨 소리야!"
이런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 얘기가 안 나옵니다.
따라서 저는 6절을 시작했을 때 등장했던 조장들과 나중에 얻어 맞는 이스라엘의
조장들은 서로 좀 다른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요 텍스트만 가지고 어떤 정확한 결론을 이야기 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튼 12절 이하에서 이제 그들이 벽돌 짚으로 쓸 지푸라기까지 모으면서 벽돌을
만들라 하자 그들은 그 일을 마치지 못합니다. 그러자 감독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장들을 때립니다. 그들이 자기들이 세운 조장들이니까 자기가 조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종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노예들이 있는데 노예들의 몇몇 대표들
한테 일을 시켜서 그 대표들이 다시 노예들을 부리게 하는 그와 같은 대목인 거 같습니다.
이게 전체적으로 세계가 그런 거 같애요. 2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의 나치 정권이
유태인들을 박해 하잖아요. 유태인들을 막 잡아가잖아요. 그런데 그때 유태인들이
가장 무서워 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유태계 경찰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독일
경찰들은 뭐 이렇게 돈을 주거나 아니면 빌거나 뭐 그래서 빠져 나올 수가 있는데
유태계 경찰들은 정말 지독하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일정 시대 때도 가끔 옛날 책을 읽어 보거나 아니면은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심하게 대했던 거는 우리나라 그런 경찰들이었대요.
저도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얘야, 조용히 해라. 순사 온다!"
순사가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던 거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그 이스라엘 조장들, 노예들의 대표급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매를 맞으니까 그들은 이제 파라오에게 가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내용은 14절에서
"너희는 어째서 정해진 벽돌 양을 어제도 오늘도 예전처럼 채우지 못하느냐?" 했는데
원문을 보게 되면은 "벽돌을 만드는 너희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느냐? 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조금 의역한 거 같습니다. 주교회의 성경은.
정해진 벽돌 양 또는 벽돌을 만드는 너희들의 임무.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느냐?
그러자 15절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와서 부르짖습니다. 마치
탈출기 1장, 2장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부르짖듯이 그들도 역시 부르짖습니다.
15절: 이스라엘 자손의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가서 부르짖었다. "어찌하여 임금님의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여기서도 자기를 낮추는 표현이죠?
16절: 이 종들은 짚을 받지도 못하는데, 그들은 벽돌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종들이 이렇게 매를 맞았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잘못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짚도 우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고 한다.
그리고 보라, 당신의 종들은 맞는다.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어떤 짚도 당신의 종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라! 당신의 종들이 맞는다. 얻어 맞는다. 얻어 맞았다.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한줄이 더 겹치는데 역시 주교회의 성경이 좀 의역 했어요.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잘못하고 계십니다." 의역입니다.
본문을 보면 딱 한 줄이 나와 있습니다. 뭐라고 나와 있냐 하면,
"그리고 당신의 백성의 잘못(?)"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주석가들이 이거를 해결 할려구 굉장히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잘못하고 있다(?)"
이집트 감독들이 짚도 대주지 않고 우리를 때리는데 그 당신의 백성의 잘못은
곧 당신과 함게 있다. 그거 당신 때문이다라는 그와 같은 내용으로 의역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거는 뭐냐? 앞서 모세와 아론이 그랬듯이 여기서 이스라엘의 조장들은
굉장히 숙이고 외교적으로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종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정말 잘못하는 거는 당신의 백성이 잘못하지만
책임은 결국 파라오에게도 있는 거니까 좀 이걸 바꿔 주십시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요직이 있지요? 예를들어 다음과 같은 거지요?
옛날에 왕이 잘못하면은 "아, 그 왕은 잘할려고 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
우리 본당 신부님은 훌륭한 분인데 아, 주위에 있는 사목위원들은 좀 아닌 거 같애!"
그런 내용들. 어떤 겁니까?
본래의 권위의 중심은 인정하고 주위에 있는 그것이 움직이는 그것만을 얘기하고
있는데 사실은 책임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예, 그거는 만드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세계 교회가 잘못가고 있다면, 저는 그거는 교황님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 교구가 잘못가고 있다면은 그 교구를 맡고 있는 주교님이 잘못하고 있는 거고,
한 본당이 잘못가고 있다면은 본당 신부의 책임이죠. 한 가정이 잘못되고 있다면은
그거는 가장의 책임이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책임도 있고, 반대로 책임이 있는
사람이 권리도 갖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사제와 신자들이 그런 책임과 권리를
많이 나누어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목을 하다 보면은 조금 힘이
드는 게 사목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마찬가지일 거 같애요.
사람들의 심리는 권리는 갖고 싶어하고 책임은 지지 않고 싶어 합니다.
그거는 누구 때문이다. 다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지만 권리는 내가 누리고
싶어하는 그런 인간의 본성이 있는 거 같습니다.
세상이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대의 마음으로 살아야겠지요?
되도록 많은 권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고, 책임은 되도록이면
내가 많이 지고 싶어하는, 궂은 일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세상과는 좀 달리 사는 그와 같은 방법일 거 같습니다.
예, 본당에서도 이렇게 있다보면은 본당 신자분들에게 좀 더 많은 권리를 드리고
싶어하는데 항상 그러한 권한을 드리면은 책임도 뒤따라 가니까 그거를 맡고 싶어
하는 분들이 좋아하냐 하면 싫어해요. 그런 책임까지 맡는 거는 굉장히 싫어합니다.
대부분 이런 거예요. "신부님, 제가 열심히 도와 드릴께요." ^^*~~~
아무튼 여기서도 그 조상들이 굉장히 외교적인 그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의 조장들이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어합니까?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조금 있다가 보게 되겠지마는, 이스라엘 조장들과 모세와 아론은 정작
파라오의 심기는 건드리지 않고 싶어하면서 하느님의 심기는 건드립니다.
하느님이 뭐 시키는데 모세가 탁 합니까? 아니면 막 못하겠다고 도망갑니까?
도망갑니다. 그리고 조장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뭐라고 그러는지 여러분들
그 텍스트를 한번 읽어 보십시오. 하느님을 굉장히 웃기에 생각합니다. ^^*~~~
아직까지는 따라서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를 더 두려워합니까? 야훼와 파라오 중에서
파라오를 더 두려워 합니다.
여성분들은 그런 얘기에 좀 생소하시겠지마는 남성들은 꼭 군대에 가면 한번씩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무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그거 어떻게 아세요?^^*~~~
그러니까 대부분 군대 내에, 내무반 내에, 아니면 부대 내에 규칙은 이렇게 되어
있는데 고참들이라든지 아니면 하사관들이 다른 일을 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안 돼 있는 거 같은데요." 그렇게 쫄병들이 얘기하면
항상 고참들이 하는 얘기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튼 아직까지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 중에서 사람들은 파라오를 더 무섭게,
더 두렵게 생각하는 겁니다. 야훼 보다도.
예, 19절: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의 조장들은 이제 "너희가 만들어야 하는 벽돌 양을
줄여서는 안 된다. 그날 일은 그날로 하여라." 하는 말을 듣고 자기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알았다. 어머니들이 자주하는 이야기지요? "그날 일은 그날로 하여라." ^^*~~
그날 일은 그날로 하여라." 라는 말을 듣고 자기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알았다.
정확한 직역은, "그들은, 조장들은 그들 자신을 곤경 안에서, 곤경에 빠진 모습을
보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았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파라오가 이미 6절에서 시작하면서 다한 이야기입니다. "노동의 강도를 높여라.
지푸라기도 주지 말고, 벽돌을 예전처럼 만들게 하여라."
그리고 나서 어떤 생각을 하는 겁니까?
"쟤네들 조금 놀게 해 주니까 점점 더... 군대식 용어로는 "쟤네들이 무슨 빠졌다고
그럽니다. "쟤네들이 빠져 가지고 저런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더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말고 노동을 시켜야 된다라는 것이 파라오의 입장입니다.
20절: 그러자 조장들이 물러나오면서 모세와 아론과 마주칩니다.
여기서 모세와 아론은 조장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거 같애요.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장면만 보자면은 파라오를 만나서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있는데 로비 같은데에서 조장들이 다시 파라오에게 가서 파라오를 만나고
다시 나와서 그들이 함께 있는 겁니다.
자, 그리고 조장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도 문장이 조금 어렵기 때문에 직역을
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보시고 심판해 주셨으면
좋겠소. 당신들은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우리를 역겨워하게 만들어, 우리를 죽이도록
그들 손에 칼을 쥐어 주었소." 예, 좋은 의역입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고 그들(=조장들)은 그들(=모세와 아론)에게 말했다.
야훼가 너희들을 보고 재판하기를, 또는 심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들의 냄새를 역겹게 하였다. 누구에게?
파라오의 두 눈과 그의 종들의 두 눈에 우리들의 냄새를 역겹게 하였다.
그리하여 어떻게 할 정도로? 그들이 그들의 손에 칼을 두고 우리를 죽이도록.
따라서 너희들이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에게 우리들을 역겹게 했기 때문에 이제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 따라서 야훼가 너희들의 하느님인
야훼가 너희를 심판 하기를, 우리에게 벌을 주기를 ... 이거는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저주입니다. 저주하는 겁니다.
그런데 굉장히 조롱어린 그와 같은 저주의 내용이있습니다.
"야훼가 너희들을 보고 심판하기를"
야훼가 정말 이스라엘 백성이라면은 너희들을 그렇게 보내서 우리들을 이렇게
힘들게, 우리들을 죽게 놔 둘리가 없는데 어떻게 하다 이런 일이 생겼느냐?
야훼가 잘못 됐든지 너희가 잘못 됐든지. 굉장히 냉소적인 그와 같은 의미의.
이 전체 내용은 야훼가 신인라는 거 자체를 조금 의심하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만 좀 생각해 봅시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세와 아론의 언사,
조장들의 언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파라오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야훼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야훼의 편에 있어야 되는 사람들조차 야훼의 권능보다 파라오의 권능을
더 존중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런 저희들이 함께 읽는 5,6-22에서는
조장이 무대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명을 받고 파라오에게 항의하러
가고, 모세에게 불평하는 그와 같은 존재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따라서 그냥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라고 얘기했던 사람들이랑
여기서 얘기하는 이스라엘의 조장들이 동일한 사람일 수 있겠다라는 그런 생각을
저희들이 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를 누구로 생각하는 겁니까?
야훼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아니면은 파라오의 종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파라오의 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과연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이라는 것을 영화로
쭉 찍는다면 내가 주인공인지, 아니면 나는 계속해서 조연으로 살고 있는지, 그렇게
조연으로만 살고 싶은지.
이거는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기에서 만나는 질문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너는 자유인으로써 너의 삶의 주인으로 살래? 아니면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한 누군가의 권력의 노예로 살아 갈래?" 이 질문 가운데 우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15회 모세가 야훼에게 탄원하다가 계속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