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흑차 베일을 벗긴다 ②
진년陳年 흑차를 찾아(上)
가작해(柯作楷, 백사원다관 이사·이학박사)
내가 흑차(黑茶)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에 막 진학한 1979년이었다. 학교 친구들은 고향에서 가지고 온 특산품을 서로에게 선물하고 함께 맛보면서 서먹함을 덜어내고 친분을 쌓았다.
당시 익양(益陽)에서 온 한 학우가 차전(茶 ) 한 덩이를 꺼내 학우들에게 맛보였다. 크라프트지에
싸인 얇고 검은 차전은 찻잎 모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눌려 있는 차경(茶梗)이 눈에 들어왔다.
칼로 한 덩이를 쪼개자 속에는 누런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었다. 누군가 “상했다. 마셔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익양에서 온 그 학우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 차는 원래 이런데”라면서 그냥 차를 들고 물러갔다. 이후로 그는 다시는 차를 내놓지 않았다. 이것이 흑차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검은 빛깔에 비스킷 마냥 눌려 있고 목동들이나 마시는 형편없는 차였기에 차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첫 인상은 오해였다. 그리고 그 오해는 마치 흑차에 핀 ‘곰팡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서 의혹의 덩어리를 키워나갔다. 이전에 나는 값어치가 있는 각종 수석을 구해 생계를 도모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더러 흑차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지금은 명함에 아예 ‘차를 음미하며 수석을 감상하고, 수석을 감상하며 차를 음미한다’고 써두었다. 한번은 수석을 구하려고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한구(漢口)로 가는 기차에서 어여쁜 위구르족 아가씨 몇몇이 흑차를 마시는 광경을 보았다. 아가씨들은 기차에서 파는 음식은 일절 사 먹지 않았다. 그녀들이 앉은 좌석의 탁자에는 뜯어낸 흑차 덩이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처음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또 위구르족들이 주식으로 먹는 구운 빵인 커다란 난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녀들은 붉은 빛이 나는 차를 우려내 마셨는데, 차탕 윗면에는 검은 색의 차경 몇 가닥이 둥둥 떠올랐다. 나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 거친 차가 정말 그렇게도 맛이 좋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 나는 유목민의 가정을 찾아갈 적마다 그들이 이런 차를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소금을 타기도 하고, 생강 따위를 넣어 마시기도 하였다. 네이멍구자치구의 동우주무친기(東烏珠穆沁旗)에 있는 한 유목민의 집에 수석을 가지러 갔을 때의 일은 실로 잊히지 않는다. 당시 안주인은
뜨거운 차를 내왔는데, 그녀는 내가 후난성 장사(長沙)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장사라는 곳은
처음 들어보지만 후난성 익양은 알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나는 장사와 익양은 모두 후난성에 있는 도시라고 일러주고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목민들은 한자는 전혀 모르지만, 차전에 적힌 ‘익양(益陽)’, ‘복전(茯 )’, ‘백사계차창(白沙溪茶廠)’ 같은 한자는 대개 알고 있다
는 것이었다. 안주인은 후난성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차를 마시는 것으로 생각한 데다가 나를 산지에서 온 전문가로 여기고 자신이 달인 흑차를 품평해달라고 거듭 요청하였다.
기실 당시 나는 후난 흑차를 마셔본 적이 전혀 없었다. 2005년에 중국차엽유통협회의 오석서(吳錫瑞) 비서장이 백사원(白沙源)을 방문하여 차를 마시고 내게 익양차창에서 생산한 ‘일품복전(一品茯 )’을 선물하고, 또 오래 묵은 흑차를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맛을 보였다. 비로소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뒤덮고 있던 안개가 걷혔다. 그 후로 나는 흑차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인물들과 주요 공장의 전문가와 경영자를 꾸준히 차관으로 초대해 흑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비록 잊혀지기는 하였지만 이를 통해 그래도 기억해낼 수 있는 단편적이고 세세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여러 해 묵은 이른바 ‘진년(陳年) 흑차’에 대해 내가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마침내 나로 하여금 진년 흑차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Ⅰ. 볼품없는 후난 흑차
후난 흑차는 선창(船倉)과 말의 잔등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중국차의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지금도 재래의 가공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흑차는 겉모양이 좋지 않다.
당나라 양엽(楊燁)의 《선부경수록(膳夫經手錄)》에 따르면, 후난 흑차의 역사는 당나라 때인 서기 8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흑차는 ‘익양단차(益陽團茶)’로 불렸다. 《명사(明史)》 <식화지(食貨志)> <차법(茶法)>의 기록에 따르면, 후난 흑차는 명나라 만력(萬曆) 23년인 1595년에 조정의 관차(官茶)가 되었다. 지금도 후난 흑차에 ‘관차’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흑차는 생산계획, 가격결정, 판매지역에 있어서 여전히 계획경제시대의 관리방법을 따른다. 나는 익양에서 열린 전국 변쇄차(邊鎖茶) 연례회의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거기에서 계획생산품인 흑차가 시장경제상황에서 부딪친 어려움과 무기력함을 느꼈다.
《차의 세계》2008년 6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