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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살면서 카라바지오 시대 고전 회화를 그린다 |
이진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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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곡의 노래, 한 편의 소설, 한 폭의 그림은 가끔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어느 날 어느 골목에서 날강도처럼 예술작품이 우리를 엄습해 오는, 피할 수 없는, 그대로 사로잡히고 마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 순간이 물리적인 육체적 충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 앞에서 몸이 굳어지는 이상 증세를 느꼈던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의 이름을 따서 이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예술작품이 가진 신비요, 위력이다.
화가 박민준을 바꾸어 놓은 예술작품은 다름 아닌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였다.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자 눈앞의 예수를 보고도 믿지 못한 제자 도마가 옆구리에 난 상처를 확인한다는 신약 속 이야기를 그린 카라바지오의 <의심하는 도마>라는 작품은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홍대에 다니던 그는 이 그림을 보고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다. 한 달 동안 유럽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수많은 명화와 건축물들을 보고 느끼고 돌아와 고전 명화에 바탕을 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일생에서 가치 있는 그림 하나만 그리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뉴욕의 미술평론가 로버트 C 모건의 주장대로 박민준의 그림에는 “모든 요소들이 정지되어 있고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확신에 차 있다.” 즉 “완벽함이 법”인 세상이다. 완벽함을 법으로 삼는 세상은 인상주의 등장 후 미술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10년이 지난 지금, 화가 박민준은 이 사라진 세계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첫 번째 동인은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것들조차 캔버스에 안착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뛰어난 붓놀림이다. 또 다른 동인은 회화에 대한 믿음을 그가 그림 속에서 복원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 회화는 삶의 신비에 관해서 언급할 수 있다는 확신을 기초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삶과 죽음, 사랑, 예술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우리 곁에 있는 한 고전 미술의 유혹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박민준의 그림에는 매우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날다’라는 의미의 그곳은 그림 속 나비가 지시하는 곳이며 그가 비행하려는 목표 지점이다. 나비가 제아무리 길을 인도한들 이 비행을 성공할 수 있을까? 이카루스의 신화를 보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비행의 순간을 맛본 대가는 추락과 죽음이다. 그러나 절대미를 향한 예술가의 결의는 굳건하기만 하다. “작디작고 가냘픈 날갯짓이라도 온전한 날개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아깝지 않으리라”라고 작가는 자신의 작가 노트에 적고 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거는 숭고한 일이며, 죽음조차 끌어안고 가는 일이다.
아직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어쩌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주제가 바로 죽음의 문제다.
누구도 이 죽음의 신 타나토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하얀 신부 옷을 입은 에로스와의 결혼에는 그러나 정작 아무도 관심이 없다. 잠의 신도 딴청하고 있으며, 그림 속에서 늘 부부간의 정절과 충절을 상징하는 개조차도 멍청한 표정이다. 결혼을 주재해야 할 사제 역시 눈앞의 문제보다 문헌 검색에 빠져 있다. 삶과 죽음의 필연적인 화해를 애써 설명하는 것은 오직 지팡이를 든 꼽추뿐이다. 이 꼽추는 바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이것이 예술가의 운명이다.
지구상에 사람이 있는 한 사랑의 문제 또한 피할 수 없다. 사랑에 관한 많은 그림들이 그렇듯이 이 그림도 사랑의 유혹을 경계한다지만, 그림 그 자체가 유혹적이다.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마치 마술사처럼 하얀 비둘기를 날리고 있다. 그녀의 이 우아한 자태를 커튼 뒤에서 바라보던 피에로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위험하다. 그녀 발밑에 자리 잡은 호랑이는 그녀 내면의 상징이다.
옆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있다. 결국 이 아름다운 여인의 내면은 맹수이며, 그녀를 사랑한 대가는 죽음이다. 해골의 주인은 피에로이며 이 이끌림은 매우 치명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로 어부들을 유혹하는 신화 속의 주인공이다. 사이렌은 원래 여자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괴물로 흔히 묘사된다. 결국 비둘기를 날리고 있는 이 여인은 치명적인 유혹의 여인, 사이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게 인간이다.
비행에 도취된 이카루스는 결국 태양 가까이까지 너무 높이 올라가 밀랍이 녹으면서 추락한다. 천사는 이카루스를 사랑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구한다. 그 순간, 시간은 멈추었다. 인물들은 라파엘로의 <갈라테아>에서처럼 서로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천사의 날개와 옷깃, 두 상반신, 네 개의 다리가 완벽한 대칭과 역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정신을 잃은 이카루스와 달리 천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무엇을 본 것일까? 천사는 오른편 파도의 짙은 색감으로 예견되는 어떤 파국을 예상한다. 예술가는 삶의 신비에 다가서는 자이며, 그것은 신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의 노여움을 산 이카루스를 사랑한 천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예술가는 재능을 부여받음으로써 신의 사랑을 받은 자이지만, 동시에 그 재능으로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이다.
박민준은 고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상징체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완벽한 디테일의 묘사와 조밀한 이야기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은 매우 더디게 그려지는 귀한 작품이다. 박민준은 현재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가장 결이 맞을 것 같지 않은 뉴욕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전적인 그림은 국가를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굳이 고전 회화라고 설명하는데, 이에 찬성하지 않으면 미술사를 넓게 해석해서 렘브란트나 카라바지오 이후 세대의 그림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동양인이다. 그러나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미 문화적인 경계가 사라진 21세기다. 그는 최근 뉴욕 가나아트 갤러리에서 성공적인 개인전을 하면서 뉴욕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의 첫 시작을 알렸다. 아마도 그의 바람대로 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 먼 훗날 되돌아보면 현대 미술의 넓은 파장 속에 박민준의 그림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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