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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국지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량이〃瀏纏
인물열전
하만(何曼) ? ~ 185? : 산동의 황건적 대장. 별명은 절천야차(截天夜叉). 보행으로 쇠몽둥이를 들고 나왔다가 조홍의 타도배작계(拖刀背斫計)에 걸려 칼을 맞고 죽었다.
하안(何晏) ? ∼ 249 : 위의 문신. 남양 사람으로 하진의 손자이며, 자는 평숙(平叔).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위나라의 조정에서 자랐다. 문제, 명제 시대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조상이 실권을 잡자 조상에게 붙어 그가 어린 임금 조방을 돕는 동안 상서의 높은 벼슬로 호강을 하였으나, 관로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사마의에게 붙잡혀 일당이 모두 처형을 당하였다. 궁정문화의 중심인물로서 현학을 창조하고 청담을 널리 폈다.
하진(何進) ? ∼ 189 : 후한의 권신. 소제의 모후인 하태후의 친정 오라버니. 완 사람으로 자는 수고(遂高). 본시 돼지나 잡던 천한 몸이었으나, 누이가 궁녀로서 황자 변을 낳고 황후가 되는 바람에 출세의 가도를 잡아 높은 지위에 올라 정권을 잡았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진압의 총수로서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황건적 진압에 공을 세운 무장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자 그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조정에서는 전횡을 일삼던 환관에 대항했다. 영제가 세상을 떠나고 십상시의 횡포가 격심해지자, 신 세력의 대표 격인 원소, 원술 등과 손을 잡고 은밀히 환관 주멸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과 하태후 등의 반대로 주멸계획은 용이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조해진 원소 등 강경파의 독촉을 받고 하태후에게 압력을 가할 목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외부 군사를 불러들일 것을 고집하였다. 의견을 듣지 않다가 동탁의 무리가 도성밖에 도달하자, 다급해진 십상시들의 흉계에 빠져 궁중에 불려 들어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원소가 거느린 군사는 내시의 무리를 몰살시켰다.
하후걸(夏候傑) ? ~ 208 : 위의 장수. 조조를 따라 형주싸움에 나섰다가 장판교에서 장비의 호통소리에 말에서 떨어진 담이 적은 인물.
하후덕(夏候德) ? ~ 217 : 위의 장수. 하후씨의 종제. 하후연, 장합과 함께 한중에서 유비의 군대와 싸움. 천탕산을 지켰으나 장합의 권고를 듣지 않고 싸움에 패한 끝에 노장 엄안을 만나 그의 칼에 죽었다.
하후돈(夏侯惇) ? ∼ 220 : 위의 상장. 초 사람으로 자는 원양(元讓). 조조와는 사촌뻘로 조조가 그 아버지 대에 조씨에게 양자 갔기 때문에 성만은 달라진 것이다. 하후연과 처음부터 조조를 따라 다니며 누차 전공을 많이 세움. 동탁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진류에 돌아와 의거할 때, 맨 먼저 천여 명 부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여포를 토벌할 때 맨 먼저 적장 고순을 만나 싸우던 중 조성이 쏜 화살을 눈에 맞고, 그냥 쑥 뽑아다가 묻어 나온 눈알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며 부모님의 정혈을 어찌 땅에 버리랴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제갈량의 첫 싸움 지인 박망파에 대장으로도 출전. 여러 차례 전장에 줄곧 용감하게 싸워 명성을 떨치고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위왕이 되어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후에 병으로 죽었다.
하후란(夏候蘭) ? ~ 208 : 조조의 막하 장수. 유비가 유표를 의지하여 신야를 지키고 있을 때, 하후돈의 부장으로서 참전하였다가 박망성 싸움에서 제갈량의 첫 번 전략에 빠져 일진이 뭉그러지고 장비의 창에 찔려 죽었다.
하후무(夏候楙) ? ~ ? : 위의 대장. 하후연의 양자로서, 자는 자휴(子休). 박절한 성미의 사람이었는데 아비가 평생을 충의로 섬기다가 황충에게 죽은 것을 민망히 여겨, 조조는 그를 자기 딸 청하공주의 부마로 삼았다. 한번도 실전에 참가해 본 일 없이, 황제의 매부라는 명목만으로 장군이 되어 제갈량의 침입을 막았으나, 도저히 그의 적수가 못 되어 숱한 장수와 성을 잃고 사로잡혔다가, 다른 장수를 항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풀려 나와 천수태수 마준과 함께 오랑캐 땅을 의지해 달아났다.
하후상(夏候尙) ? ~ ? : 조조 막하의 장수. 하후돈의 조카로 자는 백인(伯仁). 한중에서 유비의 군대와 대전하였을 때 고전과 패전을 거듭한 끝에 거짓으로 후퇴하는 황충을 진 가까이 까지 추격하였다가 그에게 사로잡혔다. 자기편에 잡혀 있던 진식과 맞바꾸는 도중에 황충이 활을 쏘아 그의 잔등을 맞혔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아 상용관에서 유봉을 쫓는데 활약하였다. 조비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죽은 뒤 도후(悼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후연(夏後淵) ? ∼ 219 : 위의 상장. 초 사람으로 자는 묘재(妙才). 조조와는 사촌뻘로, 조조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조조가 진류에서 의거하였을 때 천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여러 번 싸움에 공을 세우고 농서를 지키다가 오랑캐 땅에서 힘을 길러 재기해 온 마초를 무찔러 패주케 하였다. 후에 서정장군으로서 한중을 지키던 중 유비군의 진격을 맞이하여 분전하였으나, 관로의 예언에 따라 건안 24년에 노장 황충, 엄안에게 계속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몹시 초조한 나머지 타고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황충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진격하였다가, 그의 칼에 죽었다.
하후위(夏候威) ? ~ ? : 위의 용장. 하후연의 아들 사형제 중의 둘째, 자는 계권(季權). 사마의가 조예에게 천거함. 무예에 능하고 병법에도 재질이 있음.
하후은(夏候恩) ? ~ 208 : 조조의 신변을 지키던 장수. 배검장으로 조조는 원래 두 자루의 보검을 가지고 있어, 의천, 청홍이라 이름 지어, 의천은 자신이 차고, 청홍은 하후은이 메고 측근에 있게 하였던 것인데, 당양파 싸움에서 따로 떨어졌다가 조운을 만나서 죽고, 조운은 그 칼을 얻어 여러 차례 위기를 뚫고 나아갔다.
하후패(夏候覇) ? ~ 256 : 위의 용장 하후연의 아들 사형제 중의 맏이. 자는 중권(仲權). 사마의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어, 촉한과의 대전에서 잘 싸우고 옹주의 수비를 맡았었다. 조상이 패하여 죽은 뒤 그의 조카 하후현이 불려져서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험을 느껴 모반하였다가 패하여 촉한으로 후주를 의지해 항복하였다. 그곳에서 강유의 지우를 입어, 여러 차례 출전에 고락을 같이하며 위군을 막았으나, 전부군이 되어 조양성을 치다가 등애의 계교에 빠져 난전을 맞고 죽었다.
하후현(夏候玄) ? ~ 254 : 위의 장수로 하후상의 아들. 자는 태초(太初). 태상 벼슬에 있었는데,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분히 여겨, 이풍, 장즙과 함께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퇴궐하는 도중 사마사를 만나 황제의 밀조가 드러난 때문에 들통나 귀양을 감. 정치적인 면과 내정이 무척 뛰어났음.
하후혜(夏候惠) ? ~ ? : 위의 용장 하후연의 아들 사형제 중의 셋째. 자는 아권(雅?). 사마의가 천거.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고 군사를 부리는데도 능했음.
하후화(夏候和) ? ~ ? : 위의 용장 하후연의 아들 사형제 중의 막내. 자는 의권(義權). 사마의가 천거. 지략을 겸비하고 무예에도 소질을 보임.
한당(韓當) ?~ ? : 손권 막하의 용장. 손견때부터 손책, 손권까지 3대에 걸쳐 섬김. 요서 영지사람으로 자는 의공(義公). 유표를 칠 때 등성 싸움에서 적장 장호를 한 칼에 베었고, 적벽대전에서는 격전 중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던 황개를 건져내었다. 유수 싸움에서는 주태와 함께 거의 조조를 잡을 뻔한 일도 있었으며, 육손과 같이 촉한의 유비 군대를 탁향에서 크게 파했다. 석성후를 봉하고 도독의 칭호를 받았으며 병으로 죽었다.
한덕(韓德) ? ~ 227 : 위의 장수. 서량의 대장으로 개산대부를 잘 쓰고 용맹이 뛰어났었는데, 제갈량이 제1차로 위를 칠 때 한영, 한요, 한경, 한기의 4형제를 데리고 5부자가 함께 서강병을 거느리고 선봉으로 출전하였다. 봉명산에서 촉한의 선봉대장 조운과 마주쳐, 차례로 나가 싸웠으나 모조리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조운은 나이 육십이 넘었으나 첫 번 싸움에 혼자 다섯 장수를 베었던 것이다.
한복(韓福) ? ~ 200 : 조조 막하의 장수. 낙양태수로 있을 때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호위해 나오는 길을 막으려고 부하 맹탄과 함께 항거하다가 맹탄이 그의 칼에 죽자, 활을 쏘아 관우의 왼편 팔뚝을 맞췄으나 격노한 관우의 칼에 꿱 소리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의 오관참장의 제2호.
한복(韓馥) ? ~ 191 : 후한 말의 장수. 영천군 사람으로 자는 문절(文節). 동탁에 의해 기주자사에 임명된 후 원소 등의 반동탁 토벌군의 제2진으로 할 수 없이 참전하였고, 그 후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자는 원소의 계획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천하를 도모할 의사가 없어 원소에게 군량미를 보태주었다가, 도리어 그의 침공을 입어, 허무하게 영토를 빼앗기고 진류태수 장막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사람이 겁이 많아 대사를 도모할 인물이 못 되었으니, 노상 주위 사람이 자기를 해치지나 않나 불안에 싸여 지내다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죽었다.
한섬(韓暹) ? ~ 198 : 백파수(白波帥)라고 불리던 산적 출신의 장수. 이각, 곽사의 난리에 밀조를 받들어 어가를 호송하였으나, 조조의 대군이 나타나자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원술이 황제를 잠칭하고 7로의 군대를 풀어 나왔을 때 6로 군을 거느렸었으나, 진등의 설득으로 양봉과 함께 내응이 되어 원술이 패하는 결정적 계기로 만들었다. 여포에게서 산동지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노략질하고 백성을 괴롭히기 때문에 유비가 잡아 죽였다.
한수(韓遂) ? ∼ 215 : 후한 말의 군웅중 한 사람. 병주자사. 자는 문약(文約). 영제 때 변장과 함께 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온, 동탁 등의 토벌을 받고 양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동탁의 잔당 이각, 곽사의 무리가 장안(長安)을 점령한 동안 마등과 함께 서량군사를 끌고 쳐들어왔다가, 적이 지구전으로 버티는 바람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마등과는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라, 그가 패해 죽은 뒤, 아들 마초를 친조카로 여기고 손잡아 조조를 쳐서 여러 번 곤경에 몰아넣었다. 조조는 무력으로 졸지에 대항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둘 사이에 여러 가지로 얕은꾀를 부려 반간을 놓았기 때문에 드디어는 마초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고 그의 칼에 왼쪽 손목을 잘린 채 조조에게 항복해 있다가, 나중 건안 이십 년 서평 금성 지방에서 말직이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한숭(韓嵩) ? ~ ? : 유표의 장수. 원술이 망한 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하게 되자 양쪽에서 손을 뻗쳐 들어왔을 때, 조조와의 사이를 왕래하며 화평에 애썼으나 의심을 사 옥에 갇혔다가 유표가 죽은 뒤 놓이어 조조의 수하에 들어 대홍로의 벼슬을 받았다.
한윤(韓胤) ? ~ 196 : 원술의 막료. 여포와의 정책 결혼을 위하여 사신으로 왕래했다가, 원술과 손을 잡으면 조조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진규의 간언으로 여포에게 붙들려 허도 서울로 끌려가 참을 당하였다.
한현(韓玄) ? ~ 209 : 후한 말의 무장. 장사태수. 사람이 속이 좁고 의심이 많음. 유비가 적벽대전 후 형주를 차지하고 귀순을 권하였을 때, 늙은 장수 황충을 시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관우와의 사이에 아끼는 눈치라 잡아죽이려다가 몸을 의지해 와있던 위연의 손에 죽었다.
한호(韓浩) ? ~ ? : 조조의 막하의 장수. 유비가 유표를 의지하여 신야를 지키고 있을 때, 하후돈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제갈량의 첫 솜씨에 녹아 일군이 대패하여 자칫 죽을 뻔하였다.
허공(許貢) ? ~ 200 : 후한 말 군웅의 한 사람. 본시 오군태수로, 손책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빨리 이것을 쳐야 하리라고 조조에게 올린 편지가 발각되어 잡혀서 죽었다. 그의 집에 신세지고 있던 식객 세 사람이 손책의 사냥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이를 습격하여, 손책은 그 상처로 인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허유(許攸) ? ~ 204 : 본시 원소의 모사. 남양 사람으로 자는 자원(子遠). 거만하고 돈 모으기를 좋아하였다. 188년, 기주자사 왕분 등과 함께 합비후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원소의 막료로서 활약했다. 조조와는 젊어서 친교가 있었는데, 관도대전의 싸움에서 조조가 양식이 떨어진 사실을 순욱에게 써보낸 편지를 입수하고, 원소에게 기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조조에게 돌아 붙어 대세를 뒤집어 놓았다. 그의 정보로 양곡 쌓아둔 오소를 야습하여 이것을 불사르고 원소의 본영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고, 뒤에 원담, 원상 형제 싸움 가림에 기주를 함락시켰을 때, 자기 공로라고 뻐기고 다니다 허저의 칼에 죽었다.
허의(許儀) ? ~ 263 : 위의 장수. 용장 허저의 아들. 사마소가 종회를 시켜 위를 칠 때의 선봉 대장. 남정관을 치다가 수상 노손에게 막혀 이루지 못하고, 이어 종회가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오다 쫓겨 다리 구멍에 말굽이 빠져 죽을 뻔했던 탓으로 공신의 후예건만 군무에 충실치 못한 죄로 참형을 당하였다.
허저(許) ? ~ ? : 조조 막하의 용장. 초국 초현사람. 자는 중강(仲康). 조조가 복양의 패전 후 황건잔당을 토벌할 때 자신의 마을을 지키다 그의 수하에 들었다. 용맹이 절륜하여 동관 싸움에서 조조가 위경에 빠졌을 때는, 그를 들쳐 없고 한 칸이나 멀리 떨어진 배 위로 뛰어들었고, 혼자 말안장으로 적의 화살을 막으며 노를 저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조의 신변을 지키는 군대를 호위군이라 하여 전위와 그가 거느렸는데 전위는 장수의 야습으로 죽고, 허저는 음이 비슷하게 호치(虎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동관의 싸움에서 마초가 면대해 호후라고 불렀으므로 이후론 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마초와 전후 이 백 합을 싸운 끝에는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발가벗고 나서서 창을 잡고 승강이하다가 부러진 창으로 서로 두드리는 희극도 벌이었다. 인간이 우직할 정도로 고지식하여, 조조가 취해서 자는 방을 지킬 때 조인이 찾아온 것도 통과시키지 않아 조조에게 참 충신이라고 칭찬 받기도 하였다. 조조가 죽었을 때는 울다 피를 다 토했다 한다. 무위장군의 칭호를 받았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허정(許靖) ? ~ ? : 촉한의 문신. 여남 평여사람으로 자는 문휴(文休). 글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법정과 함께 유비를 도와 한중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벼슬이 사도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허지(許芝) ? ~ ? : 위의 문신. 태사승으로 있으며, 천문의 변조를 들어 헌제를 핍박하여, 조비에게 선위 하도록 요구하였다.
헌제(獻帝) 181 ~ 234 : 영제의 둘째 아들로 처음에 진류왕에 봉함을 입어 십상시 난리에 소제와 같이 피신하였다. 동탁이 임금으로 세우니 그때 나이 겨우 아홉 살이요, 연호를 초평이라 하였다. 이각, 곽사의 난을 만나 갖은 신고를 겪고, 다시 조조의 받드는 바 되었으나 허전의 사냥 이후 조정의 권한이 기우는 것을 한탄, 밀조를 의대 속에 넣어 국구 동승에 내려 조조를 멸하려다 발각되어 충신의 무리는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동귀비마저도 죽음을 당하였으며, 조조가 살았을 대만은 그래도 빈자리나마 유지하더니, 그의 아들 조비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산양공(山陽公)이란 호칭으로 지내다가, 제갈량이 죽고 그 해 오십사세로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학소(鶴昭) ? ~ 229 : 위의 용장. 태원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道). 사마의의 신임이 두터워 가정의 싸움 뒤, 동오(東吳)를 치러 나간 사이 진창 어귀를 지키어 제갈량의 불의의 습격을 막는 중임을 위탁받았다. 제갈량이 재차 출병했을 때 작은 성이라고 얕잡았으나 불과 3천의 수병으로 잘 싸워 그의 운제, 충차, 갱도로 파 들어가는 전술이 모두 소용이 닿지 않았다. 결국 제갈양은 학소가 굳게 지키는 진창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형도영(邢道榮) ? ~ 209 : 영릉군태수 유도의 부하 장수로 큰 도끼를 잘 써서 용명이 있었다. 유비가 적벽대전 후 형주를 손에 넣고 이 군마저 병합하려 들자, 자신의 용맹만을 믿고 항전하였다가 견디지 못하여 항복, 일단 석방되어 주인을 귀순시킬 임무를 받았으나, 야습으로 다시 항거하다가 조운의 창에 찔려서 죽었다.
형정(邢貞) ? ~ ? : 위주 조비의 모신. 유비가 동오를 치러 동병 하였을 때 사신 갔던 조자를 따라 동오에 와서, 손권을 오왕으로 봉하고 구석을 가하는 일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거만하게 굴다가 장소의 호통에 혼이 나기도 하였다.
호거아(胡車兒) ? ~ 197 : 동탁의 잔당인 장수 수하의 역사. 완성에서 조조의 침소를 야습할 때, 전위를 속여서 술을 먹여 골아 떨어지게 하였다. 이 바람에 조조는 아들과 조카까지 죽이는 참패를 당했지만, 자신도 그 전투에서 죽고만다.
호반(胡班) ? ~ ? : 촉한의 장수.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보호하여 조조의 곁을 떠나갈 때 관대하던 호화 노인의 아들. 형양태수 왕식의 종사로 명령을 받아 그를 죽일 채비를 하였으나, 한번 대하자 인품에 눌리고 또 아비의 서신도 있어, 왕식의 흉계를 일러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주었다.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을 때 찾아와서 유비 막하에 들게 되었다. 법정을 따라 촉한으로 갔다고 했을 뿐 뒷 소식은 모른다.
호준(胡遵) ? ~ ? : 위의 장수. 사마의의 요동 정벌에 선봉으로 나서서 활약하였다. 뒤에 동오를 칠 때에는 진중에서 술만 먹고 있다가 적장 정봉이 3천 명의 병정을 데리고 단병 접전으로 급습해 들어오는 통에, 환가, 한종의 두 장수를 일시에 잃고 대패하였다.
호화(胡華) ? ~ ? : 관우가 조조의 막하를 떠나 유비를 찾아갈 때 만났던 전에 의랑 벼슬을 하였다는 노인. 극진히 대우해 준 뒤에 아들 호반에게 보내는 편지를 당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관우는 또 한차례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화웅(華雄) ? ~ 190 : 동탁 막하의 용장. 관서 사람으로 키는 구척이나 되고 효용이 절륜하였다. 십칠 진으로 된 동탁 토벌군을 사수관에서 막아 싸워 용맹을 떨쳤다. 먼저 포신의 아우 포충을 베고 원술의 장수 유섭, 한복의 장수 반봉이 연이어 그의 손에 죽었다. 반동탁의 선봉부대인 손견에게 격파되어 죽었다. 관직은 효기교위.
* 연의상에서는 관우에게 죽었다고 하지만, 실제 반동탁의 선봉부대인 손견에게 죽었다.
화타(華陀) ? ~ 220 : 유명한 의사. 패국 초군사람으로 자를 원화(元化)라 하였다. 신의로 이름이 높아 수많은 환자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 동오에서는 주태가 여러 곳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을 치료해 살렸고, 나중 형주로 관운장이 화살을 맞아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살을 짜개고 뼈를 긁어 말짱히 치료하였다. 뒤에 조조가 죽음에 임박 하에 두통이 심하다고 불렀을 때, 골을 빠개어 치료하면 된다는 의견에 노여움을 사 그의 손에 죽었다. 조조와는 동고향 출신이다. 청낭서를 저술.
화핵(華?) ? ~ ? : 동오의 중신. 오주 손호가 날로 포악무도해 지며, 술사 상광의 말을 믿는 것을 간하였으나, '마땅히 죽일 것이로되 구신의 낯을 보아 살려 둔다'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고 돌아와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화흠(華歆) 157 ∼ 231 : 조조 막하의 문신. 평원 고당사람으로 자는 자어(子魚). 본시 하진에 의해 벼슬을 했으나 동탁이 진횡하자 일단 은퇴했다. 헌제 때 예장군 태수였으나, 우번의 권고로 동오의 산하에 들었다. 조조에게도 신임이 두터웠던 때문에 동오의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아 벼슬하였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나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있었으나 조조가 복황후를 잡아내 죽일 때 손수 황후의 밀실을 습격하여, 머리채를 거머잡고 끌어내는 등 신하로서 못할 짓을 한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끝내는 미리 조칙을 초하여 가지고 선위하기를 황제에게 강요하였다. 벼슬이 태위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화흡(和洽) ? ~ ? : 조조 막하의 문신. 여남 서평사람으로 자는 양사(陽士).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빈하였으며 조조에게 위왕 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태상에 이르렀으며 죽은 뒤 간후(簡侯)라 시호하였다.
환범(桓範) ? ~ 249 : 위의 무신. 패국 사람으로 자는 원칙(元則). 조상에게 붙어서 출세하였는데 재주와 시국을 보는 눈이 있어 지낭(智囊)이라는 별명으로 통하였다. 조상이 일족 전부 성밖에 사냥 나가는 것을 간했으며, 사마의가 성문을 막자 꾀로 빠져나가 조상을 만나, 천자를 모셔 허창을 발판으로 재기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환의(桓懿) ? ~ 258 : 동오의 충신. 손침이 권세를 잡아, 이대 황제 되는 손양을 내쳐 폐립을 단행할 때, 아무도 항거하지 못하였으나 홀로 반열에서 나서 그를 꾸짖다가 당장에 손침에게 참을 당하였으나, 의기로운 남아로서의 이름을 남기었다.
황개(黃蓋) ? ~ ? : 오의 용장. 영릉 천릉사람으로 자는 공복(公馥). 손견 때부터의 충성스런 대장으로 허다한 공을 세웠다. 적벽대전을 앞두고는 스스로 주유의 진을 찾아 고육지책을 쓸 것을 헌책, 생으로는 주유의 의견에 반대하였다가 죽도록 얻어맞고는 거짓으로 항복하는 문서를 조조에게 띄우고 파견돼 있는 채중, 채화 등 간첩의 눈을 속여 적벽대전의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대전에는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장료가 쏜 화살을 맞아 물에 빠졌으나, 본시 헤엄의 명수라 엄동에 갑옷을 입은 채였건만 살아나 다시 활동하였다. 벼슬이 편장군에 이르렀으며 유비와 대립하게 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권(黃權) ? ~ 239 : 익주 유장 부중의 주부. 서랑중 파현사람으로 자는 공형(公衡). 장로의 침입을 앞두고 법정, 맹달 무리가 유비를 불러들이자는 의견을 사리를 들어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기어가 유장의 옷자락을 물고 말리다가 옷자락을 채는 바람에 앞니 두 개가 뽑히기까지 하였다. 유비가 쳐들어와 촉의 운명이 위태로워졌을 때는 스스로 사신이 되어 한중 장로에게 가 득실을 설명하여 군사를 출동하게도 하였다. 유장이 항복한 뒤로 버티다가 유비가 친히 찾아보고 권하는 바람에 나와서 벼슬하게 되었다. 동오에 출병하였을 대는 수군을 통솔하였는데, 육손의 반격으로 대패하자 수하 병을 거느리고 위에 항복하였다. 조비는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제갈량도 그의 가족을 해치지 않았다.
황규(黃奎) ? ~ 211 : 후한의 중신인 황완의 아들. 조조 아래서 문하시랑으로 있었는데, 서량태수 마등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아 본심을 털어놓고 일을 꾸미려 하였으나, 데리고 살던 첩 이춘향의 간부 묘택의 밀고로 대사를 그르치고 마등과 함께 잡혀서 죽고 일족이 멸망당하였다.
황보숭(皇甫嵩) ? ∼ 195 : 후한 말 장군. 자는 의진(義眞). 조나 사람.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하진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했다. 이 때 북지군태수로 있던 황보숭은 군신회의 석상에서 당고의 금지를 해제할 것과 황제의 사유재산 및 마필을 방출하도록 주장했다. 이것이 용납되자 그는 좌장군으로 출전하여 장사, 여남, 진국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평정했다. 188년, 서북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의해 진창이 포위되자 좌장군으로 다시 기용되어 전장군인 동탁과 함께 이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때 동탁과 두 번에 걸친 병법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실전에서 적에게 파괴적인 타격을 주어 자신의 옳음을 증명했다. 이로써 동탁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같은 해 조정의 동탁군의 군 권을 빼앗기 위해 전 장병을 황보숭에게 인계할 것을 명했으나 동탁은 두 번이나 이를 거부했다. 이 사실은 동탁의 원한을 더욱 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동탁이 실권을 잡자 황보숭을 죽이려고 장안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그에게 낙양 출두를 명했다. 이때 양연이 동탁을 토벌하자고 했으나 듣지 않고 출두하여 그에게 사로잡혔다. 다행히 처형되기 직전 동탁과 친했던 아들 견수의 탄원으로 석방되었으나 후에 궁중 앞에서 동탁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동탁이 죽은 후 태위까지 승진했다가 병으로 죽었다.
황보역(皇甫 ) ? ~ ? : 후한의 충신. 서량사람으로 동탁의 잔당인 이각을 크게 꾸짖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각의 군중은 크게 동요하였다.
황승언(黃承彦) ? ~ ? :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사로 고결하기로 이름 높았다. 같은 양양의 명사인 채모의 누이와 결혼하여 태어난 추녀인 그의 딸은 모습이 괴이하고 추하여 장부의 아내 감이 못 되었으나, 지략이 뛰어나 남편의 공업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한다. 벼슬하지 않고 산중에 묻혀 지내던 중 어복포에서 육손이 팔진도에 빠져 죽게 된 것을 딱하게 여겨 구해 주었다.
황씨부인(黃氏夫人) ? ~ 234? : 제갈량의 부인. 황승언의 딸로 얼굴이 몹시 추하여 보잘것없었으나, 재주가 있어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고 육도삼략과 둔갑법에도 능통하였다. 애초에 제갈량이 양양에 있을 때,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맞이한 것인데, 실상 그의 내조에 힘입은 바 크다 한다. 남편이 죽자 충효(忠孝) 두 글자로써 유언을 남기고 뒤따라 죽었다.
황완(黃琬) ? ~ 192 : 후한의 사예교위. 태위로 있으면서, 동탁이 장안으로 도읍을 옮길 때 사리를 들어 반대하다가 파직 당하여 서민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간하던 오경, 주필 등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나머지 동탁에게 복종의 맹세를 했다. 후에 사도 왕윤과 모의하여 밀조를 얻어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하였다. 이각, 곽사의 난리 중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 황규는 나중에 마등과 일을 모의하다가 조조에게 잡혀서 죽었다.
황조(黃祖) ? ∼ 208 : 유표 수하 수군의 용장. 손견이 자기 돌아 갈 길을 끊던 일을 함혐하여 쳐들어 올 때, 그를 현산에서 죽였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어서 강하태수로 있을 때 유표가 사신으로 보낸 예형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양양성에서 황개에게 사로잡혔다가, 손책의 시체와 교환으로 풀려 나왔다. 손책이 유표를 치다가 죽었으므로 동오에서는 늘 유표를 원수로 여겨왔던 때문에 전후 여러 차례에 걸친 손권의 침공을 겪고 그때마다 잘 싸웠으나 감녕의 화살에 맞아 죽고 동오에서는 그의 목을 베어다 손책을 제사지냈다.
황충(黃忠) ? ∼ 219 : 유비 막하의 용장. 오호대장의 한 사람. 남양 사람으로 자는 한승(漢升).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용맹을 발휘. 특히 신궁으로 불리며 활 솜씨가 극히 뛰어났음. 원래 유표 수하의 중랑장이었으나, 한현에게 있다가 장사를 치러 온 관우와 뜻이 통해 낙성 후 유비의 부름을 받아 그의 막하에 들어 토로장군이 되었다. 서촉으로 유장을 칠 때는 위연과 함께 선봉이 되어 공을 세우고 218년에 한중에서 조조군과 부딪쳤을 때는 역시 늙은 장수 엄안과 함께 정군산에서 위공을 세웠으며, 위의 명장 하후연의 목을 베었다.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오호장군이 되었다.
황호(黃皓) ? ~ 264 : 촉한의 환관이요, 간신. 암우한 후주 유선의 주변에 인의 장벽을 쌓고 그의 눈과 귀를 가려 간사하게 굴고 주색에 파묻히게 하였다. 강유가 위병과 싸워 연전연승하였을 때도, 까닭 없이 불러들여 시기를 놓치게 했고, 위군의 침입까지 속여서 알리지 않았다. 위장 등애도 그를 죽이려 했으나, 뇌물과 간사한 말로써 목숨을 보전하였다. 후주를 좇아 낙양으로 옮겼을 때, 사마소는 그를 가리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한 놈이라고 무사를 시켜 능지처참해 죽였다.
후성(侯成) ? ~ ? : 위의 장수. 여포의 부하장수였으나 금주령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고 앙심을 품어 그를 묶어 조조에게 바치고 항복함.
희려(?慮) ? ~ ? : 조조 막하의 장수. 복황후가 친정 아버지 복완과 짜고 날로 방약무인하게 된 조조를 없애려던 계책이 탄로 났을 때, 명을 받들고 들어가 황후의 옥새를 강제로 회수하였다.
첫댓글 하안이 하진의 손자인 것은 알았으나 그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었다구요....하 황후나 아무튼 그 집안이 여자가 이쁜 집안인가 봐요.조조가 탐을 냈다면...........
@충정공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헉 관우가 한잔의 술이 식기 전에 다녀온다고 했던 화웅이 손견(부하)의 손에 죽었다구요??
그것은 연의상의 얘기이고, 제가 알기론 윗 글에 써져 있는건 여러가지 자료들(..)을 토대로 만든 .. 아무튼 그런 글 일 것 입니다. (응?)
직업 병 발동............황조(黃祖) ? ∼ 208 에 대한 설명에서 손책이 아니라 손견 아닌가요? 중구야 너 너무 잘난척 하는 거 아냐?? 퍽퍽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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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