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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2.08 03:30
금령총(金鈴塚)
▲ 금령총 무덤 주인의 허리춤에서 발견된 1쌍의 금방울.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특별전을 내년 3월까지 열어요. 금령총은 금관총(金冠塚)에 이어 경주의 신라 고분 중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된 곳으로, 황금으로 만든 방울이 발견돼 '금령총(金鈴塚)'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어요.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처음 조사됐지만 미진한 부분이 많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018년부터 재조사를 실시했는데요. 이번 특별전에는 최근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소개해 그동안 감춰져 있던 유적의 가치를 새롭게 밝혔다고 해요. 금령총이 어떤 무덤이고, 어떤 재미난 것들이 발견됐는지 더 알아볼까요.
왕뿐 아니라 왕비·왕자도 금관 쓸 수 있어
1921년 금관총이 발굴되며 신라 고분에 금관을 비롯한 황금 유물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는 1924년 경주 노동동 일대의 작은 무덤 2기를 발굴하기로 결정했어요. 그중 노동리 2호분은 5월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됐고, 5월 22일 무덤 주인이 누워 있는 나무널[木棺] 부분을 조사하자 반짝반짝 빛나는 금제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금관과 금제허리띠가 발견됐는데요. 이와 함께 무덤 주인의 허리춤 부분에서 파란색 유리를 박아 장식한 금방울 1쌍이 함께 발견됐어요. 금관에도 금방울 1쌍이 매달려 있었는데 지금도 흔들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요.
금령총이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연구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이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금관이나 금제허리띠, 반지와 팔찌 등 장신구의 크기가 다른 무덤에서 발견된 것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이죠. 금관의 경우 나뭇가지 장식과 사슴뿔 장식을 머리띠에 부착한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다른 신라 금관과 비교할 때 지름 15㎝로 크기가 작아요. 천마총 금관 지름이 20㎝, 금관총과 서봉총 금관의 지름이 각각 19㎝, 18.4㎝인 것과 비교되며, 다른 금관에 달린 비취색 곡옥(曲玉) 장식도 없지요.
금제허리띠 역시 둘레가 74㎝에 불과해요.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등지에서 출토된 5점의 금제허리띠 평균 길이 114㎝에 비하면 매우 짧다고 할 수 있죠. 그 밖에도 시신을 넣는 나무널의 크기가 길이 150㎝와 너비 60㎝로 작고, 발굴 당시 금관의 상단부에서 발찌가 발견된 곳까지의 길이가 90㎝를 넘지 않았다는 점도 이 무덤의 주인이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어요.
금관의 주인이 어린아이라면 신라에서 금관은 반드시 왕만 사용한 왕관(王冠)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어요. 신라 무덤에서 금관이 부장됐던 시기는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요. 이 무렵 신라 왕 가운데 10세 전후에 사망한 왕은 한 명도 없어요. 또 2기의 무덤이 나란히 배치된 황남대총에서 남성 무덤인 남쪽 무덤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고, 여성 무덤인 북쪽 무덤에서만 금관이 출토됐어요. 이처럼 신라에서는 왕뿐 아니라 왕비나 왕족, 심지어 어린 왕자까지도 황금으로 만든 금관을 사용할 수 있었답니다.
금관보다 유명한 기마인물형토기
금령총에서 발굴된 유물 중 금관보다 더 유명한 것이 2점의 기마인물형토기예요. 금령총 금관은 '보물(寶物)'이지만 이 토기들은 국가의 보물이라는 의미인 '국보(國寶)'로 지정돼 있어요. 말 탄 사람의 옷차림이나 말갖춤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돼 당시 사람의 모습과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거든요.
2점의 기마인물형토기는 주인상과 하인상인 것으로 추정돼요. 하인상인 것으로 보이는 토기의 경우 왼손은 말고삐를 잡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방울로 보이는 악기를 흔드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말에 올라탄 사람의 옷차림이나 말갖춤, 한 손만 사용해서 능수능란하게 말을 부리는 모습에서 하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어요. 오른손에 든 방울은 장례를 진행하는 데 사용한 도구로 보아 무덤 주인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제사장으로 보기도 해요.
주인상은 양손에 말고삐를 부여잡고 안정적으로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머리에는 삼각형 고깔모자를 쓰고 날렵한 콧날에 가느다란 눈과 눈썹을 하고 있어요. 갑옷을 갖춰 입은 옷차림, 말안장과 발걸이 등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어요. 다만 말 크기와 비교해 신체의 비율이나 얼굴 생김새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실제 무덤 주인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아요.
기마인물형토기는 모두 말 등에 동그란 모양의 그릇이 있고, 말 가슴에 대롱이 달려 있어요. 등에 있는 깔때기처럼 생긴 그릇에 물을 부으면 가슴에 있는 대롱으로 물이 나오게 돼 있어요. 말의 몸통은 비어 있는데 240cc 정도의 액체를 담을 수 있다고 해요. 그 때문에 이 토기를 신라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사용한 주전자일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술이나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주전자는 보통 1000cc 이상의 액체를 담을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이 토기는 그에 비해 용량이 지나치게 작아요. 물을 붓거나 따르는 주입구도 지나치게 좁아서 내부를 깨끗하게 씻을 수도 없고 한 손으로 액체를 따르기도 불편하죠. 그래서 이 토기를 등잔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깔때기처럼 생긴 곳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웬만한 움직임에도 기름이 흘러넘치지 않고, 가느다란 대롱이 몸통 밖으로 뻗어나와 심지가 타는 위치와 기름 저장소가 자연스럽게 분리되며, 사각형 판을 받침으로 사용해서 흔들림 없이 등잔을 받칠 수 있다는 거예요. 1924년 발굴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말 얼굴과 고삐, 가슴걸이, 대롱 등에 그을음이 두껍게 부착돼 있었어요. 이런 흔적은 대롱에 불을 붙여 사용하면서 형성된 등잔 사용 흔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라인들이 말을 이용해서 주전자나 등잔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라에서 말이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말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안전하게 인도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랍니다.
[재발굴에서 새로 밝혀진 사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에 걸쳐 약 300일간 금령총을 재발굴했어요. 그 결과 이 무덤이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지름 약 13m, 높이 약 3m가 아니라 지름 약 30m, 높이 약 7m로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밝혀냈어요. 또 무덤 외곽을 돌로 쌓는 호석(護石) 바깥에서 수십 점의 커다란 항아리와 그 안에 담긴 제사용 토기, 공헌물을 발견해 신라 무덤 제사의 모습 일부를 새롭게 복원할 수 있었어요. 또 몸통 일부가 깨졌지만 얼굴과 앞다리가 남아 있는 말모양토기도 발견했는데요.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내민 말의 얼굴이 매우 익살스럽게 표현돼 있답니다.
▲ 금령총 금관은 지름이 15㎝밖에 되지 않아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정돼요. 나뭇가지 장식과 사슴뿔 장식이 달려 있어요. /국립경주박물관
▲ 2점의 기마인물형토기에는 말 탄 사람의 옷차림이나 말갖춤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어요. 신라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예요. /국립경주박물관
▲ 금령총 재발굴에서 새로 발견한 말모양 토기. /국립경주박물관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