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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2.17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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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초연된 국내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공연 모습. 당시 전속 오케스트라와 배우·무용단·합창단 등 출연진만 100명 이상이었다고 해요. /조선일보DB
한국 최초의 뮤지컬은 어떤 작품일까요? 여기엔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요. 뮤지컬이라는 서양의 공연 형식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죠. 뮤지컬은 단순히 춤과 노래를 나열한 '쇼'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음악과 안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서양에선 최초의 현대 뮤지컬 작품으로 1927년 뉴욕에서 공연된 '쇼 보트(show boat)'가 꼽히고 있어요. 그로부터 39년 뒤인 1966년 우리나라에도 뮤지컬 형식을 갖춘 작품이 등장하지요. 예그린악단이 제작한 '살짜기 옵서예'입니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인 '배비장전'을 각색한 창작 뮤지컬로 당시 큰 인기를 얻었어요. 1962년엔 미국에서 초연된 것을 번역해 무대에 올린 뮤지컬 '포기와 베스'가 공연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이를 최초의 뮤지컬로, '살짜기 옵서예'를 최초의 창작 뮤지컬로 나눠 구분하기도 하지요.
1960년대에 처음 국내에 등장한 뮤지컬은 시간이 지나며 가장 인기 있는 공연 장르가 되었는데요. 흔히 '빅 4 뮤지컬'이라고 불리는 '캣츠'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이 탄생한 뮤지컬 본고장 영국, 그리고 뮤지컬 산업을 꽃피운 미국 작품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다양한 국가의 뮤지컬을 국내에서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이렇게 해외 작품에 일정한 공연료를 지급하고 국내에서 제작과 공연을 하는 것을 '라이선스 뮤지컬'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작가, 작곡가, 연출가 등이 직접 제작한 작품을 '창작 뮤지컬'이라고 해요. 2000년 초연 이후 올해 25주년을 맞은 '베르테르'(3월 16일까지·디큐브 링크아트센터), 그리고 1995년 무대에 올라 올해 30주년을 맞은 '명성황후'(3월 30일까지·세종문화회관 대극장)가 대표적인데요. 오늘은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국내 창작 뮤지컬을 만나보겠습니다.
뮤지컬 팬덤 문화 이끈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각색한 작품이에요. 괴테의 원작은 편지글 형식으로 된 소설로, 사랑에 빠졌다가 좌절하는 청년 '베르테르'의 감정을 세심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죠.
베르테르는 아름다운 여주인공 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해요.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베르테르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죠.
잘 알려진 고전 작품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선을 드러내는 풍부한 음악 덕분이기도 한데요. 로테를 처음 만난 순간 베르테르가 느끼는 설렘과 그 이후 찾아온 고통,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이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전달되죠.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현악기로 편성된 음악과 배우들의 노래가 이야기의 완성도를 더한답니다.
특히 자신의 약혼자 알베르토를 기다리는 로테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베르테르가 함께 부르는 '하룻밤이 천년', 그리고 로테에 대한 사랑을 접으며 베르테르가 부르는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이 대표곡으로 꼽힙니다.
이 뮤지컬이 25년간 공연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뮤지컬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빼놓을 수 없어요. 2000년 초연 당시 적자를 본 제작사가 공연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자 '베사모(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이름으로 팬 모임이 결성됐는데,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제작비로 재공연을 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또 베르테르는 지금은 뮤지컬 관람의 한 형태로 자리 잡은 '회전문(반복 관람)'이 시작된 작품으로, 뮤지컬 팬덤 문화를 발전시킨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지요.
K창작 뮤지컬 위상 높였죠
뮤지컬 '명성황후'는 고종의 왕비였던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인 1995년에 처음 공연됐어요.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왕비가 시해된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지요. 초연 이후 12년 만인 2007년엔 국내 뮤지컬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는데 영화로 비유한다면 '천만 관객' 흥행에 버금가는 수치랍니다. 지금까지 100만 관객을 기록한 뮤지컬은 명성황후를 포함해 열 편밖에 없어요. 현재 명성황후는 200만 관객 기록까지 돌파했는데요. 국내에서 공연된 뮤지컬 중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것은 '캣츠' '맘마미아' 이후 세 번째입니다. 흥행 뮤지컬들이 대부분 라이선스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국내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의미가 있지요.
명성황후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성과를 거둔 뮤지컬이에요. 1997년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올라 '국내 최초 브로드웨이 진출 작품'으로도 기록되어 있지요. 해외에 처음 진출한 국내 뮤지컬은 1987년 미국에서 공연된 서울시립가무단의 '양반전'이었지만, 이는 해외 교포들을 상대로 한 위문 공연 형태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명성황후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정식으로 티켓을 판매하며 세계 뮤지컬 시장에 우리 창작 뮤지컬의 위상을 알리는 역할을 했지요.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의 정치 분열과 열강의 압박을 동시에 겪고 있었죠. 정치인들은 문호를 개방하고 열강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개화 세력과 유교적 사회질서와 왕권 중심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쇄국 세력으로 나뉘어 부딪혔습니다. 외부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러시아 등이 한반도로 점차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하고 있었죠. 뮤지컬은 이런 시기를 살았던 명성황후의 삶을 국내외에서 새롭게 주목하게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공연 마지막, 명성황후가 부르는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세계의 관객들에게도 감동을 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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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베르테르'의 한 장면. 극중에서 베르테르(오른쪽)는 결혼한 로테(왼쪽)와 재회한 후 그녀와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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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왼쪽)가 훗날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되는 어린 아들(세자)에게 '어질고 강한 왕으로 자라나야 한다'고 당부하는 장면이에요. /㈜에이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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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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