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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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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시관광지 스크랩 목포시 1박 2일 박화성 단편소설 문학투어
전영자(─━큐ㅌ1★) 추천 0 조회 44 13.05.13 19:4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Pau Casals - El Cant del Ocells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작품1- 박화성의 단편 <추석전야>

추석전야 - 1930년대 목포 선창가 주변에 면화공장에 다녀던 주인공의 삶 속으로 ...

여행코스

목포 남항 - 사꾸라마찌(요정) - 경동성당 - 구동양척식주식회사 -적산가옥- 유달초등학교(옛심상소학교) -국도 1.2호 기점 기념비-

구영사관 - 호남은행 - 구동본원사 - 혼마찌(본정통)거리 - 죽교동 골목

맛거리 - 혼마찌(본정통) 거리에서 '쑥꿀레' 또는 '팥 칼국수'

잠잘 곳 - 1936 게스트하우스, 가족호텔

둘러보는 시간 : 도보로 약 2시간

이곳은 마치 1930년대 영화 세트장처럼 근대문화유산이 가장 잘 보존돼 있어 항구도시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게 특징임다.

남항 : 1897년 개항 당시 국제항구입니다.

 

사꾸라마찌 : 일본식 요정으로 사용했던 적산가옥이 남아있습니다.

외국인 거류민단촌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일본인들이 이곳을 윤락촌으로 조성했다. 조선인 마을 온금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목포에 유곽이 생긴 것은 1905년도의 일이다. 목포항이 1897년 10월에 개항했으니 개항 후 8년만이다. 유곽은 당시 죽동 지역, 흥선사(興禪寺)와 통조사(統照寺) 사이 저지대에 생겼다. 그 후 주거지가 확장되면서 1914년 현재의 금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이 바로 앵정(櫻町), 사쿠라마찌다.

 

경동성당 :

한국최초의 레지오마리아( 마리아의 군대)를 시작한 목포 경동성당. 1952년 설립

구동양척식주식회사 :

 

소설 [태백산맥 3권 p160 ~167] 일제강점기 토지수탈 내용 요약 정리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에 승리함으로 이권산업을 목적으로 그들의 대기업 자본을 한 반도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 때 조선은 이미 왕이나 내각은 정치 수행능력을 상실한 상태로,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일본. 러시아.

청국 등의 세력다툼에 따라 좌우를 모른 채 휘둘리고 있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우리나라와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조약은 한반도를 독무대로 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고, 식민지화를 위한 발판을 완전히 굳히게 된 것이었다.

그 1단계 작업이 토지약탈이었다.

곡창지대인 삼남(충청,전라도 경상도)을 목표로 대자본을 동원시켰다.

일본이 토지를 소유하려했던 이유

1.식민지화를 위한 실질적 세력확대

2. 이윤 획득이 큰 사업이었다.

(한반도의 농토는 일본에 비해 열 배에서 ~서른 배까지 싼 값이었다.

수확조건은 지주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바치도록 유리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땅을 사서 소작을 주는 경우 투자이윤의 연간 0.23~0.31에 달하는 기막힌 장사였다.

1907년 우리나라를 여행한 시가라는 사람은 여행기를 통해

'망망한 평원의 하유일망 오만석이 내다보이는 곳이

일 단보에 4~5원이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한국에 이주하라. 한국에 이주하라.'

땅이 확보되자 일본인의 이민이 뒤따랐다. 1917년 3월 10280명이 우리나라에 거주하였다.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대략 129300여 정보(삼억팔천칠백구십만 평)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 나라는 한일합방 이전에 벌써 일본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던 게야...."

(중략)

1910년 국권 상실 후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전국적으로 본격화시켰다.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1. 식민지배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직구성의 수단으로 식민지인의 실제 재산권을 파악

2. 옛날로부터 토지대장이 불완전하고 토지소유의 문서화가 불확실했던 허점을 이용하여 토지를 강탈할 계기를 만들어야 했으며,

3. 토지조사로 토지소유권을 확립해야만 더 많은 일본 자금을 끌어들이게 되며, 매입, 저당, 차압 등의 업무처리가 신속하게 되고,

4. 세금원의 확보를 위함이었다.

1908에 건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토지조사를 맡았다.

기한 내에 토지소유를 신고하도록 했으며 신고하지 않으면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행정단위별 토지조사위원회 조직을 만들었다.

각 도의 위원장 - 도지사

5명 위원 중 3명 - 도참여과이나 도의 부장급인 친일파 관리였고,

나머지 2명 - 지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지로 짜였다.

그 아래 조직은 지방관청의 관리를 중심으로 해서 면장. 이장. 지주대표로 구성되는 지주위원회였고,

거기에는 자방관청이 선정한 마을 지주대표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농민이 자기 땅의 신고서를 제출하면 그 내용을 검토하고 인정 가부의 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은 8년만에 끝났다.

1917년 동척이 소유한 땅이 칠만사천칠백삼십 정보. 가장많은 해는 1921년 구만구천사백팔십 정보였구요. 약 십만정보로 약 3 억 평 땅이었다.

당시 인본인의 농업 이민자가 백만 명을 헤아렸다.

우리나라의 농업인구는 전인구의 팔할이었고 농민의 팔할이 소작농이었다.

나는 타는 듯한 햇볕 아래를

맨발로 헤치며 논에 왔노라

집에 병들어 누운 아내를 생각하며

서마지기 조그만 나의 논에

파랗던 어린 모는 가뭄에 타 마르고

쪼개진 논바닥엔 새우새끼 누웠고야....

아, 이 모양 차마 보기 어려워

나는 논두렁 치며 엉엉 울었노라

해 넘어 가는 것도 모르고.

**시인 장만영이 1932년 쓴 '논부의 설움'에서...

구일본영사관 : 박화성 '추석전야' 단편소설에 '목포부청사'로 나옴

300명 하수도공사 임부가 파업했던 곳

작품 2 -박화성의 단편 <하수도공사>

하수도공사 - 1930대 시작된 하수도공사와 노동자들의 임금지급이 안돼서 노동운동을 일으켰으며 생존을 위해 권력과 대치한 현장

여행코스

양동교회 - 양동육거리 - 이난영생가터 - 북교초등학교 - 죽교동골목 - 조각공원 - 하수도공사길 - 북교동성당 -구청년회관 - 박화성 생가 터

둘러보기 시간 - 약 3시간

맛보기 - 목포 죽동골목 '칼국수'

잠자리 - 가족관광호텔, 1936게스트하우스

양동교회 - 유진벨이 세운 전남 최초의 교회. 목포청년들의 사랑방이었다.

양동육거리 -이주한 조선인들이 살던 곳이며, 서양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양동'이라 불렀다. 정명여고에 '서양선교사관'이 있다.

북교동 골목 - 동권이와 용희가 살았던 곳 http://blog.daum.net/cuteyoungja/8749771

북교초등학교 - 양동교회를 답사하고 유달산 쪽으로 50m만 올라오면 북교초등학교와 만난다.

1897년에 세워진 학교이니 양동교회와 역사를 함께한다.개교할 때의 이름은 무안공립소학교였다

조각공원 - 주인공이 지냈을 집터가 있던 곳, 1981년 국내 최초 야외조각공원이 세워졌다.

복개된 하수도길 - 하수도공사현장

북교동성당 - 김우진씨의 집이었으나 해방 후 전 재산을 성당 측에 기부했다. 하수도공사에 언급된 장소이다.

구청년회관 - 박화성이 쓴 '헐어진 청년회관'이기도 하다

청년회관 뒤에 구신안군청은 무안군청 자리다.

박화성의 생가 터 -현재 '차안다니는 거리'초입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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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5.14 14:34

    첫댓글 더 업그레이드 해서 목포시의 여류 문학인 작품 배경 답사 코스로 탄생되길 바래요~

  • 13.05.15 16:59

    이 투어를 우리 해설사 선생님들이 먼저 체험하면 어떨까요~~~

  • 13.05.16 14:31

    대찬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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