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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끼지방 기리시단 성지 순례의 길
( 2011. 2. 21 - 24 )
김해 공항을 떠오른 비행기가 4,000m의 고도를 잡고 후꾸오까로 날고 있다.
천국 가는 길도 이럴까?... (2011. 2. 21)
다비라(田平) 성당의 한 스테인드글래스. 색채가 짙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는 선교사일까?
(2011. 2. 21)
신자들이 가난하여 조개껍질을 구워 석회를 만들어 지은 이 성당은,
1918년 일본 26성인에게 봉헌되었단다.
성당 바로 옆에 먼저 간 신자들의 묘지가 함께 있다.
양택과 음택이 같이 있는 셈인가.
이 성당에서 일본에서의 첫 미사가 봉헌되었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독서를 했다. (2011. 2. 21)
다비라성당 성모동굴 앞에서의 우리 부부.
세월의 흔적이 서려있는 것 같다. (2011. 2. 21)
이끼쯔기(生月)정 박물관 마당의 시마노칸.
바다에 삶을 의지하고 사는 고장임을 알게한다. (2011. 2. 21)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인형들...
삶은 언제나 기원과 위험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2011. 2. 21)
다른 존재를 먹어야하는 지구촌의 삶 방식은
참 잔인하고도 거룩한 것이다싶다. (2011. 2. 21)
이끼쯔끼정 박물관 이층 한 켠에 박해시대 잠복교회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예수와 마리아의 성상들이
얼른 보기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처럼 보이게 만들어져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수나 마리아를 상징하는 모습이나 문양이 들어있다 한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성직자가 없는 잠복기를 250여년 겪었단다.(2011. 2. 21)
잠복기의 전례력(典禮歷)이었을까?
맨위 날짜가 주일(일요일)을 나타낸 듯 하다. (2011. 2. 21)
마치 불화처럼 그려진 성화. (2011. 2. 21)
이끼쯔끼정 박물관 앞바다 풍경.
소나무가 귀한 지역이어서 무척 반가웠다. (2011. 2. 21)
구로세노쯔지 십자가.
십자가 뒤에는 순교복자 니시겐까 3가족의 돌무덤이 있다. (2011. 2. 21)
"보세요. 여기에 우리 가족이 있습니다"라고 쓴 비문이 인상적이다.
아버지 카스팔니시겐까, 어머니 울술라니시도이,
큰아들 요한마따이찌가 1609년 11월 14일 가족이 순교하고,
2008년 11월 24일 시복(열복)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2011. 2. 21)
순교자 돌무덤 3기가 400년 풍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011. 2. 21)
하루 순례까 끝났다.
히라또 해상호텔에서 바라본 땅거미 내린 해진 곳... (2011. 2. 21)
히라또(平戶) 사끼가다(崎方)공원에서.
작은 도시지만 공원이 고색창연하고 깔끔했다. (2011. 2. 22.)
이렇게 둘쨋날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히라또 길 가 한 조형물. 무슨 용도일까? (2011. 2. 22.)
길 가의 작은 사당?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1엔, 5엔, 10엔짜리 동전들이 봉헌되어있다. (2011. 2. 22.)
성 프란치스코하비에르 기념성당 앞에서... (2011. 2. 22.)
성당안의 성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상.
이곳에서 우리는 두 번째 미사를 드렸다. (2011. 2. 22.)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의 기도문'.
동양의 사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하비에르신부는
1549.8.15.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1550년부터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한다. (2011. 2. 22.)
성 프란치스코하비에르 기념성당 성모동굴 앞에서 길동무 마리안나... (2011. 2. 22.)
성물판매소 옆에 있는 패트병 바람개비. 페기물도 이용하기 나름이죠?
돌아가면 나도 만들어 봐야지... (2011. 2. 22.)
히라도 출신 한 시인의 시비.
시는 길고 인생은 짧다. (2011. 2. 22.)
히라도 관광도우미.
일본은 무엇이든 관광에,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다싶다. (2011. 2. 22.)
소또메시쯔(外海出津)성당.
소또메는 박해시절 250여년간을 잠복신앙생활을 한 대표적인 곳이란다.
이곳에는 프랑스 귀족출신 사제 도로 신부가 사목하며 '소또메의 태양'으로 불리었단다.
도로신부는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어망공장, 방파제 건설, 밀농사법 전파,
일본 최초의 마카로니 공장 설립, 교육사업, 의료사업 등 구제사업을 했다고 한다. (2011. 2. 22.)
엔도슈사꾸(遠藤周作)문학비.
이곳이 그의 '침묵'의 배경지다. (2011. 2. 22.)
운젠(雲仙) 유황온천 오이도 지옥 앞에서.
아내와 일행들... (2011. 2. 22.)
환경성의 '지옥 내는 위험하다'는 입장금지판. (2011. 2. 22)
지구는 저리 열을 내 뿜어도 식지 않을까?
유화수소 등 유황화합물 냄새가 많이 났다.
행복한 한쌍으로 보이나요? ㅎㅎ (2011. 2. 22.)
저렇게 끓는 곳에 잡힌 신자들 몸을 넣었다 빼냈다를 반복하며 죽였단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까?
1629. 8. 3. 당시 조선 여인 이사벨라를 이곳에서 고문하기도 했다한다.
이사벨라는 잔혹한 고문을 끝까지 이겨내어 배교하지 않았다.
운젠 온천의 순교자 기념비석과 십자가.
매년 5월 이곳에서 나가사끼 교구 주교님의 미사 집전이 있단다. (2011. 2. 22.)
둘쨋날 순례도 끝났다.
고통도 목숨도 두렵지 않은 신앙은,
신앙은 대체 인간에게 무엇일까.....? (2011. 2. 22.)
두 모델(?) 뒤로 운젠 후겐다께 분화구가 보인다.
육안으로는 아직도 분화활동을 하고 있는 둣 했다.
지구라는 행성과 별들은 우리 생태계의 생명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하여, 지구는
내 또 다른 어머니란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2011. 2. 23)
이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기막힌 현장이었다.
분화구는 직선거리로 따져서도 수 킬로미터는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화산재와 돌맹이들이 여기 까지 이렇게 많이 밀려 오다니...!?
운젠 후겐다께 분화활동은 1990. 11.~ 1996.5.까지 있었다한다.
15년만에 이곳 교육장을 제외한 다른 곳은 언제 화산활동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대부분 검은 흙의 농경지가 되어 있었다.(2011. 2. 23)
당시 이 가옥 내부상황을 보자(아래)
처참함 그 자체다. (2011. 2. 23)
교육으로 다음 분화를 대비하고 있지싶다.
일본인들은... (2011. 2. 23)
시마바라(島原) 가톨릭 성당. 대문의 현판과 함께 사진을 찍다가 성당 일부가 가려졌다.
이곳에는 '신도는 인간 이하 짐승의 취급을 받아야 한다'며 엄지, 약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을 잘린 후처형된 16명의 순교사화가 서려있다.
이 성당에서도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순교자 유해를 공경하는 예를 드렸다.(2011. 2. 23)
바오로우찌보리(당시 47세)의 세 아들
이냐시오우찌보리, 안토나오 우찌보리, 발다실우찌보리의 상.
아버지와 세 아들 모두 1627년 순교하였다했다.
특히, 막내 5세 이냐시오는 동상에서 보듯, 잘린 두손을 하늘로 치켜올려
손가락에서 솟아나는 피가
붉은 장미를 보듯하게 해, 보던 이들을 감동케 했다한다.
아버지와 세 아들 모두 순교 복자(福者)가 되었다. (2011. 2. 23.)
마침 우리가 가기 이틀 전이 아리아께(有明)바다 순교복자 축일(기념일)이어서
게시판에 세 어린 복자들에게 기원하는 기도문이 붙어있었다.
"복자 이냐시오우찌보리, 복자 안토니오우찌보리, 복자 발다살우찌보리여
우리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라고... (2011. 2. 23.)
로마에서 공부한 시마바라성당의 주임사제와 우리 부부.
이곳에서 4년간 사목하셨단다. (2011. 2. 23.)
현대의 성자 꼴베신부 상.
폴란드 출신인 꼴베신부는
이곳 일본 나가사끼에서 6년간(1930~1936) 수도와 사목활동을 하였단다.
병약한 그는 일본에서 많은 일을 하며 혹독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마음이 좋아 아래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정도였다고
이제 막 꼰벤뚜알회 수도사제가 된 한국인 신부는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2011. 2. 23.)
꼴베신부 집무실을 보자!(아래)
2평도 채 안되어보이는 좁은 방이었다.
저 책상과 의자는 본인이 직접 만든 거란다.
책상에서 돌아서면 닿는 나무 벽면에는 언제나 양방에서 서로 보고 부를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단다.
그 것은 꼴베신부가 병약했기때문에 무슨일이 있을 경우, 옆방의 수사에게 말하거나
옆방의 수사가 알아챌 수 있도록 하는 용도로 만들었다했다.
꼴베신부는 1936년 폴란드로 귀국해 수도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단다. (2011. 2. 23.)
꼴베신부가 일본에 들여와 쓰던 인쇄기계.
꼴베신부는 폴란드 귀국후 독일 나치에 의해 채포,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갇혔다.
꼰벤뚜알 수도원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자가 있는 동료 수감자 프란치스꼬가요부나체크가 아사형이 확정되어 슬퍼하자,
꼴베신부는 그를 대신하여 처형되기를 자청하여, 아사형에 처해졌는데,
음식을 굶기는기 긴이 지나도 죽지 않자, 잔혹한 나치는 독약을 주사하여 죽였다고 한다.
꼴베 신부는 1941. 8. 14. 47세를 일기로 이렇게
다른 이(이웃)를 살리고, 자신의 생을 마쳤다고한다.(2011. 2. 23.)
성인 꼴베신부를 그린 성화.
꼴베신부는 나치 희생자 가운데 처음으로 1971. 10. 17.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1982. 10. 10.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되어 '현대의 성인'이 되었다. (2011. 2. 23.)
꼴베성인이 사용하던 성작. (2011. 2. 23.)
꼴베 신부가 창간한 '성모의 기사'잡지 창간호.
1930년 5월이라 적혀 있다.
5월은 성모 성월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였다. (2011. 2. 23.)
꼴베 신부가 일하던 꼰벤뚜알 수도회 성당.
새로 지은 성당으로 십자고상 아래 성모상이 있는 모습이독특하다.
꼴베신부의 각별한 성모신심이 드러나 보인다. (2011. 2. 23.)
성당 옆 소성당에 그림으로 모셔진 꼴베성인의 모습.
그림 오른쪽 중 하단에 일본을 상징하는 꽃과,
왼쪽 중간 쯤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장이 그려져 있다.
일본인 화가가 그렸기 대문이리라. (2011. 2. 23.)
나가사끼 역 부근 번화가에 사람을 겁내지 않는 고양이가 외롭게 졸고 있다.
일행들은 신기해 했으나, 내 눈에는 저 고양이가 일본과 한국 사람들의 마음 차이를
나타내 주는 것만 같아 즐겁지만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본 한 두마리의 고양이도 사람 겁을 내지 않았다. (2011. 2. 23.)
동양의 로마로 불리던 나가사끼의 우라까미(浦上) 주교좌 성당.
원폭 투하지점에서 불과 1Km도 안되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박해시대 신자 색출을 위해 '후미에'(성화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 행위)가 행해지던 곳이라 하였다.
후미에로 인한 순교자 중 205위의 복자가 있고,
그 중에는 조선인 '카이오'도 있단다.
이 성당은 원폭피해(신자 12,000명 중 8,500명이 사망)를 입어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은 것이다. (2011. 2. 23.)
성당 뜰에 있는 원폭 피해 성상들.
목이 날아가고 유탄성 물질들과 부딪힌 흔적들이 역력하다.
안내 수녀님의 설명에 의하면
성당 입구 위에 있는 예수 고상은 완전히 부서지고,
성모상과 요셉상은 손가락과 코가 없어지는 피해를 당했다한다. (2011. 2. 23.)
성당 안 제대 뒷편에는 '平和'란 메시지( 위)와 ,
원폭으로 유명을 달리한 성직자와 신자들 8,500여명의 명단이 나를 숙연케 했다.(아래) (2011. 2. 23.)
... ... ... ...
성당 첨탑에 있던 종곽 구조물은 수십미터를 날아가 낮은 곳에 쳐박혀 있다.
일본인들은 새로 쌓은 옹벽 한켠을 비워두어
원자폭탄의 처참함을 후대에 전하고 있었다.(2011. 2. 23.)
'여기애인(如己愛人)'의 삶을 불같이 살다 간 '우라까미의 성자' 나가이다까시가 살던 집.
원폭으로 부인을 잃고 남은 두 아이들과 살았다.
방사선과 의사로 봉직하며 방사능 과다 폭로로 병을 얻어 누워서
17권의 책을 저술하며 산 여기당(如己堂).
그는 여기서 전쟁등 인생문제의 그리스도교적 해답들 얻었지 싶다. (2011. 2. 23.)
앞 마당 동쪽에서 본 여기당.
기왓장을 세어보아도 그 작은 규모를 알 수 있다. (2011. 2. 23.)
여기당 내부와 나가이다까시가 쓰던 물건들... (2011. 2. 23.)
여기당 설명판.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동시에 쓰여있다. (2011. 2. 23.)
전시된 나가이다까시의 저서 중 한 구절들.... 위와 아래. (2011. 2. 23.)
방사선과 의사로 일하면서 '만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채 저술활동을 하던 나가이 다까시의 모습.
슬프고 고통스런 상황인데도, 두 아이들과 아빠는 행복해 보인다. (2011. 2. 23.)
나가이다까시의 친필 액자.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살아 숨쉴 것만 같다. (2011. 2. 23.)
평화공원 '평화기원상(祈念像)' 앞에서...
'평화'는 힘이 있어야 가능다는 것인가?
내가 보기로는 조각상이 너무 파워풀했다. (2011. 2. 23.)
1945년 8월 9일 11시 02분!
바로 이자리에 미국의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모든 것이 죽고, 녹아내리는 듯한 조각상이다.
지상 500m에서 섬광이 번쩍인 후,
이곳 나가사끼의 인구 24만명 중에서 73,884명이 유명을 달리 하였고,
그 중에 한국인은 15,000명 정도 였다고 하니, 20.3%가 한국인이었다.
부상자는 74,909명에 달했다한다.
원폭의 비참함과 비극중에도 어쩐지 '억울한 한국인'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마음일까?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인간의 전쟁은 이처럼 참혹함 그 자체다.
하여, 그 어떤 이유로도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 전쟁이다.
인간이 지성적 존재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2011. 2. 23.)
평화공원 한켠에 있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을 위한 추도탑.
'한국인'이라 하지않고 '조선인'이라 한 게 보기에 좋지 않았다.
우리의 외교능력은 이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쳐야 한다.(2011. 2. 23.)
히로시마보다 사흘 뒤(1945. 8. 9.)에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실물크기 모형.
길이 3.25m, 굵기 1.52m, 무게 4.5톤이었다 한다.
생긴모양이 뚱뚱해 '패트맨'(뚱보)라 불렀단다. (2011. 2. 23.)
원폭의 열과 힘으로 녹고 휘어진 철제 자재들(위)와
녹아 구슬이 된 유리조각들(아래)... (2011.2. 23.)
3박4일(2011. 2. 21 - 24)간 37명 우리 순례단이 전세를 내었던 일본 버스.
기사는 23세와 26세 된 두 간호원 딸들을 둔 분이었다.
그는 자기가 농사 지은 레몬을 우리들에게 한개씩 선물로 주었다.
목 마르던 차에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었던지!
해서,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그 분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길 것을
그러지 못해 후회스럽다. (2011. 2. 23.)
순례 마지막날 아침이 밝았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뷔페식 아침식사 스넾사진.
식사는 나흘 내내 정갈하고 풍족했다.
우리 일행 한국 아줌마들은 살찐다고 난리이면서도,
참 많이들 먹어댔다. ㅋㅋㅋ (2011. 2. 24)
'일본 26성인 순교지' 안내판이다.
'1597년 2월 5일 6명의 외국인과 20명의 일본인이 도요또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크리스챤(기리시탄) 금령때문에 오사까 교또에서 체포되어 이곳까지 호송되어 처형되었다.'는 내용이다.
설명에 의하면, 이곳의 26성인은 한달간 800Km를 맨발로 걸어 호송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 안내판을 나가사끼시 교육위원회가 세웠음이 적혀있다.
우리네와는 사뭇 다른 점이다. (2011. .2. 24.)
'일본 26성인 기념 탑'.
저 탑 뒤에 기념관이 있는데, 촬영이 금지되었다.
한 중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우리는 설명이 끝나도록 기다리다가 너무 오래 걸려
바로 기념 성당으로 가 마지막 미사와 성인유해공경 예식을 하였다.
여학생들의 다리가 맨살로 많이 드러나 있는데, 교육상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거리엔 그런 젊은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2011. 2. 24.)
'일본 26 성인 기념 성당 성 필리피 교회' 입구의 문양. (2011. 2. 24.)
성인공경예절을 위해 제단위에 모셔진 성인 유해(뼈).
아쉽게도 촛점이 흐렸다. (2011. 2. 24.)
공원의 시비일까?...
사진찍는 내 모습과 뒤에 있는사람들이 마치 거울인 듯
비치는 모습이 이채롭다. (2011. 2. 24.)
마지막 날, 가져간 상의를 갈아입었다.
더 핸섬한가요? ㅎㅎ (2011. 2. 24.)
기념탑 뒷면의 상징 조각.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
순교성인들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낸다싶었다. (2011. 2. 24.)
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일본26성인 기념성당. (2011. 2. 24.)
내려 오는길에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큰 불상.
다종교 혹은, 현세적 복락은 모두 수용하는 일본 사회의 특성을 보여준다하겠다.(2011. 2. 24.)
인구 42만 나가사끼 시내의 전차.
예전 서을에 다니던 것의 절반정도의 크기로 보였다. (2011. 2. 24.)
오우라(大浦) 성당(신자 발견 성당).
1865년 지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고딕양식 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성당측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성당은 인근에 새로 지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정책에 참고해볼 만한 대목이다싶다.
금교령이 풀리지 않은 초기 성당을 지었을때,
사람들은 이 성당을 '프랑스 절'이라 불렀었다고 하였다.
지적(知的)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
이 여성은 우리가 이곳을 들러보는 꽤 오랫동안
성당쪽을 바라보며 연신 노트에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서 물어보고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만 두었다.
학도일까? 전문가일까?
스케치를 했을까? 글을 썼를까? ... (2011.2.24.)
나가사끼 시내를 떠나기 전 버스 주차장 한 켠에 서있는 고풍스런 자동차.
옆에 있는 일본인에게 영어로 차에 대해 몇마디 묻자,
그는 아예 손사래를 치면서 가버렸다.
곧 전용 임대버스를 타고 후꾸오까로 가야한다.
가면서 한군데만 더 순례하면 이번 순례는 마친단다.(2011.2.24.)
오무라(大村)시 에 있는 호꼬바루(放虎原) 순교지와 그 역사를 설명하는 율리에따수녀님.
나흘간의 우리 순례를 안내해 주신 수녀님은 일본에서 4년간 일하고 있단다.
일본 가톨릭 순교사를 훤히 꿰뚫고 계셔 자랑스러웠다.
'한국에도 일본을 잘 아는 수녀님 같은 분이 많아야
일본인들이 우리를 깔보지 않고, 독도문제 같은 것도 생기지 않을 것'이란
내 말에 수녀님은 겸손하게 웃기만 하였다.(2011.2.24.)
호꼬바루 순교자 현양탑(위)과,
이곳에 한국인 순교자 13위도 함께 현양되어있다는 현양비(아래).
일본관가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부활신앙을 우려하여,
이지방의 묘지들에는 몸과 머리를 따로묻었다 한다.
처형한 머리는 본보기로 20일간 소금믈에 절였다가 옥문에 효수하기도 했다고 한다.
머리만 묻힌 곳을 수총(首塚)이라, 몸만 묻힌곳을 동총(胴塚)이라 부른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인간은 후대에 보면 이렇게 멍청한 비극적 존재다.
후손들에게 나도 그렇게 보이지나 않을지...? (2011. 2. 24.)
동행자들이 순교지를 떠나며...
모두가 아쉬운 모양이다. (2011. 2. 24)
드디어 나흘만에 되돌아온 후꾸오까 공항이다.
길동무 마리안나는 좋아하고(위),
이번 순례를 주선하고 함께한 분도여행사 사장님과 나는 아쉬워하는가? ㅎㅎ(아래)
뭐라고예? 아니라고예? ㅋㅋ
순례자에게 있어,
돌아 갈 집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품처럼 좋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내 인생의 돌아갈 집은...??
2011년 2월 21일에서 24일까지 3박 4일간 가진 '동양의 로마'로 불리는
일본의 나가사끼지방 기리시단(크리스챤) 성지순례는 이렇게 마감되었다.
따지고 보면, 성지는 다른 종교를 신봉한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처형장이거나 그들이 고통속에 살던집,
오로지 신앙의 희망 하나로 모였던 장소와 묘지들이다.
인간 삶의 역사는, 아니 지구행성의 생명의 역사는,
잔인한 것이 곧 거룩한것이 되는 모순과, 비논리와, 비합리가
원천적 혹은, 천부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주어진 역사다.
인간도살장...
그 곳을 후대사람들은 '성지'로 정하고,
권력 앞에 붉은 장미꽃잎처럼 스러져간 순교자들의 삶을 배우기 위해 오늘도 순례를한다.
나도 그 일원으로 국내에는 많이 다녔지만,
해외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본 나가사끼지역 성지순례를 마치며,
나는 하나의 가능성을 재 확인하였다.
정치적, 민족적으로는 소통이 참으로 어렵더라도,
종교적 신념하에서는 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든
공동체로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현대의 성자 폴란드출신의 아우슈비츠 '꼴베'신부가,
나가사끼의 성자 방사선과 의사 '나가이이다까시'박사가 바로 그런 소통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참으로 산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애초에, 그저 먼저 산 사람들의 믿음과 죽음의 행적을 더듬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마치 우리가 인생길을 아무 것도 알 수 없이 걷는 것처럼,
'다가오는 순례길에서 우리 '삶의 주제' 하나만이라도 찾거나 느낀다면
만족하리라.'고 아무 준비 없이 떠난 길이었다.
하여,
백장이 넘는 사진들을 받은 안내책자, 팸플릿, 브로셔 등을 참조하여
이만한 살을 붙이는데, 일주간이 걸렸다.
이 성지순례를 위해 아낌없이 봉사해준
이율리에따 수녀님과 분도여행사 사장님,
일본의 버스기사님, 그리고 모든 봉사자들에게 고마움을 드린다.
또, 지난 연말
"아빠와 엄마 가까운 해외라도 한번 다녀오세요."라고 하며
선뜻 여행비용을 내어놓은 둘째와,
가기 전 박봉에서 상당 비율을 쪼개 얼마간 앤화까지 바꾸어
여행비용을 보탠 맞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011. 2. 24.)
첫날,
다바라성당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내가 독서를 한 뒤,
신부님이 복음을 읽는데,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마르코복음의
한구절이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이 한 구절이 이번 성지순례의 내 '주제'가 된 셈이다.
그러니, 목적을 달성한 셈으로 삼고싶다.
이 성지순례를,
내 삶의 순례길을 재점검하는 계기로 삼고,
감히,
하느님과
모든 순교자와 우리 가족에게 바친다....^^*
( 2011년 3월 3일 강길수 )
[찬미가/Hymnus]Pange lingua-Missa in Cena Domini
연주 스콜라칸토룸서울/Schola Cantorum Seoul 김지혜 김종암 박 신 안소망 임종현
첫댓글 서양문물이 상륙했던 나가사끼 기리시도, 가톨릭 성지 순례 장면 많은 사진들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하비에르는 임진왜란 때 조선 선교를 위해 우리나라에 오기도 하였지요. 가톨릭인들의 순결한 신앙심과 처절함을 잘 읽었습니다. 천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일본의 나가사끼지방은 '동양의 로마'로 불리워질정도로 기톨릭신앙의 역사적 유물이 많았습니다.
일본정부에서는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유물들은 국가문화제로 지정하고,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음을 보았을때 우리와는 사뭇 다름을 느꼈씁니다. 감사합니다. 어링불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