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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 무이예술관 옆의 메밀꽃밭. 평평한 둔덕에 가꾼 이곳의 메밀밭 풍정이 봉평면 일대에선 최고라 할 만하다. |
해발 고도가 사람 살기에 가장 쾌적하다는 평균 700m인 ‘해피 700 평창’은 한 마디로 이효석의 고장이자 메밀의 고장이다. 193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심미주의적 작가 이효석은 평창 봉평에서 태어났고, 고향의 메밀꽃밭을 주무대로 한 서정적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써서 문명을 떨쳤다. 소설에서 이른 대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꽃밭’이 아니었다면 이 소설도 탄생하기 어려웠을 터이니, 곧 이효석 문학을 기리는 효석문화제는 메밀꽃 축제라 이름을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평창군은 봉평면 일대 곳곳에 조성해둔 메밀밭이 축제 기간에 딱 맞추어 만발하게 해, 매년 관광객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렇듯 이 축제에서도 메밀꽃밭은 배경일 뿐이다. 여러 가지 문학 관련 행사, 그리고 민속 축제와 토속음식이 기다린다. 평창의 9월은 이미 싱그러운 가을. 이 무렵 올라보는 흰바위 너덜의 산 백적산 풍치도 잔잔한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효석문화제
넓고 찬란한 메밀꽃밭 여기저기서 온갖 행사
도종환, 정호승 등 유명 시인 초청 ‘문학의 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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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위부터) 1.효석문화제 주행사장. 가산공원 바로 옆의 널찍한 공터에 마련된 이 행사장 가운데서 각종 공연이 매일 이어진다. 주위의 옛 토담집으로 꾸민 먹거리장터에서는 메밀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2.먹거리장터의, 옛날 방식 그대로 눌러 뽑는 메밀국수. 3.봉평 주민들로 구성된 타악기 연주팀인 쑥버덩의 공연. |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 중)
달밤이 아니라 한낮이라도 만발한 메밀꽃밭 풍경은 감탄스럽다. 해가 서편으로 기울며 붉은 석양이 질 때의 풍경도 달빛 아래에서처럼 숨이 막힐 지경이다. 평창의 효석문화제는 이 절정의 메밀꽃밭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벚꽃제나 진달래축제, 철쭉제들은 꽃이 만개하는 시기를 맞추어 축제일을 잡노라 노심초사다. 그러나 평창 효석문화제는 다르다. 축제일을 잡아놓고 그 날짜에 맞추어 꽃을 만개시킨다. 효석문화제위원회 김성기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메밀은 개화시기를 하루 이틀 정도 오차로 딱 맞출 수 있답니다. 심은 지 30일 만에, 아니면 40일만에 개화하는 것도 있는데, 기상이변이 없는 한 정확히 예정일에 만개하죠.”
축제위원회는 올해도 총 10만 평이나 되는 밭을 축제용으로 계약했다. 평당 1,300원 주고 지주들과 계약한 다음 메밀운영팀이 축제일에 만개하게끔 날짜를 맞추어 일제히 메밀 종자를 뿌린다. 올해 효석문화제는 9월2일부터 11일까지 열흘간이며, 이 기간 중 언제 가든 봉평면에서는 만발한 메밀꽃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메밀꽃밭은 봉평면 소재지 서쪽 흥정천에 걸쳐진 남안교 다리 건너의, 효석문화마을이 조성된 계곡 일대에 가장 크게 펼쳐진다. 그외 흥정천변 도로를 따라 북상하면 나오는 무이예술관 일대의 메밀꽃밭이 볼만하다. 약간 둔덕진 곳이고 뒤로 산줄기가 펼쳐지는 이곳 무이예술관 근처의 메밀꽃밭이 한결 소설 속에 묘사된 그 꽃밭 풍정에 가깝다. 지름 5mm 정도에 불과한 꽃 수천만 개가 다듬은 듯 고르게 펼쳐진 메밀꽃밭 사이로 탐승로를 내둠은 물론이다.
메밀꽃밭으로 눈을 만족시켰다면 다음은 메밀 음식을 맛보도록 한다. 효석문화제 때 봉평면내 효석마을의 먹거리장터엔 온갖 메밀 음식 난장이 펼쳐진다. 메밀국수를 비롯해 전병, 묵사발, 묵말이, 올챙이국수 등 메밀을 재료로 한 음식과 감자떡, 장터국밥 등을 한 가지에 2,000원의 싼 값에 사먹을 수 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일부 음식은 밤 10시까지도 팔아 밤늦도록 막걸리와 더불어 초가을 정취를 즐기는 관광객들도 많다.
먹거리장터 바로 옆은 가산 이효석을 기념하는 가산공원이다. 아름드리 돌배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작으나 멋진 공원으로서 한낮 햇볕이 뜨거울 때 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쉬면 좋을 것이다. 이 공원 한쪽에는 옛 강원도 주막을 재현한 충주집이 있는데, 축제기간 중 여러 음식을 파는 주막으로 운영한다.
눈요깃거리와 먹거리부터 얘기했지만, 실은 효석문화제는 개막일 불꽃놀이도 하지 않는 서정적 문화행사다. 우선 첫날 백일장으로 행사를 시작한다. 올해로 26회를 맞은 전국효석백일장에는 전국에서 2,000여 명이 몰려와 글 재주와 그림, 서예 솜씨를 다툰다. 이 날 9월2일 저녁 8시30분엔 주행사장, 곧 먹거리장터가 열리는 공터에서 60년대에 제작된 영화 ‘메밀꽃 필 무렵’이 상영된다.
볼만한 민속놀이도 연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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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민속행사 중 하나인 투계. |
볼거리가 가장 많은 날은 다음날인 9월3일이다. 이 날은 오후 2시부터 사물놀이, 국악공연, 가장행렬 등이 이어진다. 가장행렬은 봉평 주민 600여 명이 당나귀를 동원한 소설 속의 허생원 복색을 비롯해 괴나리 봇짐꾼, 소발구 등 옛적 풍물을 재현, 진행하는 것으로 오후 4시경 봉평면내 행진을 시작한다.
이 날의 절정은 오후 6시의 개막식 및 문학상 시상에 이은 문학의 밤 행사. 올해는 시와 노래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도종환, 정호승, 김용택씨 등 유명 시인들과 김원중, 이지상, 손병휘씨 등 시인이자 가수인 이들이 출연해 시 낭송을 하는 한편 시를 노랫말로 삼은 노래를 관객들과 함께 부르기도 한다. 올해로 7회째인 이 행사엔 이미 고정 마니아들이 생겨 행사장을 꽉 채운다고 한다. 이효석문학상은 상금이 1,000만 원이나 되는 만만찮은 상으로, 올해는 구효서씨의 ‘소금가마니’에 주어진다.
다음날 9월4일부터는 매일 오후 사물놀이, 농악 등의 민속이 주행사장에서 펼쳐진다. 매일 똑같은 팀이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상을 받은 용평면의 둔전평농악, 국제 민속제에서 대상을 받은 원주농악팀 등이 번갈아 출연하며 평창읍 주부 사물놀이패, 봉평면 특유의 타악기 공연팀인 쑥버덩소리패의 공연도 이어진다.
이들 고정적 프로그램 이외 매일 한두 가지씩 특별 공연도 펼쳐진다. 10일과 11일 오후 4시엔 일본 도야마현 난토시 민속공연, 10일 저녁 7시엔 이효석문학관 개관 3주년 기념 콘서트도 주행사장에서 열린다.
매일 오후 3, 4시경에는 사물놀이에 이어 지경다지기도 한다. 지경다지기는 일종의 지신밟기 같은 것으로, 관광객들이 함께 줄을 잡아당기는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축제위원회가 가장 신경을 기울이는 행사는 실은 이 체험행사들이라고 한다. 도시민들이 직접 시골 문화를 체험케 함으로써 도농간 거리감도 좁히는 한편 평창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남겨주자는 의도다. 평창군은 큰 돈을 들여 애써 마련한 행사이니 도시민들로선 싼 비용으로 귀한 체험을 해보는 셈이다.
체험행사는 크게 자연체험, 전통체험, 천시체험의 세 마당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자연체험은 메밀꽃밭길을 따라 걷는 문학 체험인 메밀밭 오솔길을 비롯해 평창군이 흥정천에 만들어둘 섶다리를 건너는 물가동네마당, 물가쉼터, 봉숭아 물들이기, 흙으로 빚는 세상 등 행사로 구성된다.
전통체험 마당은 윷놀이, 굴렁쇠 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민속놀이와 지게지기, 우마차 끌기, 찹쌀떡 치기, 재래 닭싸움대회, 메밀음식 만들기 등이 펼쳐진다. 그중 인기 높은 것이 도리깨마당으로, 옛 수동식 탈곡기구인 도리깨질을 체험해보는 것이다. 도시민들이 특히 재미있어 하여 매년 수십 개가 부러져 나간다고 한다.
천시체험 마당은 천연염색 체험과 작품 전시, 평창군 농특산물전, 봉평의 어제와 오늘 사진전 등으로 꾸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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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밭 야경. |
이들 주행사장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 이외에 유인촌씨가 운영하는 덕거연극인촌, 무이예술관 등에서 각각 나름의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올해 덕거연극인촌에서는 한여름밤의 꿈 공연을 비롯해 연극의상체험, 연극소품전 등을 연다(
www.youtheater.co.kr?전화 02-3444-0651). 무이예술관에서는 메밀꽃과 함께 하는 조각전, 메밀꽃 그림전, 메밀꽃 판화체험, 메밀꽃 필 무렵 소설화(小說畵) 전시, 도예전 등을 연다(전화 033-335-6700). 이효석문학관에서는 문인 시화전이, 국립평창청소년수련원에서는 9월3, 4일 메밀꽃축제 가족 캠프를 연다(참가 문의 033-330-0871).
9월의 평창에는 메밀꽃 이외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다. 봉평면을 꿰고 흐르는 흥정천의 하류인 금당계곡 래프팅도 좋고,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 산책도 좋다. 조금 멀리 간다면 대관령목장 초원길도 있다. 그러니 9월 첫 주 말 평창 말고 달리 또 어디를 갈 것인가. 효석문화제위원회 033-335-2323. 홈페이지 bongpyong.co.kr
교통
서울→장평 동서울터미널(02-446-8000)에서 봉평 들목인 장평행 버스가 1일 18회(06:30~18:20) 운행. 2시간30분 소요, 요금 10,300원. 장평터미널 033-332-4209.
장평→봉평 1시간 간격(07:00~19:30)으로 시내버스 운행.
자가운전의 경우, 영동고속도로 장평 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축제기간 중의 주말에는 매우 붐빌 것이니 차라리 드라이브 삼아 6번 국도를 이용, 둔내에서 우회해 들어가는 것도 좋다.
숙박
봉평면 북쪽 흥정계곡은 한국에서 펜션 밀집도가 가장 높은 ‘펜션계곡’이다. 그 하류인 금당계곡변에도 수많은 펜션들이 있다.
흥정계곡의 펜션들 중 계곡가에 위치한 업소 : 그라찌아 033-335-8887, 까사데일 336-4416, 산마을풍경 335-3225, 숨은그림찾기 336-5744, 어울림 336-5424, 에델바이스 336-3598.
금당계곡의 업소 : 소나무황토 333-7997, 별이빛나는밤에 333-9339, 원경 332-5225, 페르마타 334-7747, 봄여름가을겨울 334-4333, 리버테라스 333-7474, 카르페디엠 334-8889, 휘슬스톱 334-4700.
먹거리
봉평의 메밀국수 전문점들은 모두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고 배, 양파, 사과 등 과일과 야채로만 육수를 만들어 쓴다고 한다. 효석문화마을의 고향막국수(033-336-1211), 풀내음(335-0034), 현대막국수(335-0314), 진미식당(335-0242) 등이 메밀국수로 유명하다. 그외 산채요리로는 무이예술관 근처의 흔들바위식당(334-6788)이 괜찮은 편이다.
봉평면이 번잡스러우면 남쪽 5km 거리인 장평의 업소를 이용한다. 장평 버스터미널 근처의 산마루막국수(333-1002)가 요즈음 인기다.
백적산
서늘한 숲길과 쾌적한 너덜겅의 산
마을회관~조망바위~삼형제바위~정상~굴암사 코스가 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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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적산 너덜겅. 항상 시원한 바람이 지나는 쾌적한 곳이다. |
평창은 ‘해피 700 평창’이다. 그렇듯 해발 고도가 높아, 가을이 유달리 이른 고장이다. 햇살에서 풀기가 빠지고 메밀꽃이 필 무렵인 9월 중순이면 평창은 낮에도 이미 선선하다. 봉평 메밀꽃축제 때는 그러므로 주변의 어느 산을 올라도 좋을 것이지만, 기왕이면 조망이 툭 트이는 바위산 백적산을 찾아본다.
어느 지방에서든 인기 좋은 산은 조망이 좋다. 평창에서는 단연 백적산이 최고의 조망을 선사한다. 이 산은 정상 북면이 희디흰 바윗덩이들이 넓은 너덜겅을 이루고 있어, 이 너덜겅에 불어오른 가을 바람과 주변 조망이 백적산의 매력 포인트다.
산명도 이 너덜에서 유래했다. 차돌이 많이 섞여 밝은 대낮에는 눈이 부실 정도인 흰 돌들이 잔뜩 쌓인 산이라 하여 백적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백적이 아니고, 흰적산이라, 흰적산.”
산행로 입구인 이목정 마을서 사는, 가는귀가 먹었다는 구순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비가 올라치면 저 산이 거뭇거뭇 거무스름해져서, 저 산 보고 비가 올라는지 말라는지 알 수 있었다우.”
백적산은 옛적의 이목정리 주민들에겐 이를테면 기상예보관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나저나 9월의 독자 여러분 산행을 위한 8월 취재는 연중 가장 고역이다.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이미 볼이며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이런, 숨이 턱턱 막히는 뜨거운 열기를 감수하고 기꺼이 산행 안내에 나서준 평창의 특전단 출신 산꾼 최종만씨, 그리고 동행해준 평택 교포리의 농군 산친구들이 고마울 뿐이다.
8월 염천에도 뜻밖으로 시원한 숲길
차를 대둔 마을회관 앞을 떠나 뜨겁게 달아오른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동쪽의 계곡을 향해 올랐다. 길 옆 둔덕 넓은 밭의 채소들은 이 무더위에도 꼿꼿하다. 작은 계류를 건너자 흙길로 바뀌고 나무그늘도 길옆으로 드리워져 다소 걷기가 나아진다. 그러나 어젯밤 강변 야영 분위기에 취해 과음, 아침까지도 술이 덜 깬 두 사람은 결국 무더위에 두 손 들고 산행 포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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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적산 주능선으로 오르는 사면길. 온갖 식물이 무성히 자라는 곳이다. |
그러나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 후의 산행길은 짙은 숲 덕분에 뜻밖으로 서늘했으며, 산릉에선 줄곧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 한가운데서 맛보는 서늘한 산바람은 농익은 과실처럼 달디 달았다.
정상 2.7km 팻말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다가 최종만씨는 왼쪽 계류 건너 리본이 여러 개 매달린 숲속 길로 접어든다(마을회관에서 약 1.2km?좌표 N 37 35 54.5 E 128 29 17.4). 그는 숲속으로 접어들자마자 오른쪽의 지능선 길을 잡아 천천히 걸어올랐다. 숲속은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짙었으나, 쾌적했다. 큰키나무들이 워낙 짙게 우거지며 키작은 수목들이 아예 자라나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평창군의 예산지원을 받아 마을에서 등산로 정비작업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반바지로도 별로 긁히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연중 가장 무더운 때에 뜻밖으로 시원한 산길을 걷게 된 일행은, 특히 반바지를 입은 이들은 “이런 그늘에 이런 길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반바지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반바지 차림은 백적산 주능선 위로 올라서기 직전, 풀이 많이 자란 사면에서 풀쐐기에 혼뜨검을 당했다. 긴 바지라도 얇은 것을 입은 이들은 역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는 등 잠시 법석을 떨었다.
주능선에 오른 지 얼마 후 숲 위로 등줄기를 드러낸 작은 암부가 나선다. 저 앞으로 거무스름한 너덜겅을 얼굴인양 드러낸 정상부까지의 능선이 한눈에 바라뵈는 곳이다. 두어 명씩 번갈아 올라서서는 주위를 휘둘러보고는 이내, 뜨거운 햇살을 피해 다시 숲속으로 찾아들었다. 왼쪽 동편에서는 미약하게나마 끊임없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전신의 땀을 시원스레 거두어가곤 했다.
숲속에 길을 막고 나란히 선, 높이 3~4m 됨직한 자그마한 기암 세 개는 일러서 삼형제바위. 그후 15분 남짓 완경사의 편안한 능선길을 걷자 정상 0.24km 간판이 나선다. 평평한 산록에는 여러 가지 들꽃에 만발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이윽고 흰 바윗덩이 너덜겅에 다다랐다. 좌우 폭 100여m에 상하 길이도 그 정도 될까. 굵고 흰 바윗덩이들이 중첩해 쌓인 너덜겅은 언제 어느 산에서든 쾌적하고 시원스럽다. 비록 뜨거운 8월 햇살 아래이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의 너덜겅은 바람까지 불어오자 적당히 엉덩이 걸치고 앉아서 즐길 만했다. 북쪽으로 툭 트인 이곳에서는 당연히 오대산 줄기가 두드러진다.
너덜 가운데로 곧장 작은 돌탑을 따라 올라가자 리본이 매달린 숲속 길 입구로 인도된다. 그 직후 정상에 섰다. 마을회관을 떠난 지 2시간30여 분만이다.
신비의 물 나오는 굴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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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적산 야생화. |
혹부리처럼 돋아나 있는 정상 암봉에 누군가 자그마한 양철 정상표지판을 올려 두었다. 주변 조망이 신통찮고 숲그늘도 없어 몹시 무더운 정상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어서 얼른 남서릉 길로 접어들었다. 내리막길이어서 힘은 덜 들지만, 바람은 급작스레 잦아들어 아까 정상을 향해 오를 때보다 한결 무덥다. 몇 번 거듭해 “여기서 자리 펴자”, “아니다, 조금 더 가자”를 반복한 끝에 골바람이 치미는 잘록이에 자리 잡고 점심을 들었다.
서늘한 바람과 더불어 밀려오는 졸음기를 걷고 일어나,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남서릉 길을 걸었다. 여전히 짙은, 그러나 변화 없는 숲길이 이어지자 조금씩 지루해하기 시작한다.
정상 남서쪽 약 400m 지점에서 우측 골안이로 빠지는 갈림길이 있다(좌표 N 37 35 12.2 E 128 29 29.8). ‘정상 0.4km, 골안이 1.5km’ 팻말이 선 곳으로, 여기서 하산하기는 좀 뭣하다며 그냥 지나쳤다. 1시간쯤 뒤, 오른쪽으로 다시 뚜렷한 하산길이 나타나 세 사람이 길 확인 차 이 길로 내려갔다.
그 직후 나서게 되는, 잡풀로 뒤덮인 헬리포트에서는 뚜렷한 족적을 따라 곧장 직진하면 안 된다. 그러면 출발점과 능선 반대쪽인 신리 사동 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헬리포트로 나서자마자 오른쪽 직각방향의 다소 희미한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좌표 N 37 34 37.8 E 128 28 49). 잡목이 한결 많아진 능선에 접어들며 반바지 차림은 간혹 가시덩굴에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래도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 속에서 긴 바지로 갈아입을 엄두가 나지 않는지 그냥 견디어낸다.
부처바위라 부른다는, 숲속에 오두마니 앉은 네모난 바윗덩이를 지나 별 재미없는 능선길을 700m 넘게 내려가서는 급경사 내리막으로 다시 고도를 뚝 떨구었다. 거기 안부에 ‘←신리, 골안이→’ 팻말이 서 있다. 이제야 비로소 하산길목에 다다른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까 정상 직후 나온 팻말에서 그냥 골안이로 빠지는 것이 원점회귀형 산행으로 최적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 고갯마루는 과거 대화 사람들이 장평, 봉평으로 장 보러 다니던 고개였다고 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생원과 동이가 나귀 끌고 넘던, 대화장터 가는 고갯길이 바로 이 고개였을까. 그러나 대화쪽 길은 잡초가 무성한 것이 사람이 다니지 않은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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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적산 정상의 암봉. 조망은 괜찮으나 그늘이 없다. |
북쪽의 장평쪽 길도 잡풀이 만만찮아서 반바지 차림인 이들은 다시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잠시였다. 이내 거름 냄새가 진동하는 고랭지 채소밭이 저 아래로 보인다. 채소밭 왼쪽 옆 찻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채소밭과는 무관한 지류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에서 머리를 식혔다.
그러나 거기서도 마을회관까지는 3km쯤에 2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이니, 차량 2대로 가서 한 대를 미리 하산지점에 가져다둘 요량이 아니면 백적산 정상 직후 굴암사란 작은 절도 있는 골안이로 빠지는 길을 택해 하산하는 것이 최선이지 싶다.
굴암사는 작은 바위굴을 통해 약수가 솟아나오는 절로, 이 물로 여러 병을 고쳤다고 하니 하산길에 한 통 떠오도록 한다. 법당 바로 옆에 안내문과 더불어 물을 떠갈 수 있게 해두었다.
백적산을 한 바퀴 휘돌아보니 마을회관~조망바위~삼형제바위~정상~골안이(굴암사)가 가장 무난한 것으로 판단됐다. 약 6km에 3~4시간쯤 걸릴 것이니, 하산을 마친 뒤 점심을 먹어도 될 것이다. 그런대로 괜찮은, 한 번은 가볼 만한 산이다. 다만 부처바위 지나서까지 돌아오기에는 능선에 별다른 경치가 없거니와 하산길이 너무 멀고 지루하다.
접근 드라이브 코스
메밀꽃 축제장인 봉평에서 남쪽 장평리로 나와 영동고속도로와 나란히 6번 국도를 타고 동진, 용평면 소재지 지나 3km쯤 가면 도로 우측으로 굴암사 표지판이 큼직하게 걸려 있다. 이 길로 우회전해 1km 올라가면 백적산 등산로 안내판이 뵌다. 이 안내판 왼쪽 옆길로 200m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마을회관이 뵌다. 이 마을회관 왼쪽 옆에 승용차 몇 대 댈 만한 공터가 있다. 대중교통편은 이 마을회관까지 이어지는 것이 없다.
글 안중국 차장
사진 김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