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작전국장 李龍文 차장 朴正熙 장군의 숙명적 인간관계, 주한유엔軍의 쿠데타 계획, 부산정치파동이 뒤엉킨 숨막히는 大드라마의 철저 추적 - 미 국방성 비밀문서(美 國防省秘密文書) 최초공개
장군, 새벽에 나타나다

『웬 미군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미군이?』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는 뜨락으로 나갔다.
『지금이 어느 땐데 쿨쿨 잠만 자?』 어깨를 툭 치며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육군 본부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준장이었다. 얼굴은 희고, 키는 크고 눈이 노란 이 장군을 경비원이 미군으로 잘못 본 것이었다. 그는 선우씨의 평양 고보 두해 선배였다. 선우씨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직에서 그 며칠 전에 물러난 유명한 반공 검사 출신. 이 장군을 평소 믿고 존경하는 터였다.
이용문 장군은 『지금 대구 육본(陸本)에서 나 혼자 총장차를 몰고 달려 오는 길이다』고 했다. 이 장군은 덮개를 벗기고 지프차의 3성장군 표지판을 보여주었다. 선우씨는 이 장군을 2층으로 안내했다. 이 장군은 대뜸 『우리, 같이 무력혁명을 하자』고 했다. 선우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승만 정권에 반대, 장면씨를 총리로 추대하려는 목적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던 선우씨는 그 즈음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 박사를 엎어버릴 쿠데타를 하자는 거야. 너희 쪽 사정은 어떤가?』 선우씨는 「우리」란 표현에 주목했다.
『우리라니? 선배님 말고 많은 장군들이 가담하?있습니까?』
『아니야…자넨 왜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는가? 너희들이 찬성하면 장면박사 추대하고 곧 혁명 일으키겠어』
『이 박사는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죽여야지』
『죽여요? 난 못합니다. 민주주의란 수단과 절차가 중요한데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더구나 우리 집안은 3대째 천주교 신자입니다』
『야 이 사람아, 이런 판국에서 페어플레이가 있을 수 있나? 조금도 주저말고 거사하세. 참모총장도 알고,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의 묵계도 받아 두었어』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두 시간쯤 열띤 토론을 벌였다. 후배인 선우씨가 설득당하지 않자 이 장군은 탁자를 쾅 치면서 일어났다. 희끄무레 동이 터 오는 바깥으로 나가는 이 장군에게 선우씨가 말했다.
『선배님 오늘 일은 내 목숨 다할때 까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을거야』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리곤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 13년 뒤 선우종원씨(66·변호사·전 국회 사무총장)는 「망명의 계절」이란 책에서 이상과 같은 에피소드를 공개했었다. 다시 그 15년 뒤인 1981년에 국토 통일원은 6·25 전사 관계 미국 정부 문서집을 2권 발간했다. 비밀 등급이 해제된 외교·국방·문서였다. 이 장군과 선우씨가 만난 바로 그 무렵 주한 미군이 한국군을 동원,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전문 3통도 있었다. 다시 그 3년 뒤, 필자는 선우씨의 회고담과 이 극비 전문을 실마리로 삼아 32년전의 부산정치 파동, 그 무대 뒤에서 어지럽게 벌어졌던 60일간의 숨막히는 드라머, 그 진상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월남 독립군 도운 풍운아
「이용문 장군 배 쟁탈 승마 대회」를 통해서나 서울지검 이건개 부장 검사(전 서울시경국장)의 아버지로서 약간 알려져 있는 이 장군은 짧고 굵은 인생을 살고 간 풍운아였다. 육군 정보국 인맥의 대부(代父)였던 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선배이기도 했으며 2대에 걸쳐 숙명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와 맺었다.
이용문 장군은 1916년 1월 22일 평양에서 났다. 아버지도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었다. 그는 보통학교 땐 짓궂은 장난꾼, 평양고보 재학 때는 일본의 차별교육에 대항, 동맹 휴학을 주동했다. 1934년 그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신입생 약5백명 가운데 한국인은 둘뿐이었다. 37년12월에 일본 육사 50기생으로 졸업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육군 창모총장 채병덕과 이종찬은 그의 1기 선배였다. 건장한 체격에 힘이 장사인 이용문 장교는 말을 잘 탔다. 도오꾜 기병 연대의 장교로 배속되었다가 만주로 가서 실전을 처음 경험했다. 그 사이 평양 유지의 딸인 김정자와 결혼, 첫아들 이건개를 낳았다. 42년에 이용문 장교는 도오꾜의 육군 참모본부로 전속됐다. 일제 시대를 통틀어 참모본부에 근무했던 한국인은 홍사익과 이용문뿐이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육사로는 7기가 늦고 나이로는 한 살 아래인 박정희 장교를 처음 만났다.
1943년 이용문 장교는 남방 사령부 참모로 보내졌다. 말레이시아, 버마 등지를 옮겨다니다가 사이공에서 해방을 맞았다. 당시 그의 계급은 소좌, 그는 한국인으로는 몇 안되는 전투 병과(보병)출신이었다. 이용문 장교의 진면목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이 때였다. 사이공에서 잠시 같이 있었던 그의 후배 김정렬씨(당시 항공 대위·전 국방부 장관)는 이렇게 회고했다. 『용문 형은 일본 장교들 사이에서도 스타였다. 위로는 귀여움, 밑으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 실력이나 용모, 행동가짐이 출중했다. 그 때 남방사령부는 전투 능력을 간직한 채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항복, 장교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용문 형은 이 때부터 머리를 기르더니 중국인으로 위장, 여권을 얻었다. 그리곤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월남 독립군을 뒤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항복한 일본군 사령부에서 약 30만 피아스타를 뽑아냈는데 지금 한국돈으로 치면 1백억 원쯤 되지 않을까? 이런 자금을 바탕으로 월남 독립군 조직에게 무기도 공급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게릴라 지도자인 호지명의 조카 딸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늘 정의감이 넘쳐 흘렀던 그는 대단한 로맨티스트였고 월남인들을 돕는 데 그 낭만을 불살랐다. 1946년 4월 나는 1천1백10명의 한국 교민들을 이끌고 귀환선을 탔다. 원래 용문 형이 인솔자로 정해져 있었으나 그는 월남이 독립하는 날을 보고가겠다고 남았다. 「형님! 조심하시오」라고 했더니 「걱정없어. 천지는 넓어」라고 호탕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떠난 석 달쯤 뒤에 용문 형은 프랑스 군에게 체포돼 주거 제한을 당했다』 1947년9월 그는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그의 가족은 이미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육군 정보국 인맥의 대형(大兄)
그는 귀국 후 무역업을 하려고 했다. 홍콩 상해에서 설탕을 들여올 길을 찾기도 했다. 국군이 창설되자 채병덕의 권유로 그는 군에 들어갔다. 1948년 11월에 육군 사관학교 제8기 특대생 과정을 마치고 그는 소령으로 임관됐다. 초대 육군 수색대장. 한 달 뒤 수색단은 기갑 연대로 바뀌었다. 곧 중령, 대령으로 올라간 그는 육군본부의 제2대 정보국장으로 취임했다. 점인 국장은 백선엽 대령. 여기서 이용문 국장은 문관 박정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1948년 10월에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은 대대적인 「숙군」을 시작했다. 그 작업의 조직상 책임자는 백선엽 정보국장, 실무책임자는 김창룡 대위였다. 49년 7월까지 진행된 「숙군」으로 4천7백49명이 총살, 유기형, 또는 파면되었다. 육사 3기생의 경우엔 2백81명의 임관자 가운데 2백58명이 조사를 받고 60여명이 숙군되었다고 「한국전쟁사」(국방부 전사 편찬실 펴냄)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증거주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고문이 성행했으며 이에 따라 술친구나 동기생을 억울하게 끌고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소령도 숙군되어 한때 군복을 벗었으나 백선엽 정보국장이 그를 문관으로 구제하여, 정보국에 근무하게 했다. 백선엽씨는 『그 때 벌써 그가 큰 인물감임을 알 수 있었기에 인재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났었다. 문관이었지만 정보분석에 뛰어나 중요한 기안과 분석은 주로 그가 맡았다』고 회고했다. 백선엽에 이어 정보국장이 된 이용문 대령 밑에는 박정희 문관뿐 아니라 많은 「미래의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유양수 과장(전 동자부 장관)을 비롯, 육사8기를 갖 졸업한 김종필(전 국무총리) 이영근(전 유정회 총무) 서정순(전 중앙정보부 간부) 석정선(전 중앙정보부 간부) 전재덕씨등(전 중앙정보부 간부)과 5·16때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태화씨(당시 문관·전 서울신문사장) 등등.
이용문 국장의 큰 그늘 아래에 모인 이들은 그 뒤 군 안에서 정보 인맥을 형성, 5·16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의 현대사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맥이란 것은 그저 같이 있었다는 인연 정도로 이루어지는건 아니다. 의리나 이념의 동질성, 또는 공통의 이해 관계가 접착제로 작용해야 한다. 이용문 국장을 필두로 하는 정보국 인맥은 의리와 가치관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했던 것 같다.
박정희 문관도 감복한 큰 그릇
이용문과 박정희의 관계에서 보면, 박정희 소령의 생명을 「숙군」에서 구해준 데는 백선엽, 그를 문관에서 현역으로 복직시킨 데는 제3대 정보국장 장도영씨의 배려가 결정적이었으나 진정으로 그를 알아주고 그를 감복시킨 사람은 이용문 장군이었던 것 같다. 장남 이건개 부장 검사(42)의 회상-. 『그 무렵 우리 집은 서울 북아현동에 있었다. 많은 장교들이 자주 놀러 왔다. 채병덕 장군, 뒤에 한강교 폭파 책임을 지고 사형된 최창익 공병감, 이종찬 장군 등이 기억난다. 채병덕 장군은 너무나 뚱뚱하여 허리를 굽혀 군화끈을 조를 수가 없어 부관이 늘 대신해 주던 게 눈에 선하다. 가장 자주 왔던 분은 역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씨는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를 열심히 하셨다. 진지한 토론이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두 분은 6·25 전투 중 적군에 포위되어 후퇴하면서도 「이럴 땐 물자를 아껴야 한다」. 「위기 땐 물자를 풍성히 써야 한다」고 서로 논쟁을 하더란 것이다. 어머니는 가끔 6·25때 부하에게 욕 안하고 손찌검 안한 장군은 선친과 박정희 장군 두 분뿐이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시 문관으로 국장실 근무를 했던 전 서울신문사장 장태화씨의 회상-.
『이용문 장군은 정말 그릇이 큰 분이었다. 사소한 데 구애받지 않고 대범했으며 쾌활, 활달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면서도 경솔하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남을 도우는 사람이었고 도무지 사심이 없었다. 행동적 인간이었고 인정이 많았다. 아무리 부하가 잘못해도 기껏 한다는 욕은 「야, 이 사람아…」 정도였다. 채병덕 총장이 주재하는 참모회의엔 지각을 자주 하고 회의 도중 코를 골면서 졸기가 일쑤였다. 친구 사이인 채 장군이 평안도 사투리로 「야, 너 농문이 졸아서 되간?」하고 면박을 주어도 태연했다. 발언을 하는 걸 보면 졸면서도 다 듣고 있었던 것같이 조리정연했다. 그래서 이용문 장군의 낮잠은 「뭘 그렇게 자질구레한 걸 이런 자리에서 논의하느냐. 그런 건 졸아도 다 안다. 좀 굵직한 데 관심을 갖자」는 충고처럼 해석되기도 했다』 「첫눈에 반할 것 같은 쾌남아」(선우종원씨의 얘기)였던 이용문 장군의 이러한 인품이 김종필 소위 등 정보국의 청년 장교들에게 준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남산에서 게릴라전 기도
6·25가 터지기 직전 이용문 대령은 국지전이 있었던 옹진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됐다가 부임하자마자 면직돼 참모학교 부교장(교장은 김홍일)으로 전보됐다. 이 면직 소동의 배경엔 정보비 지출을 둘러싼 신성모 국방장관과의 불화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6·25 당일 육군 정보국 작전정보실의 박정희 실장은 육본에 없었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 북한반장이던 김종필 중위가 당직을 하고 있다가 남침 소식에 최초로 접했고 곧 수뇌부에 연락했다. 육본 수뇌부는 대부분 전날밤의 파티 영향으로 골아떨어져 있었다. 이용문 대령은 전투 병력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연락 요원 겸 독전 요원으로 서울 방어선에 투입됐다.
6월27일 김종필 중위는 유재홍 장군 사령부로 가다가 정릉 입구에서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전임 상관에게 김 중위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물었다. 이 대령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내일 아침까지 버티기가 힘들다』고 했다. 김 중위는 이 판단을 채병덕 총장에게 전했다.
6월 28일 밤 이용문 대령은 3사단 참모장 김종갑 대령과 함께 성북 경찰서에서 약5백 명의 장병을 지휘하고 있다가 북괴 전차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는 와해돼버렸다. 한동안 이 대령은 전사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용문 대령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고 이종찬 장군의 생전 회고담에 따르면 이 대령은 부하들과 함께 남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꾀했었다고 한다. 식량도 물도 없어 나무 열매를 따 먹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지냈다고 한다. 『이 대령은 할 수없이 부하들을 해산하고 석달 동안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는 게 이종찬 장군의 얘기였다. 적 치하 석달 동안의 이용문대령에 대해선 이건개 검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 건 서울이 함락되고 보름쯤 지나서였다. 그 길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숨어다니기 시작했다. 친척 집이나 셋집에 들어가면 방 바닥 밑으로 땅굴을 파고 아버지는 그 속에서 숨어 살았다. 어느날 밤 괴뢰군이 수색을 나왔다. 장롱을 뒤지던 한 군인이 누워 있는 나의 오른손을 밟았다. 어린 마음에 비명을 지르면 혹시 방바닥 밑에서 숨어 있는 아버지가 들킬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때의 상처가 곪아서 서울 수복 뒤 나는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 마디를 잘라야 했다. 인천 상륙으로 북괴군이 밀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숨어 있던 지하실로 북괴 패주병들이 들이닥쳤다. 아버지를 나오게 하더니 옷을 벗으라고 했다. 총살하려는 듯했다. 이 때 어머니가 총구 앞으로 넘어지면서 「날 대신 쏘라!」고 울부짖었다. 북괴군인은 공포를 한방 쏘더니 옷만 갖고 그냥 가버렸다』
박정희 대령을 다시 부하로
수복 뒤 다시 군에 복귀한 이용문 대령은 낙동강 방어전이나 북진 대열에서 빠졌던 탓으로 승진이 늦었다. 강원도 계엄 민사부장, 육군 종합학교 기획처장, 제9사단 부사단장 등 화려하지 못한 자리로만 떠돌았다. 제9사단 부사단장 자리에서 그는 또 박정희 중령과 만났다. 박 중령은 참모장이었다. 9사단이 속한 동부 전선의 제3군단은 51년 봄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거의 괴멸되다시피했다. 「현리 전투」라고 불리는 이 후퇴에서 이용문 대령과 행동을 같이 했던 당시 부연대장 이근양씨(예비역 소장·전석공 사장)는 말한다. 『그 전투 며칠 전 박정희씨는 다른데로 전속을 갔었다. 이용문 대령과 후퇴를 하는데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령부와 통신이 끊긴 적이 있었다. 그때 이용문 대령은 야전 전화기를 늘 들고 다녔다. 왜 갖고 다니는지 몰랐는데 그는 이때 숲속으로 들어가 전화선을 찾아내더니 그 선에 전화기를 연결, 직접 사령부와 통화하는 것이었다. 역시 2차 대전 때의 실전 경험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1951년 5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 방위군 사건과 관련하여 신성모 국방장관을 면직, 이기붕을 대신 임명한 데 이어 6월 22일엔 정일권 참모총장과 강문봉 작전국장을 미국 참모 대학으로 유학 보내고 이종찬 중장과 이용문 준장을 각각 후임 발령했다. 신성모-정일권-강문봉의 퇴장과 이기붕-이종찬-이용문의 등장은 만군(滿軍) 인맥의 퇴조와 일군(日軍) 인맥의 승세를 뜻하는 변화였다. 참모차장에도 일본 육사 55기 출신인 유재홍 소장이 임명되었다. 작전국장이 된 이용문 장군은 직속 부하인 작전차장에 박정희 대령을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세 번째로 콤비가 된 것이었다.
이종찬 총장이 장악한 육군 본부가 일본 육사나 학병 계열 일색이었던 데 대해 박정희 대령은 만군 출신이었다. 물론 그는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사에 편입되어 57기로 졸업했으나, 일본 정규육사 출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만군 출신으로 분류했다. 이용문과 박정희의 인간 관계는 파벌적 갈등에는 구애받지 않을 만큼 질기게 엮이어 있었다.
궁지에 몰린 대통령의 도박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 23일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그의 재선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서울 사수」란 속임수,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약화시켰다. 특히 「서울 사수」란 거짓 방송으로 수많은 인명을 적의 손에 넘겨 주었다가 서울수복 후엔 「도강파」와 「비도강파」로 분류, 「비도강파」를 마치 불온 집단인 것처럼 취급하였던 이승만 정권에 대해선 국회의원들의 감정이 좋지 못했다. 수많은 동료 국회의원들이 거짓 방송에 속아 납북된 것을 그들은 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되게 되어 있었으니 이승만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선우종원씨 같은 사람도 이승만 반대노선에 서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이승만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구속시켰던 언더우드 부인 살해범들이 보복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승만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이승만은 점점 극동 전략의 장애 요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기본 입장에 어긋난 행동을 되풀이 한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미국의 전략은 『지지도 말고 이기지도 말라』는 것으로 굳어졌고 회담을 통한 명분있는 휴전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일본을 재무장시켜 중공과 소련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이용한다는 방침도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면 우리는 공산군에게 향해 있는 총구를 그들에게 돌리 것이다』고 선언하고 휴전 회담에도 극렬하게 반대하기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은 거추장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51년 후반기부터 국무성이나 주한 미군 대사관측은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 친미 인사들을 리스트에 올리고 암시들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다. 「포스트 이승만」의 정권 담당자로 가장 유력시 된 것은 주미 대사를 지낸 당시 국무총리 장면 박사였다. 선우종원씨에 따르면 장면씨도 대권에 도전할 의지를 분명히 했었다고 한다.
재선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51년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1백83대19로 무참하게 부결돼버렸다. 국회가 이런 분위기라면 재선은 불가능하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판단했다. 이 무렵 정계에선 두 개의 신당이 탄생했다. 오위영·정헌주·김영선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원내 자유당과 이범석 등 족청세력을 뼈대로 한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었다. 원내 자유당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상징적 대통령에 이승만, 실권 있는 국무총리에 장면씨를 추대할 계획이었고 원외 자유당은 처음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했다.
원내 자유당·민국당·민우회 등 야당연합 세력은 52년4월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발의시켰다. 꼭 개헌정족수인 1백23명이 서명했다. 한 사람이라도 이탈자가 생겨도 안되는 아슬아슬한 세력 분포였다. 정부와 원외 자유당측은 두 번째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이에 맞섰다. 이 팽팽한 무대에 등장한 것이 장면씨의 후임 총리 장택상씨였다. 그는 먼저 20여 명의 영남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라회를 조직, 국회에 발판을 만들고 혼미한 정국에서 「태풍의 눈」으로 부각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