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1854~1895)
조선 말기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 별명은 녹두 장군, 아버지가 군수에 항거하다가
잡혀 죽자 사회 개혁에 뜻을 품게 되었다.
1888년 동학에 들어가 고부 접주가 되었다.
1892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심하자 그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부 당하다 1894년 1월에 왜적과 서양 세력 배척 부패한 지배 계급 타파 등을
외치며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겼다.
이 운동은 일본의 세력에 대항해 싸워 중 나무 지역과 함경도, 평안 남도까지
차지하였으난 현대식 장비를 갖춘 일본군에게 패하였고 전봉준은
순창에서 붙잡혀 1895년 처형당하였다.
녹두 장군 전봉준은 1854년 전라도 고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리 나라는 세습 봉건 돵조의 부패와 무능으로 탐관 오리들이 들끓어
민란이 끊이질 않았다.
한편 서구 열강들이 호시 탐탐 우리 나라를 집어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전봉준은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동학인의 궐기를 호소하며 혁명 봉기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1894년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은 잠자고 있던 민족에게 만인 평등
의식을 심어 준 의기에 찬 농민 봉기였다.
전봉준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동학 농민 운동은 간악한 일본군의
간섭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기상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기치~어떤 목적을 위하여 내세우는 사상이나 강령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혁명의 선두 주자 전봉준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잘 사는 세상
이는 당시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바였다.
그러나 힘없고 배고픈 백성들은 대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 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혁명의 깃발을 치켜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녹두 장군 전봉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이 나라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큰 뜻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는 썩을대로 썩어 높은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주머니를
쥐어짜 배를 더욱 굶주리게 하였다
급기야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일어서니
그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나는 그들의 용기가 참으로 놀라웠다.
농민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고부 관아로 향할 때는 그들의 분노가 전해 오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자신들의 요구만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관군에 맞선 것은 지금 물러선다면 예전과 다름없는 가난이 계속될
것임을 알았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나와 일본이 이 일로 우리 나라를 넘보자 전봉준은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그냥 물려설 전봉준이 아니었다.
전봉준은 폐정 개혁 12개 안 을 내세우고 그것을 시행할 집강소를 만들었다.
동학 농민군이 해산하며 떠나리라 생각했던 일본은 도리어 조정에 친일 세력을
만들며 제도를 뜯어 고치고 간섭했다.
우리의 조정을 간섭하다니 나 자신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일본의 태도를 지켜 보던 전봉준이 다시 동학 농민군을 모으니
그의 밑에 10만이 넘는 큰 병력이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의 힘은 막강했다.
더욱이 관군이 그들과 맞서지는 못할망정 연합하여 동학 농민군과 대항하니 더욱 안타까웠다.
조정은 왜 일본의 그런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에 대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전봉준은 여기서 불러서지 않았다.
죽는 그 날까지 나라를 위한 혁명의 정신을 백성에게 심어 주고자 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끈질긴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바로 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 찾아보고 작은 일에서부터
실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